밀리환초 학살사건
1. 개요
1945년 2월, 태평양 마셜 제도 밀리환초에서 일어난 학살사건.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을 마셜 제도로 끌고와서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짓게 했다. 하지만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미군의 봉쇄작전이 시작되었고 섬 자체도 산호초였기 때문에 토질이 좋지 않아 식량이 늘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6월 미군이 마셜 제도의 대부분의 섬을 점령한 이후로는 미군의 봉쇄작전이 심해지면서 섬에는 식량 보급이 끊겼다. 그래서 병력을 섬 전역에 분산시켜가며 자력갱생을 도모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시이기에 미군은 고기잡이를 나온 일본군에게 거침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선전방송까지 곁들여[1] 속을 박박 긁어댔다. 이렇듯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심화되자,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불만도 고조되어 갔다.[2]
2. 조선인 학살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어느 일본군이 자신이 먹던 '''고래고기'''를 지나가던 조선인 군속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 주었다. 조선인들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고 먹었지만 며칠뒤 무인도로 고기를 잡으러 간 조선인들은 섬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살점이 도려내진 조선인들의 시체'''를 목격한 것.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몰살을 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1945년 2월 28일, 밀리환초 내 체르본섬에 살던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감시하는 일본군 감시인 11명을 살해한 뒤 미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숲으로 유인한 뒤 살해했다.
그러나 11명중 7명만을 살해했고 4명은 끝내 놓치고 말았고, 이는 다음날 끔찍한 결말로 돌아왔다.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15명이 체르본섬에 상륙해 섬안에 있던 조선인 100여명을 학살했다. 원주민 15명도 조선인들에게 가담했다는 혐의로 학살을 면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이 당하고만 있지않고 둔기나 곡괭이를 휘두르거나 돌과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며 저항했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3. 육해군 내전
일본군의 만행과 충격적인 일화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인육 사냥은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같은 일본인까지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일본군 장병들 중 가장 희생이 많았던 것은 이시가와 현 가나자와 시에서 편성되었던 일본 육군 보병 제107연대 제3대대 였다. 이 부대가 파견되었을 때는 이미 3,000명 이상의 일본 해군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심각하던 차에 식량 보급까지 끊기면서 육해군은 서로 '''진짜 적대관계'''가 되었다. 식량을 훔친 장병이 사살되는 건 기본이고, 해군이 지하호에 감추어둔 식량을 육군에게 나누어주지 않자 아예 상호간의 총격전까지 발발했다. 육군들끼리도 식량 배분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고 프래깅과 자살이 빈번했다.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흐르니 같은 일본인이고 뭐고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 연출된 것.
전후 복원선 에이가와 마루에는 대대 총원 1000명 중 3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만이 탈 수 있었다. 밀리환초에 미군이 상륙한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참극.
4. 기타
한편 이웃한 윗제 환초에서도 식인 사건이 빈번했다. 일본군 제7포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실종되고 인육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던 상황에서 1945년 5월~6월 사이에 덜미가 잡혀 인간 사냥꾼 전원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같이 충격적인 사건마저도 뒤에 일어난 치치지마 식인 사건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3] 밀리 환초는 기아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치치시마는 그런 문제도 없이 단순히 재미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 [4]
2006년 설치된 대한민국 정부의 강제동원 진상 조사 위원회 에서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 해 이 사건이 실제 일어난 사실임을 정부 조사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고 있지 않다.
[1] 도쿄 로즈에 대한 보복성 목적도 있었다. 참고로 조선인들이 징용되어 온 것을 의식해 아리랑을 틀기도 했다고 한다.[2] 실제로 태평양 전쟁 중후반에 들어서는 (밀리환초는 아니었지만) 미군이 상륙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힘을 합쳐 봉기하거나 일본군에게 보복을 행한 조선인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미군은 눈앞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곡괭이로 일본군 기관총 사수를 처참하게 살해한 경우도 목격했다고 한다.[3] 밀리환초보다 더 막장인 게 해군까지 작당했다.[4] 식량의 부족으로 인육을 먹는 사건은 독소전쟁에서도 이따금 발생한 일이지만 단순히 재미로 식인을 한 행위는 같은 일본군 조차도 미친 짓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사건을 주도한 타치바나 요시오는 학대를 당해 인사불성이 되어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고 현직 군인임에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심지어 학대한 사람 중엔 임팔 작전 때 생환한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조차도 '''"무타구치 렌야도 이런 명령은 안 했다!"'''며 일갈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