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1. 개요
獎忠壇公園 | Jangchungdan Park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61 (장충동2가)에 있는 공원이다. 남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다. 면적은 29만 7000㎡.
2. 역사
조선시대에 이 자리에는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는 군영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년) 10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고종황제가 옛 남소영 자리에 제단 ‘장충단(奬忠壇)’과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융희 2년)까지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 때문에 저 해를 마지막으로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이후 1909년(융희 3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그를 추모하는 소위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이는 장충단을 능욕하는 행위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나타내는 장충단을 폐사시키고 제단을 비롯한 여러 시설들을 훼손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등 완벽한 일본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8.15 광복 이후 서울시에서 일본풍이 짙은 시설들을 전부 철거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계속 공원으로 기능했다. 단, 1950년 6.25 전쟁으로 일부 시설들이 파괴당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정치 유세 현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1957년에 있었던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과 1971년에 있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 등이 있다.
1960년대부터 장충단공원 영역에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면적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1984년 9월 22일에 건설부에서 장충단공원 근린공원을 남산공원의 일부로 합병했다.[1]
3. 공원 내부 시설
3.1. 역사 관련 시설
3.1.1. 장충단비
장충단을 건립할 때 같이 만들었다. 원래는 사당과 함께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장충단을 폐단시키면서 장충단비도 뽑아서 버렸다. 8.15 광복 후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본래 자리인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에 옮겨놓았다.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 글자는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직접 쓴 것이다. 뒤의 비문은 민영환이 지었다. 총 143자로, 장충단을 세운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글이다.
3.1.2. 수표교
청계천에 있던 다리였으나 1965년에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왔다. 자세한 내용은 수표교 항목 참조.
3.1.3. 순국 열사 동상
3.1.4.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3.1.5. 만해 한용운 시비
3.1.6. 이한응 선생비
3.2. 기타 시설
3.2.1. 장충정
3.2.2. 공원장충경로당
3.2.3. 장충단 기억의 공간
3.2.4. 게이트볼장
3.2.5. 다담에뜰
4. 교통
4.1. 지하철
-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 (도보 1분)
- 서울 지하철 3 · 6호선 약수역 10번 출구 (도보 12분)
- 서울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번 출구 (도보 13분)
4.2. 버스
- 서울 순환버스 02
- 서울 순환버스 04
- 서울 버스 144
- 서울 버스 301
- 서울 버스 420
- 서울 버스 N13
- 서울 버스 7212
- 서울 투어버스 01
5. 주변 정보
- 장충단공원의 서쪽에 동국대학교/서울캠퍼스가 있다.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장충단공원과 동국대학교를 연결하는 계단들이 있다.
6. 대중문화에서
-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두 번 등장했다. 1부 39화에서 그 유명한 우미관 패 5명 vs 혼마치 패 40명이 대결한 장소로 나왔다. 이 때 고노에(남일우 분)가 하야시(이창훈 분)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장충단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미소리(이상인 분)가 암수를 써서 5 vs 40 구도가 된 것을 안 하야시가 결투를 중단시켜 우미관 패의 승리로 끝난다. 물론 실제 장충단공원에서 촬영한 것은 아니고 서울 은평구의 어느 야산에서 찍었다.
그리고 2부 116화에서 조병옥(김학철 분), 유진산(이효정 분) 등이 시국강연회를 하는 곳으로 나왔다. 조병옥이 연사로 나설 때 화랑동지회 회원들이 집회를 방해하면서 강연회는 중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s-2 항목을 참조.
[1] 건설부고시 제 3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