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중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朴昇中
(? ~ ?)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자천(子千)으로 나주 무안현 출신이다.

2. 생애


과거에 급제하고 상안부녹사에 임명되며 곧 중서주서가 된다. 예종 때 한림시독학사에 오르고 이재, 박경작, 김황원, 최선, 이덕우 등과 함께 상정관으로 의례를 제정한다. 예종 2년(1107)에는 가거사인으로 요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온다. 윤관여진 정벌 때에는 예부낭중의 벼슬에 있었는데, 예종 4년(1109) 재상과 대간, 6부의 관료 총 30명이 모여 동북 9성의 반환을 논의한 자리에서 호부낭중 한상과 함께 단 둘이서 반환을 반대한다. 예종 6년(1111) 중서사인, 예종 9년(1114) 우간의대부에 임명된다. 예종 10년(1115)에는 평장사 조중장과 과거 시험을 주관했는데, 낙제자들이 합격자의 답안이 이전의 답안을 베낀 것이라고 참소하니 왕이 직접 복시를 보게 된다.
예종 11년(1116) 6월 국자좨주 한림학사 좌간의대부에 임명된다. 박승중은 다른 여러 학사들과 청연각에서 돌아가며 강론했는데, 10월에 청연각의 시신(侍臣)들을 비웃은 일이 왕에게 알려져 판장작감으로 좌천된다. 예종 12년(1117) 6월 한림학사 지예부사에 임명됨으로 복권된다. 예종 13년(1118) 장경을 두고 향을 피우는 자리에서 홍관, 이숙과 시신들의 서열을 적으며 웃고 떠들었는데, 이 소리가 왕의 처소까지 들려 대간의 탄핵을 받는다. 박승중은 이번에는 면직됐다가 이후 다시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된다. 예종 16년(1121) 윤5월에는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왕이 직접 궁전과 사찰을 돌아다니며 기우제를 지낸다. 박승중은 청연각에서 『서경』 「홍범편」[1]을 강론했는데, 이 날 큰 비가 내렸기에 박승중의 강론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박승중은 재상 허재, 시랑 최식과 마찬가지로 예종의 장인 이자겸의 파벌에 붙었다. 예종이 죽은 뒤에는 인종 원년(1123) 추밀원사에 오르는데, 당시 임명된 동지추밀원사 김인규와 추밀원부사 이자덕도 모두 이자겸 당파였다. 인종 2년(1124) 5월 이자겸이 모친상을 당하고 5개월째 집에서 나오지 않자 왕은 박승중을 보내 이자겸을 설득하게 한다. 이자겸은 표문을 서너번 올리며 계속 사양했는데, 박승중은 이자겸에게 잘 보일 심산으로 인종이 내린 조서와 이자겸이 올린 표문을 같이 사관에게 보내 이자겸의 덕을 드러낼 것을 제안한다.
그 외에도 이자겸을 조선국공으로 책봉하거나 왕태자의 예에 따라 부(府)를 세울 것 등을 제안한 사람이 박승중이다. 그 외에도 이자겸 조부의 추증에 교방의 음악을 내리거나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를 것 등을 제안하는데, 박승중과 함께 예종실록을 편찬했던 평장사 김부식이 반대하고 다른 평장사 김약온이 김부식의 뜻에 동의해 끝내 이루지는 못한다. 이자겸의 총애를 받은 박승중은 인종 2년 12월 검교사공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거쳐 이듬해 인종 3년(1125) 12월에는 김인규, 이자덕과 함께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또 다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르는 등 고속으로 승진한다.
인종 4년(1126) 4월 이자겸이 패망한 뒤에는 간관들의 논박 끝에 5월에 울진으로 유배된다. 박승중이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점과 글로 이름을 날렸던 점을 고려해 유배지는 박승중의 고향 무안현으로 재조정됐으며, 죽은 뒤 장례를 치르는 것이 허용됐다.

3. 가족관계


  • 본인: 박승중
    • 아들: 박심조
    • 아들: 박심도
    • 아들: 박심봉
    • 아들: 박심통
박승중의 증조부 박섬(朴暹)은 현종의 남행을 호종해 남행호종공신에 오른다.
장남 심조는 궁중에서 변고가 일어나자 변소를 통해 탈출해 오물이 묻은 채로 이자겸에게 달려가 상황을 알렸고, 동쪽 변방으로 종신 유배된다. 차남 심도는 박승중을 따라 유배지에서 죽는다.

[1] 하늘이 내리는 상벌에 관한 대목으로, 여기에서 다루는 구징(咎徵, 천재지변의 조짐)이 여러 재해와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