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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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산악인.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 / 산악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했다.
2. 어린 시절
그가 산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어릴 때 친구 집이 설악산에서 산나물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했는데 그 친구 따라 우연히 대청봉에 올랐다가 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설악산을 찾았다.
3. 산악인으로서 삶
그러다가 1980년 동국대 마나슬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하는 장면을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진학, 산악부에 들어갔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각종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2004년 세계 최단 기록으로 무보급 남극점 도달에 성공, 이듬해 북극점에 도달해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가 거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세계 최초 6개월간 최단등정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최다등정 (6개봉) 달성 (기네스북 등재)
- 아시아 최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93년 달성)
- 동계 랑탕 리룽 세계초등 (1989년 등정)
-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2004.1.12.)
- 북극점 도달 (2005.4.30.)
-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05.4.30.) (기네스북 등재)
- 단일팀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 성공 (2006.5.11.)
- 2007 중국 사천성 희조피크 세계초등
- 2009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새로운 등반길로) 등정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을 가장 중요시했다
4. 사망
2011년 10월 18일, 후배인 강기석(33)·신동민(37)과 같이 안나푸르나 새로운 등반길에 오르는 등반 중 연락이 두절됐다. 눈사태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되며, 수색대가 실종 예상지역을 수색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결국 행방불명으로 인한 인정사망 처리됐다. 향년 47세. 이에 따라 대한산악연맹은 10월 30일 위령제를 지냈다.[3]
KBS에서 당시 동행취재하여 출국[4] 부터 실종 상황까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박영석 대장, 안나푸르나 마지막 10일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로 방송됐다.
5. 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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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부에 있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부조의 제막식 사진. 이 부조는 박영석 대장이 살아있을 당시에 제작된 것이라,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도서관 개축 기념 겸해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실종사고 이후로는 동악인들의 성지 비슷한 곳이 되었다.
허영만과 매우 친해서 허영만 만화 식객이나 부자사전에서도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허영만과 친구들이 추진한 바다 여행을 그린 책자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2010)에서도 나왔는데 이 책에선 8천미터 산도 여러번 자유롭게 오고간 자신이 바다에서 배멀미하던 것에 기겁하던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허영만과 함께 한 힐링 캠핑 -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에도 일행의 한 명으로 나오며, 허영만 원작의 영화 타짜(영화)에도 허영만 본인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만큼 허영만과 형님아우하며 친하게 지냈기에 그의 실종 및 사망 보도에 허영만이 직접 실종 장소를 찾았고, 끝내 수색에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며 명복을 빌었다.
선배인 엄홍길도 명복을 빌면서 "산악인으로서 언젠가 맞이할 일이자 각오할 일[5] 이지만 어린 녀석이 먼저 가다니..."라고 회고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등산업계의 무리한 마케팅 경영이 죽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 속에서 인터뷰의 당사자로 나오는 박기성 산악평론클럽 대표는 기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모교인 동국대학교 산악부 홈페이지에 '기사로 심려를 끼쳐드린 사람이 동국산악회 선후배들께 사죄합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하였다.[6] 사과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본인은 히말라야 거벽등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현지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산악계 후배가 미디어오늘과 이번 참사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기에 동행을 했을 뿐인데, 정작 '''기사에서는 메인 인터뷰이였던 후배 산악인은 유령처럼 사라졌고 <미디어오늘> 기자는 "들은 대로 썼을 뿐"이라 하니 혼자서 덤터기를 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7] , 끝내 보여주지 않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기사의 내용 자체는 '''기업체와 언론의 이벤트 마케팅에 휘둘리는 산악계 현실에 대한 비판'''[8] 이지만, 과정은 상당히 부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 8월 박영석 대장의 차남인 박성민씨가 포함된 수색대가 안나푸르나로 출발하였으나,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
[1]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2] 빙하의 갈라진 틈을 크레바스라고 부르는데, 박영석은 이 크레바스에 떨어지기 직전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는 2개의 고리를 발견하고 그 중 하나에 자신의 로프를 연결하였다. 그 직후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운이 좋게도 연결한 고리가 고정된 고리였다.[3] 애초에 고산에서 실종되면 바로 사망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결과는 뻔했다.[4] 출국장에서 걱정에 눈물을 쏟는 아내에게 '울지 마라.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거냐'라며 짐짓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했던 말이 현실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장면.[5] 엄홍길 문서에 나와 있듯이 그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알 수 있다. 아예 한국을 나갈 때 유서를 쓰고 간다고 할 정도.[6] 자유게시판에서 글쓴이 박기성으로 검색하면 나온다.[7] 사실 기사가 나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는 요구를 하면 들어주는 기자는 거의없다. 인터뷰 후에 다시 유선상으로 팩트체크를 하면 모를까. 사전검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8] 이후 오은선과 고미영의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봉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오은선은 칸첸중가 미등정 논란으로 산악계에서 생매장당하고, 고미영씨는 추락사하자 해당 기사와 똑같은 내용의 비판이 산악계 내외부에서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