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법조인)
[1]
1948년생
2004년 2월 13일 ~ 2005년 1월 12일까지 참여정부 제2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노무현과는 고향인 경남 김해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같이 했고 문재인과는 사법연수원 동기 관계였다. '''노무현과 문재인을 평생 동지 관계로 엮어준 가교 역할'''을 했다.
1948년 경남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김해에서 정미소도 운영하는 등, 꽤 부자였던 집안 분위기는 전형적인 경상도 보수 성향이었다.[2]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정권은 바뀌면 안 된다’고 늘 말했다. 그 이유가 ‘있던 놈들은 처먹으면 배불러서 더는 못 먹는데, 바꿔놓으면 굶은 놈들은 더 달라든다’였다.
1965년 지역 명문 부산고에 입학했고, 1968년에 졸업했다. 1년 재수를 해서 1969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집안이 김해 장유사에 오래 전부터 봉양을 드렸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대학생 시절인 1971년 여름에 사법고시 공부 터를 장유사 암자인 장유암으로 정했다. 그런데 장유암에 가보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명은 노무현, 또 한 명은 정상문[3] 이었다.
두 살 위였던 노무현과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아,[4] 봉하마을에 가서 고기를 나눠 먹는 등 친분을 쌓았다.[5] 함께 고시 공부할 때부터 노무현은 “서로 잘 되면 도와주자”는 말을 했는데, 그 말 그대로 노무현과 평생 서로 의리를 지켰고, 인연을 이어갔다.
실제로 노무현은 고향 선배로서 일찍부터 그를 각별히 챙겼다. 1975년 사법시험에 먼저 합격한 노무현은 1978년 5월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돈을 많이 벌었다.[6] 박정규도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노무현은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한 고향 후배 박정규를 위해 연수생 생활을 마친 뒤 본인과 같이 일하자며 사무실에 방과 책상까지 준비해두었다.[7]
그러나 연수원 생활을 마친 박정규는 돌연 검사를 지망했다. 아버지가 검사에 목을 매는 분이셨기 때문.[8] 그러자 변호사 노무현이 바로 반응했다. ‘에이 X, 그럼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하고 가소!’” 그래서 박정규가 노무현에게 소개한 사람이 그때 마침 판사 임용에서 탈락한 문재인이었다. 바로 연락을 취해 ‘노무현 선배라는 사람이 인품도 괜찮고, 돈도 잘 버니까 부산에서 변호사 해라’ 권하자, 문재인은 의외로 선뜻 응했다.[9] 이것이 그 유명한 노무현과 문재인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한편 박정규는 1982년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1985년 춘천지검 검사, 1986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8년 광주지검 검사, 1989년 광주보호관찰소 소장, 1995년 대검찰청 공보담당관 등을 지내며 검찰에서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대검 공보관 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3개월간 매일 아침 김밥 수십개를 주문, 이를 직접 들고와 당시 한보사건 취재 중이던 출입기자와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등 따뜻하고도 자상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사시동기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활달한 화합형 성품에 두주불사의 술 실력으로 자연스럽게 동기들의 좌장 노릇을 하면서 후배검사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후 1997년 법무부 관찰과장, 1998년 법무부 조사과장 등 요직을 거친 뒤, 1999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 3부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나 2000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로 개업할 무렵 에세이집 `청소하다가...''를 발표하며 수준급의 문장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그가 김앤장에 있던 때인 2002년 12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무현과는 집안끼리 왕래할 정도로 워낙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부터 그가 청와대에 들어갈 것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지 1년 정도가 지난 2004년 2월,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 청와대 비서실 2기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문재인 민정수석의 후임으로 그를 기용했던 것.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정규에 대해 "검찰 업무에 정통하고 청렴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법조계에서 두루 신망이 높아 발탁하게 됐다"고 말했다.#[10] 민정수석으로 임명될 당시 “그동안 ‘청소’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청소할 부분이 많다”고 말해 남다른 각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민정수석에 임명된 지 정확히 한 달 만인 3월 12일 대통령 탄핵 사건이 터지는 날벼락을 맞았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권한정지 기간에 탄핵심판 사건의 주무 수석비서관을 맡아 매일 오후 10시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63일 만이었다.
그러나 2005년 1월 이기준 교육부총리 임명자의 부실 인사 파문[11] 에 책임을 지고 정찬용 인사수석과 함께 동반 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노무현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중요한 결정은 내가 다했기 때문에 참모들의 책임을 묻기가 참 난감하다”면서 “그러나 정무직은 정무적 책임이라는 것이 있는 만큼 해당 부서의 책임자인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의 사표 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12] 이후 더 이상 공직에 갈 기회는 없었다.
2009년 3월 23일에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어 자택에서 검찰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다. 민정수석으로 재직하던 2004년 12월 박연차에게서 사돈인 김정복 전 서울중부국세청장이 인사 검증을 받을 때 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상품권 1억 원 어치를 받았다는 혐의에 따른 것. 결국 2009년 4월 2일 검찰에 의해 구속기소되었고, 2010년 4월 29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감형이 되었고, 2011년 2월 18일 가석방되었다.
朴正圭1948년생
1. 개요
2004년 2월 13일 ~ 2005년 1월 12일까지 참여정부 제2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노무현과는 고향인 경남 김해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같이 했고 문재인과는 사법연수원 동기 관계였다. '''노무현과 문재인을 평생 동지 관계로 엮어준 가교 역할'''을 했다.
2. 생애
1948년 경남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김해에서 정미소도 운영하는 등, 꽤 부자였던 집안 분위기는 전형적인 경상도 보수 성향이었다.[2]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정권은 바뀌면 안 된다’고 늘 말했다. 그 이유가 ‘있던 놈들은 처먹으면 배불러서 더는 못 먹는데, 바꿔놓으면 굶은 놈들은 더 달라든다’였다.
1965년 지역 명문 부산고에 입학했고, 1968년에 졸업했다. 1년 재수를 해서 1969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의 집안이 김해 장유사에 오래 전부터 봉양을 드렸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대학생 시절인 1971년 여름에 사법고시 공부 터를 장유사 암자인 장유암으로 정했다. 그런데 장유암에 가보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명은 노무현, 또 한 명은 정상문[3] 이었다.
두 살 위였던 노무현과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아,[4] 봉하마을에 가서 고기를 나눠 먹는 등 친분을 쌓았다.[5] 함께 고시 공부할 때부터 노무현은 “서로 잘 되면 도와주자”는 말을 했는데, 그 말 그대로 노무현과 평생 서로 의리를 지켰고, 인연을 이어갔다.
실제로 노무현은 고향 선배로서 일찍부터 그를 각별히 챙겼다. 1975년 사법시험에 먼저 합격한 노무현은 1978년 5월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돈을 많이 벌었다.[6] 박정규도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노무현은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한 고향 후배 박정규를 위해 연수생 생활을 마친 뒤 본인과 같이 일하자며 사무실에 방과 책상까지 준비해두었다.[7]
그러나 연수원 생활을 마친 박정규는 돌연 검사를 지망했다. 아버지가 검사에 목을 매는 분이셨기 때문.[8] 그러자 변호사 노무현이 바로 반응했다. ‘에이 X, 그럼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하고 가소!’” 그래서 박정규가 노무현에게 소개한 사람이 그때 마침 판사 임용에서 탈락한 문재인이었다. 바로 연락을 취해 ‘노무현 선배라는 사람이 인품도 괜찮고, 돈도 잘 버니까 부산에서 변호사 해라’ 권하자, 문재인은 의외로 선뜻 응했다.[9] 이것이 그 유명한 노무현과 문재인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한편 박정규는 1982년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1985년 춘천지검 검사, 1986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8년 광주지검 검사, 1989년 광주보호관찰소 소장, 1995년 대검찰청 공보담당관 등을 지내며 검찰에서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대검 공보관 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3개월간 매일 아침 김밥 수십개를 주문, 이를 직접 들고와 당시 한보사건 취재 중이던 출입기자와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등 따뜻하고도 자상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다른 사시동기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활달한 화합형 성품에 두주불사의 술 실력으로 자연스럽게 동기들의 좌장 노릇을 하면서 후배검사들로부터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후 1997년 법무부 관찰과장, 1998년 법무부 조사과장 등 요직을 거친 뒤, 1999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 3부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나 2000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로 개업할 무렵 에세이집 `청소하다가...''를 발표하며 수준급의 문장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그가 김앤장에 있던 때인 2002년 12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무현과는 집안끼리 왕래할 정도로 워낙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부터 그가 청와대에 들어갈 것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지 1년 정도가 지난 2004년 2월,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이 청와대 비서실 2기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문재인 민정수석의 후임으로 그를 기용했던 것.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정규에 대해 "검찰 업무에 정통하고 청렴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법조계에서 두루 신망이 높아 발탁하게 됐다"고 말했다.#[10] 민정수석으로 임명될 당시 “그동안 ‘청소’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청소할 부분이 많다”고 말해 남다른 각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민정수석에 임명된 지 정확히 한 달 만인 3월 12일 대통령 탄핵 사건이 터지는 날벼락을 맞았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권한정지 기간에 탄핵심판 사건의 주무 수석비서관을 맡아 매일 오후 10시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63일 만이었다.
그러나 2005년 1월 이기준 교육부총리 임명자의 부실 인사 파문[11] 에 책임을 지고 정찬용 인사수석과 함께 동반 사퇴하고 말았다. 당시 노무현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중요한 결정은 내가 다했기 때문에 참모들의 책임을 묻기가 참 난감하다”면서 “그러나 정무직은 정무적 책임이라는 것이 있는 만큼 해당 부서의 책임자인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의 사표 수리를” 하겠다고 말했다.#[12] 이후 더 이상 공직에 갈 기회는 없었다.
2009년 3월 23일에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어 자택에서 검찰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다. 민정수석으로 재직하던 2004년 12월 박연차에게서 사돈인 김정복 전 서울중부국세청장이 인사 검증을 받을 때 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상품권 1억 원 어치를 받았다는 혐의에 따른 것. 결국 2009년 4월 2일 검찰에 의해 구속기소되었고, 2010년 4월 29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감형이 되었고, 2011년 2월 18일 가석방되었다.
3. 여담
- 대단한 애처가였는지 귀가시간이 언제나 일정했다고 한다. 언론을 상대하는 공보관 시절에도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면 밤 9시에 집으로 들어갔을 정도. 그전까지 점심에 폭탄주 10잔, 저녁에 10잔 이상을 기자들과 마시고 일어나면, 9시에 맞춰 검찰청 앞에 부인이 차를 세워놓고 기다렸다. 그와 정 2차를 하고 싶은 기자가 있으면 집으로 불렀다. 중수부장이 주재한 기자단과의 저녁자리에서도 9시가 되자, 아무 말 없이 퇴근한 ‘사건’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 2019년 1월 23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로 주목을 받았다. 이 인터뷰에서 “문재인이 대통령 노무현을 만들었다” “둘이 안 만났다면 문재인은 김앤장 변호사, 노무현은 갑부됐을 것” “조국 수석은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등의 발언을 했다.
[1] 한자 이름이 같은 검사 출신 변호사가 있다(1937년생. 고시 15회).[2] 당시만 해도 세상이 엉성해 박정규의 아버지는 부산과 김해에서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박정희를 찍고, 차 타고 부리나케 김해 가서 또 박정희를 찍었던 것.[3] 훗날 정상문은 청와대 비서실 총무비서관으로서 노 대통령 임기 처음부터 끝까지 보좌했다.[4] 처음에는 고졸인 노무현에 대해 내심 깔보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얘기를 나눠본 결과 말빨이 너무 좋아 노무현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규의 회고담에 따르면 “대화를 해보면 기가 막혔다. 아는 것을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다. 아는 것은 5개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1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5] 절에서는 아무래도 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말이 돌아오면 노무현을 따라 봉하마을에 있는 노건평의 집으로 가서 고기를 나눠 먹었다고 한다. 그때 노건평과도 친분을 쌓았다.[6] 그때만 해도 변호사 노무현은 돈에 무척 밝았다. 부산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영화 '변호인'에도 나왔듯이 한때 요트를 탈 정도로 돈이 많았다. 후일 박정규는 "노무현이 문재인을 만나지 않았으면 빌딩 몇 채는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7] 당시 노무현은 돈을 잘 벌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사무소의 모든 수입을 구성원들과 함께 n분의 1로 동등하게 나눴다. 대표 변호사인 노무현과 신입 변호사의 월급이 같았던 것. 즉 박정규가 입사만 하면 바로 꽤 큰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노무현은 “박 시보도 나랑 변호사 같이 하면 n분의 1로 주겠다. 오시라”고 권했다.[8] 판사도 안 된다고 하셨다.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였다고...[9] 당시만 해도 변호사는 금값이었다. 삼성에 입사하면 바로 임원이 될 정도였다. 그 무렵 문재인은 로펌 김앤장의 입사 제의도 받은 상태였다. 문재인은 대기업과 김앤장을 마다하고 부산의 변호사 노무현을 찾아간 것. 정작 김앤장은 나중에 박정규가 검사를 그만둔 뒤 입사했다.[10] 사실 그의 등용은 노 전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 강화 차원의 포석이었다. 고향 후배인 박 전 수석이 그 누구보다 대통령 집안 사정을 잘 알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11] 이기준은 서울대 총장 재임 당시 사외이사 관련 이중잣대, 재산형성 의혹, 아들의 이중국적과 병역기피 의혹에 이어 이중국적자인 아들이 외국인 신분으로 연세대에 정원외 특례입학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부총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인사시스템의 부실이 도마에 올랐다.#[12] 실제로 이기준의 부총리 임용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인사수석실 실무진들은 상부에 이기준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상세히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해찬 총리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주축으로 참여하는 청와대 인사추천회의에서는 민정수석실과 인사수석실의 지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