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영화)
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 2013년 12월 18일 개봉했다. 원래 개봉일은 2013년 12월 19일이었으나 2013년 12월 18일 전야 개봉으로 변경.
1980년대 부산에서 활동했던, 한 인권 변호사의 일대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1] 그가 변호했던 부림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여러 면으로 화제가 됐다.
제작자는 이 영화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명확히 밝힌 바 있다. 참조 또한 변호인의 시나리오를 쓴 윤현호 작가도, 영화의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 따온 것이라고 강연에서 밝힌 적이 있다.참조 단, 변호인 코멘터리 디스크에서 말한 내용에 따르면 정치적 논란이 일어날 만한 부분은 편집 과정에서 제외하였다고 한다.
2. 예고편
3. 시놉시스
4. 등장인물
다음 링크는 영화 속 등장 인물의 모티브가 된 당시 실제 인물들을 정리한 글이니 참고하면 좋다.
4.1. 변호사 측
송우석의 실제 모델인 노무현도 송우석처럼 고졸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대전지법에서 판사로 6개월간 재직 후 귀향하여 부동산 등기 전문 변호사와 세무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부림사건의 피해자 고호석 씨의 회상에 따르면, 실제로 변호사 노무현은 조세전문변호사로 승률이 아주 높고 돈을 갈퀴로 쓸어담는 이야기를 듣던 변호사였다. 노무현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세무업무에 꽤 도움이 되었다"고 자서전에 쓴 바 있다. 기초적인 회계학, 즉 부기의 지식이 없다면 아무리 법조문에 정통해도 세법관련 업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당시 변호사들 중에 이런 역량을 갖춘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부산상업고등학교는 당시 중학교에서 1, 2등 아니면 원서를 써 주지도 않을 정도로 지역 탑클래스 고등학교였기에, 설명만큼 빽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빽이 법조계에서 도움이 되지야 않겠지만... 그리고 당시 법조인 중 90%는 서울대 법대, 9%는 고려대 법대여서, 어찌보면 가방끈 짧은 것도 맞다. 경희대 법대 출신인 문재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가방끈이 짧은 셈이다. 노무현과 함께 일했던 장원덕 사무장의 인터뷰에 의하면 상고 선후배들이 사건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노무현의 형인 노건평은 부산지역의 세무사였고 사건을 물어다 주면서 상부상조도 했다고. 그리고 위 인터뷰에 의하면 등기를 은행에서 떼는데 당시 부산상고는 은행을 가거나 아니면 대학을 갔다. 즉 은행 가면 죄다 노무현 선후배들이라는 것. 실제로 이제는 끝물이기는 하지만 지역 은행에서는 당시 경남상업고등학교 함께 양대 파벌이라고 한다.
장원덕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 송변의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개업 초기 혼자 사무실을 운영했던 송변은 점점 일감이 많아지게 되자 선배 변호사를 통해 사무장을 수소문하게 되고, 소개로 찾아온 박동호를 채용하게 된다.[10] 송우석이 옛날에 신세를 졌던 국밥집 아지매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만날 국밥집에 가서 점심을 먹느라 이 사람도 지겹도록 돼지국밥만 먹게 된다. 처음에는 국밥이 맛있다고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지겨워서 다른 것 좀 먹자고 애원한다.
꽤 실력 좋은 사무장인지, 변호사들이 너도나도 부동산 등기업무에 뛰어들어 매출이 줄어들자 세무 관련으로 전문 분야를 돌리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인맥으로 많은 여러 건수를 물어온다. 송변의 부하직원이라기보다는 거의 동업자의 모습. 실제로 박동호가 더 나이가 많은지라 초반에는 "사무장님", "변호사님" 상호 존댓말을 하다가 친해진 다음에는 우석은 "형님"이라고 지칭하고 박동호는 "송변"이라고 하면서 말을 놓는다. 밑에 나오는 "오늘부로 송변 니는 니 편한 인생 니 발로 걷어 찬기라"가 대표적. 이 부분은 실존인물인 노무현이 탈권위적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작중 처음엔 진우 변호건에 대해 말리고 해동건설 건에 대해 계약하자고 주장하며 한때의 우석처럼 소시민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늘부로 송변 니는 니 편한 인생 니 발로 걷어 찬기라"는 대사에 압축된다. 이때 송우석이 우리 자식들은 억울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야지 않겠냐고 말하자 자신의 자식은 유학보낼거라면서 송우석을 끝까지 말렸다. 그러나 변해가는 우석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닿은 게 있었는지 공안이 탈세 혐의를 핑계로 마구 휘저어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을 묵묵히 지키고 비서에게도 "너도 울지 말고 같이 정리나 하자" 라고 말하며 일어나 움직인다. 현실론을 펼치며 말리면서도 막상 일이 터졌을 때 도망가지 않고 옆을 지켜주는 사람 위치. 에필로그에서도 방청석에 앉아있다. 박동호의 모티브가 된 장원덕 인터뷰.
송우석의 단골식당 주인.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정이 많고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선량한 소시민 아주머니다. 작중으로부터 7년 전, 송우석이 막노동 일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했을 때 이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도망가며 진우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후 현재 시점에서 빚을 갚게 되는데 "묵은 빚은 돈 몇 푼으로 빚 갚는 거 아니다, 마음과 발로 갚는 거다. 자주 오란 말이다!" 라고 송우석의 사례를 거절했다.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과 송병곤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 최순애의 아들로 작중 부산대 공과대학[11] 1학년생이다. 송우석이 학생 운동에 대해 고등학교 동창인 이윤택과 한바탕 싸운 뒤 "엄마가 저렇게 고생해서 너 공부 시키는데 너도 데모하면 천벌받는다"고 말하자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12] " 이라고 받아친다. 여성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운영했다. 수업 내용이나 참가한 여성들이 '누나한테 첫사랑 얘기 좀 해봐' 라며 박진우를 놀리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운영되던 여공들 대상 야학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차동영 일당이 야학을 습격하여 공안에게 납치되듯이 잡혀가 온갖 고문들을 당한다. 영화에서는 구타, 물고문은 기본이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라면 국물을 코와 입에 부어버리는 속칭 코렁탕 고문, 손발을 철봉에 묶어 온몸을 패는 '통닭구이' 고문까지 재현했다. 그 수위는 남영동1985와 맞먹을 정도. 처참한 고문을 당한 후 어머니가 구치소로 면회 갔을 때, 진우는 우석이 말을 걸자마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했으며 어머니를 알아보자마자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쓰러졌다. 실제로 임시완은 1주일 동안 고문 장면을 찍다가 얼굴의 실핏줄이 터져 한동안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하지만 적나라한 고문 장면이 거북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임시완은 당시 아이돌 활동과 고문 연기를 병행했는데, 덕분에 캐릭터 감정 잡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숙소 안에서는 진우의 우울한 감정을 유지하느라 방 안에서도 잘 안 나왔다는 카더라가 있다. 임시완의 고문 연기에 쏟아부은 노력은 현장토크쇼 TAXI에 출연한 광희의 증언을 통해 알수 있다. 그 시대의 청년들이 마주해야 했던 폭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실제는 저것보다 더 심했을 테니까. 박진우의 모티브가 된 송병곤의 글. 그 후 사건과 관련된 1차공판에서 진우는 판사의 고압적인 질문에 자술서를 본인이 썼다고 말하고 손도장조차 자신이 찍었다고 말하지만, 3차공판에서는 직접 증인석에 앉아 자신이 취조당할 때의 상황과 느낌을 이야기해 자백이 진실이 아님을 고백했다. 최종 공판이 끝난 후에는 3년형에서 2년후 가석방이라는 조건으로 감경된 처벌을 받았다. 6년 후엔 우석의 시위대 앞에서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있었고, 영화판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판에서는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부독련 사건의 변호인 중 한 명. 공안 검사 출신으로 법조계의 현실을 잘 알아서 '국보법 사건은 어차피 유죄로 끝날 테니 형량이나 줄이면 다행이다' 란 소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송우석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편. 하지만 송우석의 활동과 끝내 진실을 밝혀내는 걸 보고는 송우석이 옳았고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한다. 이후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송우석의 99명 변호인에도 이름을 올려 4번째로 호명된다.
4.2. 사법부 및 수사기관 측
피해자들 및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차동영과 가장 가까운 실존 인물은 당시 담당 검사이자 한나라당 중진으로 활동하였고 울산 남구의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최병국 前 의원 이라고 한다. 차동영이란 최병국과 당시 고문 경찰관을 복합적으로 표현해낸 인물로 보이며 곽도원은 인터뷰를 통해 당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과 그에 관련된 수기, 기사 그리고 사진 등을 꼼꼼히 보면서 배역을 연구했다고 밝혔다.
당시 담당검사 최병국 前 의원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로 차동영과 달리 무능한 모습만 강조 되었다. 재판 중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변론에 김일성 찬양이라고 이야기한 게 최병국 당시 검사라고 한다. 이 내용은 훗날 월간 '말'지에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당시 실제 재판에서 판사를 맡았던 사람은 변호사 서석구로서, 부림사건에서 1심재판에서 피고인 이호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가 진주지원으로 좌천당했다. 이 후 변호사를 개업했다. 또한 김영삼 정부 시절만 해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기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소유예 처분한 검찰을 비판하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중반부터 성향이 변했는지 현재는 5.18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반대하고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비판하는가 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원흉인 박근혜를 옹호하며 앞장서서 변호하고, 태극기 집회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극우 성향으로 전향하였다.
4.3. 그 외
송우석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부산신보 사회부 기자. 아지매 국밥집에서 송우석과 싸우는데, 정직한 기자들은 죄다 신문사에서 쫓겨난다고 울분을 토하면서도, 본인은 생계 때문에 정부의 보도지침에 입 닫고 직장에 앉아 있던 자기혐오가, 그 당시 파워 속물근성 및 아무것도 모르고 술 취해서 망언하던 송우석을 보고 폭발한 듯하다. 학생 운동을 두고 송우석과 갈등을 겪은 후 법원에서 학생들의 변호인으로 온 송우석에게 "니 돈 좀 버니까 심심했는가베?", "니 정치 할려고 그러나?" 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는 "아침부터 소주가 땡긴다"며 기사는 한 후배에게 떠넘기고 다른 후배 기자들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 그런데 정작 재판할 때는 방청석에 있던 걸 보면 마음을 바꿔 다시 온 듯하다. 송우석의 진심을 안 후에는 4차 공판 직전 계란 테러로 옷이 더러워진 송우석과 옷을 바꿔 입어주고, 이후 우석이 증인을 확보하자 우석의 부탁대로 외국 기자들을 끌어와서 참언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배우 이성민은 실제로는 부산, 경남 출신이 아닌
DVD 코멘터리에서 감독이 해당 인물은 김광일이 맞다고 인증하였다. 김광일은 판사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의 입맛에 반하는 판결을 하다 좌천된 뒤 사표를 내고 인권변호사로 활약한다. 먼저 정계에 입문하여 노무현을 김영삼에게 추천하여 정계입문 시킨 것이 바로 김광일이다. 3당 합당 직후에는 노무현과 함께 꼬마민주당에 남았으나 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할 당시 합류하지 않고 정주영이 만든 통일국민당으로 갔다. 이후 다시 김영삼 진영에 합류해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특히 탄핵 직후인 2004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는 노무현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신에 능한 야심가' 라며 엄청나게 깠다. # 2010년에 사망하였다.
- 미스 문 (차은재 扮)
- 윤성두 (심희섭 扮)
4.4. 특별 출연
하지만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차지한 정치인들은 말을 들어처먹을리 만무하고 그렇기에 힘으로서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고 말한다.[15] 그렇기에 적어도 국민 소득이 지금의 3배 이상 올라야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은 물러나라고 송우석을 설득하지만 끝내 송우석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돈과 권력밖에 모르는 졸부와는 확실히 다르고, 다른 사람에 비해 상당히 멀리 볼 줄 아는 감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인 입장인 사람이다. 부림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의(1981~82년경) 우리나라 1인당 GDP는 2천달러 대였다. 그게 3배가 된 때는 87~89년대 3저 호황기다. 해석에 따라선 이창준은 당시 독재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는 있으나 직접 저항하지는 못한 '침묵하는 다수'인 중산층들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작중 이창준 본인도 '부르주아 중산층'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다른 관점에선 극중 대사로 이 시기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인데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벌인 자들이 그대로 정권을 잡고 있으니 또다시 같은 비극이 생기는 것만큼은 피해야한다고 생각해 일단 현실을 감내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류수영은 송우석 역을 탐냈으나 너무 잘생긴 외모 때문에 배역에 어울리지 않았고, 이에 이창준 역할로 만족해야 했다. 류수영은 비록 짧은 출연이였지만 영화 변호인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았다.#
5. 결말
송우석은 사건을 조작한 진범인 차동영까지 증인으로 불러내 심문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친구이자 기자인 이윤택의 진실한 기사에도 불구하고 언론으로부터 '법정에서 난동을 부린 변호인' 으로 몰리며[16] 다른 변호사들로부터 '빨갱이 변호사 물러나라' 라는 비난과 계란 세례를 받게 된다. 게다가 공안의 감시까지 붙은 상황.
이에 송우석은 짜장면 배달부와 옷을 바꿔 입고 사무실을 탈출하게 되며, 고문실을 직접 목격했던 윤 중위를 성당에서 만나 증인이 되어달라 설득한다. 짜장면 배달부가 우석이 시키지도 않은 짜장면을 메모와 함께 사무실로 갖다주라고 했다는 걸 보면 정황상 휴가를 나온 윤 중위가 송우석에게 짜장면 주문을 매개로 접촉한 것.[17] 또한 선배 변호사인 김상필과 이윤택에게 부탁하여 외국 기자들을 모아달라고 한다. 이후 송우석은 마지막 공판일 아침에 판사를 찾아가 윤 중위를 증인으로 신청하며 '증인 신청 기각하면 기자들 불러놓고 양심 선언으로 기자회견 열 거구요. 거기 외신들도 온다고 하던데... 아 그리고 저는 옆에서 증인 신청을 기각했다는 게 이 재판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식으로 엄포를 놓아서 증인 신청을 받아낸다.
마지막 공판. 외국 기자들도 와서 함부로 재판을 끝낼 수 없는 상황에 윤 중위가 증인으로 등장해 모든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송우석의 열변이 이어지면서 모두들 승소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차동영이 나타나 검사에게 뭔가를 건네주고 검사는 윤 중위에게 "군인인데 여기 어떻게 나왔냐"고 물으면서 윤 중위는 사실 무단 군무이탈 그러니까 탈영병이라면서 이 증언은 그냥 탈영병이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한 거짓말이라면서 증언이 무효라고 말한다. 윤 중위는 "정식으로 휴가를 신청해서 나왔다"고 항의했지만, 이미 차동영의 술수로 헌병들이 법원까지 온 뒤였고, 판사는 증언 삭제+변호사 측의 증인 보호 요청 거부+이 법정은 일단 윤 중위 군사재판에 쓴 뒤 2시간 뒤에 다시 시작 콤보로 다 된 판을 뒤엎는다. 송우석은 재판장석까지 달려가 판사의 팔을 잡고 법봉을 못 치게 하지만[18] , 결국 경찰과 군인들이 들어와 송우석과 윤 중위 둘 다 끌려나간다. 송우석은 최순애의 국밥집에 찾아가 미안하다고 하지만, 최순애는 "변호사님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냐, 괜찮다"고 하며 박동호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김상필 일행이 '''2년 후에 석방하기로 했다'''[19] 고 전해준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송우석은 그 소식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손을 움직여 묵묵히 국밥을 먹는다.
시간이 흘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송우석과 김상필 등은 시민들과 함께 추모행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시민들을 선동한 혐의로 구속된다.[20] 이후 재판을 받게 되는데 송우석의 제1변호사를 자청한 김상필이 "변호인 인원이 많은 관계로 방청석에 앉게 되었으니 참석 변호인단을 호명해 달라" 라고 말하며 명단을 판사(송영창이 아닌 다른 판사)에게 제출한다. 판사는 "이게 다...?" 라며 놀라더니 이름을 쭉 읽어나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변호사란 직함을 생략하고 이름만 불러야 될 상황이 된다'''. 엄청나게 많은 변호사 숫자에 검사가 질겁하는 모습은 덤. 판사의 호명에 따라 각 변호사가 일어나서 대답하는 동안[21] 아내는 송우석을 바라보고 송우석 역시 뒤를 슬쩍 돌아보다가 판사석(과 관객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웃으면서 화면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이 사건을 위해 부산의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출석했다'''란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그 시간에도 변호사들이 다른 사건으로 법정출석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부산 변호사 전원이 그 한 사건을 위해 법정에 출석한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8월, 노무현은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문재인 당시 변호사가 석방을 이끌어내기 위한 변호인단 구성에 앞장서 부산지방변호사회에 등록된 전체 변호사가 100명가량에 불과하던 시절 무려 99명의 변호사가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 부산지역 변호사 이외에도 변호인으로 참석한 변호사가 두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서울지역의 인권변호사였던 박원순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 영화에서 박상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6. 평가
6.1. 평론가 평가
김영진 평론 허문영 평론 황진미 칼럼
7. 흥행
12월 19일 하루 개봉으로 23만명을 동원하여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는 물론 한국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7번방의 선물》 등의 동일기간 기록도 뛰어넘는 기록을 세웠다. # 12월 25일, 개봉 7일만에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화려한 특수효과가 쓰인 것도 아니고 비교적 가까운 시대를 다루고 있는 사극이라서 제작비가 75억원에 불과하기[22] 때문에 이미 12월 25일까지의 흥행으로 손익분기를 넘었다고 한다.
12월 22일, 개봉 5일만에 관객 수 175만을 돌파하면서 송강호는 《설국열차》, 《관상》이 각각 900만을 모은 것과 합쳐서 '''한 해 동안 2천만의 관객'''을 모은 전인미답의 흥행 기록을 달성했다.[23]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설국열차》가 7월 31일, 《관상》이 9월 11일 개봉이므로 기간으로 따지면 단 6개월 만에 3천만 관객을 동원한 셈이 된다.
12월 23일에 200만 관객, 12월 25일에 300만 관객, 12월 28일에 400만 관객, 12월 30일에 500만 관객, 2014년 1월 1일에 600만 관객, 1월 4일에 700만 관객, 1월 6일에 800만 관객, 그리고 1월 12일 개봉 25일만에 900만 관객을 넘어서면서 '''2013년 송강호가 주연으로 나온 3개의 영화가 모두 900만을 돌파했다'''. 이는 《7번방의 선물》, 《광해, 왕이 된 남자》, 《아바타》보다 빠른 속도이다. 1월 13일, 937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앞서 송강호 주연의 두 작품의 기록을 깨뜨리고 여기에 송강호 주연 최다관객 영화 2위에 등극했다.
마침내 1월 18일, 아바타보다 1주일 빠르게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로선 9번째, 외화까지 포함하면 10번째 천만 클럽 달성.
영화의 흥행으로 송강호는 '''한 해에 약 3천만 관객'''을 모은 최초의 기록과 더불어 배급사인 N.E.W는 2013년 한해에만 투자와 배급, 제작에 나선 《7번방의 선물》(1281만), 《감시자들》(550만), 《몽타주》(209만), 《신세계》(468만), 《숨바꼭질》(560만)과 이 영화 흥행(2013년에 거둔 것만 합친 568만까지)을 합쳐서 '''한국 영화 6편만으로 무려 3,500만 관객'''이 넘는 대박을 벌어들여 다른 경쟁사인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 엔터테인먼트를 제쳤다. 또한 이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넘기면서 '''N.E.W에서 배급한 2013년 개봉 한국 영화 6편으로만 4,000만 관객 기록'''까지 세우게 되었다.
2월 1일에는 1,100만 관객을 넘어섰고 2일에는 1,111만 관객을 넘기면서 《실미도》를 제치고 역대 영화 흥행 9위(한국영화 8위)에 올랐다. 3월 들어 IPTV로 유료 상영을 시작하면서 최종적으로 1,136만 4천여 명을 기록했다.
미주 지역에도 2월 7일 개봉했다. 출처. 다만 현지인에게 크게 통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디워》를 제외하면 미주 지역에서 개봉되는 대부분의 한국 영화는 '''리미티드''' 방식으로 배급되게 된다. 사실 비단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미국에선 어지간한 해외 영화는 리미티드 개봉이다. 심지어 영국 영화나 옆나라 캐나다 영화조차도 어지간한 대작이 아니라면 리미티드로 걸리기 일쑤.
일본에선 송강호와 임시완이 출연했음에도 2년 넘게 개봉을 하지 않았으나...[24] 2016년 7월에 선행공개되었다. 선행공개 때는 일본의 진보적인 변호사로 유명한 우츠노미야 겐지 씨의 토크가 있었으며, 이후 11월 12일에는 정식 개봉시에는 송강호가 무대 인사를 오기도 했었다.[25]
- 일본판 성우
중화권에선 홍콩, 대만에만 나왔다. 대만에선 정의변호인(正義辯護人) 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홍콩에선 권력에 저항하는 변호사라는 의미에 '역권대장'(逆權大狀) 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나중에 택시운전사와 1987도 각각 권력에 저항하는 운전사 라는 의미의 '역권사기'(逆權司機)와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 이라는 의미의 '역권공민'(逆權公民)으로 나와 함께 역권 시리즈를 이루게 되었다. 홍콩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래저래 많이 보고 평도 나쁘지 않은듯. 중국은 정식으로 상영하지 않았지만 어째 몰래몰래 많이들 봤는지 도우반과 엠타임에 리뷰를 쓴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하는데 평점이 각각 9.2, 8.3으로 꽤나 높다.
8. 명대사
박진우: "데모하는 게 천벌 받으면은 데모하게 만든 사람들은 무슨 벌 받습니까?"
송우석: "데모를 해가, 바뀔 세상이면은, 내가 열두번도 더 바꿨어. 세상이 그리 말랑말랑 한 줄 알아? 계란 아무리 던져 봐라 바위가 뿌사지나."
박진우: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살은 기라꼬, 바위는 뿌사지가 모래가 돼도 계란은 깨어나서 그 바위를 넘는다, 그카는 얘기는 모릅니까?"[26]
"이런 게 어딨어요? 이라믄 안되는 거잖아요? 할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다."
"무죄면 무죄 판결 받아 내야죠. 그게 내 일입니다."
"시중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이 책들은, 서울대에서 권장도서 추천도 했습니다. 이 책들이 불온서적이면은! 대한민국 최고대학이라 카는 데도 불온단체라 이 말입니까?! 판사님, 검사님. 거 불온단체 출신이신데, 이 우찌된겁니까?"
"저도 얼마 전에 깨달았습니다만은… 국민이 못산다고 법의 보호도 민주주의도 못 누린다는 건 동의하지 못하겠네요."
"무함마드 알리하고 조지 포먼하고 권투시합 하는데 내가 알리 응원했어요. 이거 국보법 위반입니까, 아닙니까? 증인, 증인이 우기는 국보법대로라면, 김일성이가 알리 응원했다고 증인이 우기면 나 국보법상 이적행위로 잡혀들어가요?"
송우석: "국가? 증인이 말하는 국가란 대체 뭡니까?"
차동영: "변호사라는 사람이 국가가 뭔지도 몰라!"
송우석: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그런데 증인이야말로! 그 국가를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국가 보안 문제라고! 탄압하고 짓밟았잖소! 증인이 말하는 국가란! 이 나라 정권을 강제로 찬탈한, 일부 군인들, 그 사람들 아니야?!"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애국자가 아이고, 죄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인일 뿐이야! 진실을 얘기해라! 그게 진짜 애국이야!"
"이렇게 할 거면 재판은 왜 합니까?! 이 나라 법치주의는 어디로 갔습니까?! 이 따위 짓거리가 무슨 재판입니까?! 야 이놈들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진실이 그리 무섭냐?!"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옹호할 아무런 법률적 방법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 법조인이 맨앞에 서야지요. 그게 진짜 법조인의 의무지요."
9. 미디어 믹스
3월 12일에는 OST가 발매되었다.
2014년 4월 18일 소설판이 발매되었다. 전자책으로도 구입 가능하며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몇몇 장면이 나오며 몇몇은 영화와는 살짝 다르게 나온다. 가장 압권인 부분은 주인공 송우석의 장인이 빨갱이였다며 보수신문이 폭로하는 장면인데, 실제 영화로도 찍었던 장면이었지만 정치적 논란을 우려한 제작자에 의해 삭제되었다. 삭제된 장면들은 변호인 블루레이판에서 확인가능하다.
2014년 2월 26일 다운로드 서비스와 VOD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2014년 7월 30일 초회 한정판 DVD가 발매 되었으며 2014년 8월 20일 일반판 DVD가 발매 되었다. 그리고 2014년 9월 24일 한정판 블루레이와 일반판 블루레이가 동시 출시되었다. 한정판 블루레이는 출시 이전부터 예약을 받았으며 출시 이후부터 유통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DVD 판과는 달리 삭제 장면 등 없던 스페셜 피처가 추가된 것이 특징.
10. 영화 내 사건 및 인물들의 이야기
-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부산의 학림사건이라 불리는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1981년 발생한 공안 사건인데 사회과학 독서모임 회원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하여 고문한 뒤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의 공안 책임자는 뒤에 국회의원 3선을 지낸 최병국[27] 이었고 무료 변론을 맡았던 측이 노무현과 김광일,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28] 였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엔 정치적으로는 용공사건이란 얘기가 나왔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남아있다가 2009년에서야 무죄가 선고됐다. 다만 국보법에 대해서는 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판단하지 못했고 집시법과 계엄법 등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관련 기사.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해서는 다음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련 항목. 2014년 2월 12일, 부산지방법원은 부림사건의 재심에서 국보법 위반을 포함한 모든 혐의에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 2014년 9월 25일 대법원에서 부림사건 관련자들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로 최종판결하였다.
- 당시 부산지검에서 공안 검사로 일하며 해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었던 고영주[29] 변호사는 부림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영화의 내용 중 일부가 과장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대한민국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하고 국가를 부정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링크. 여기에 대한 반론 기사 링크.
-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19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사망 사건' 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시작된 시기였다. 그러던 중 8월 거제군에서 대우조선소 노동자 이석규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진상조사 요청을 받고 거제로 파견되었다. 노동자와 유족들을 도와 사태 수습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노무현은 '장례식 방해' 와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고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23일간의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부산변호사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고 공동변호인단을 꾸린다. 그 후 변호인단은 노무현에 대한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하게 되는데 당시 노무현의 변호인으로 참여한 변호사의 수는 무려 99명에 달했고 그 중 부산 지역 변호사만 91명이었다. 99인 중 타 지역 변호사는 8명이었는데 이 8명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변호사 조영래와 박원순이다. 이는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변호인단 규모였다. 이 마지막 장면은 변호사 김광일의 평전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김광일이 재판부에 출석한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요청하고, 그 요청에 따라 99명의 변호인이 한명 한명 일어나 응답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 순간 김광일이 변호인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요구했다.
"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많고 방청석에도 다수가 앉아 있어 변호인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재판장께서 직접 변호인을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여 주십시오."
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선임되었을 뿐 아니라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노무현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직접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재판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재판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원로 변호사들까지 포함한 그 많은 변호사들이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나도 출석했소" 하고 한 명 한 명 일어날 때의 감동과 그런 상황을 연출해낸 김광일의 순간적인 판단력은 그 후 오랫동안 변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 143~144 페이지
-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부림사건에서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고 주변호인단도 아니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부림사건의 피해자들 전원이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당시 판사였던 서석구 변호사도 본인의 블로그에 쓴 글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 중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또한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앞선 주장은 부림사건 당시 검사로서 사건을 맡았던 고영주 변호사의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영주 변호사는 명백한 고문의 증거가 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가해진 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가 대법원이 부림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한 최종판결로 인해 반박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는 근거가 희박하다.
- 문재인 당시 변호사는 1982년에 12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여 1982년에 노무현 당시 변호사와 합류하였으므로 부림사건과 연관이 없다. 다만 마지막에 99인의 변호인이 호명되는 장면에서 문재인 변호사와 닮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실제로 99인의 변호인 중 문재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한 듯하다. 더하자면 그래도 평생의 파트너인 문재인 변호사를 아예 없애기는 아쉬웠던지 영화 중 사무실 비서의 성이 문 씨이다.[31] 문재인 변호사가 노무현 변호사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음을 감안한 설정인 듯하다. 그리고 윗 문단에서 설명하였듯이 99인 변호사 중 호명된 박상순의 모티브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라고 한다. #
- 작가 윤원호의 후일담에 따르면 원래 시나리오에는 문재인 등장 신이 있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실화의 색채를 빼면서 문재인 등장 신도 삭제한 모양. 정우성이 영화출연에 탐을 냈었기 때문에 정우성이 등장하기에 좋은 이 부분이 삭제된 것에 대해서 아쉽다는 반응도 많다.
-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보다 시기상으로 앞서 일어났던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이었던 학림 사건이 재심 결과 무죄로 결론이 나면서 판사를 맡았던 사람들이 2012년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다들 알 만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2심의 배석 판사를 맡았었기 때문에 2012년 대법원 재심 판결 이후 민주당에서 사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 아우성으로 유명한 구성애의 남편인 송세경이 부림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성애의 인터뷰에 따르면, 부부가 함께 펑펑 울면서 관람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이 여기도 저기도 맞았겠지 하는 마음에 내내 울면서 온 몸 곳곳에 뽀뽀를 해 주었다고. 지금은 성교육 강사로 알려져 있지만, 젊은 시절 구성애 씨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사회운동가였다.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관련된 성범죄 등 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성교육 분야로 관심이 바뀌게 된 계기이다.
- 배우 송강호와 배역의 모티브가 된 노무현 대통령은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이라 고향이 같다. 때문에 송강호는 《밀양》 이후 오랜만에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 속 모자(母子)로 등장하는 김영애와 임시완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산 출신이다. 학교도 둘 다 부산에서 나왔다. 김영애는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임시완은 부산대학교 기계공학과 중퇴.
-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인 주한영국대사관에서 역사학자 E.H.카에 관한 소개와 그의 저작인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추천을 담은 문서를 발급 받은 일, 변론에서 '서울대학교 추천 도서가 이적 표현물이면 서울대도 빨갱이인가' 라고 말한 것이나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경기 비유[32] 를 통해 검사의 주장을 논박한 일 등은 당시 부산 학림사건 공판에서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카는 소련 주재 영국대사로 갔다'는 대사는 사실을 각색한 부분이다. 실제로 카의 외교관 경력에서 소련 근무는 없다. 리가의 주 라트비아 영국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적은 있지만 이 당시의 라트비아는 소련의 구성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가 이후 영국-소련 간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소비에트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는 점에서, 소련에 살았던 영국 공산주의자로 포장한 듯. 그리고 소련 붕괴 전인 당시 한국에서 라트비아라는 나라가 존재했던 걸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역사가 무엇인가>는 서슬 퍼런 10월 유신 체제 시절에도 금서로 지정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조지 오웰이 카를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것 같다'라는 주장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지 오웰 본인부터가 골수 사회주의자인 점은 차치해도, 이는 뒷사정이 더 복잡한 이야기이다. 조지 오웰 문서와 에드워드 카 문서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가 옥살이한 당시 대학생(경희대학교)이었던 50대 남성이 32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 2014년 11월 25일, 서울북부지법 형사5 단독 변민선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던 김모 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당시 1982년에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던 김모 씨(53)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사', '사회사상사' 등을 읽었다는 이유로 고문당하였으며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활동을 했다"고 강압에 의한 자백을 하였다. 판사는 판결과 동시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사법부가 가혹행위를 눈감고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피고인에게 사죄하였다.#
- 영화에 나오는 요트 에피소드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노 변호사는 영화에 나온 것 처럼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트를 타면서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냥 나가 볼까 하는 레벨이 아닌 진짜 올림픽을 목표로(!) 일본까지 가서 강습을 받기도 했었다.[33] 공교롭게도 이 요트가 훗날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노무현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1991년, 조선일보의 '노무현 의원은 호화 요트를 소유한 상당한 재산가'라는 내용의 보도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이에 대해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조선일보는 자매지인 주간조선을 통해 계속해서 악성 루머를 인용한 기사를 썼다. 이에 노무현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및 사죄광고 청구에 관한 민사소송을 걸었고, 1심에서 '명예훼손이 명백하다'며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무현이 소유했던 요트는 80년대 당시 가격으로 120만원 정도 하던 소형 요트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대 포니2 자동차의 출시 당시 가격이 약 350만원 하던 시기였다. 1심 판결 이후 조선일보 사장과 해당 보도를 한 담당 기자가 사과를 했고 소송은 취하되었지만 이후 조선일보의 공식 정정보도나 사과보도는 없었다. 이것을 반영한 듯 영화 속에서도 송우석을 찾아온 김상필이 요트를 보면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호화요트 장만했다고 소문이 났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 노무현이 사법시험 합격 전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 막노동을 하던 도중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망갔던 일과 나중에 성공하고 식당에 돈을 돌려주러 찾아갔던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물론, 메뉴가 돼지국밥이었다거나 그 집 아들이 부림사건에 얽혀서 고문 받으러 끌려가거나 한 일은 없었지만, 영화에 도입된 설정은 엄연히 실화에서 차용한 에피소드이다. 노무현 회고록 등을 보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있다.
- 배경이 1980년대이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전두환이 묘사된다. 땡전뉴스라든가, 관공서 사무실에 부착된 사진이라든가, 송우석이 "불법적인 일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따지자 함께 변호를 하던 박병호가 "법대로 하자면 대통령부터 반란 수괴죄로 잡혀가야 된다" 라고 답하는 내용이 나오는 등 여러 부분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동영이 경감으로 임명되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전두환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리고 차동영이 경감으로 임명되어 보안사와 술을 먹을 때 "부산에서 광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보안사 대령의 언급도 나온다.
- 당시 담당검사였던 고영주는 군사정부 이후에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방송문화 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등, 중용되고 있으며, 2015년 국정감사에서 노무현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었다. 기사
- 영화 내에서 송우석(송강호 분)이 "헌법 제26조 4항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라고 얘기하는데, 해당 부분은 영화 개봉 당시 현행 헌법에서는 제27조 4항이었다. 그러나 영화 내 배경이 되는 1981년 당시는 1987년의 9차 개헌이 있기 전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이며, 이때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한 조항은 제26조 4항이 맞았다. 즉 고증오류가 아닌 셈.
- 작중 송우석이 바닷가 아파트인 남천 삼익비치에 이사를 오는데 그 아파트가 고시생 시절 막노동을 하면서 일했던 아파트로 '절대 포기하지 말자'라는 글을 써 놓은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로 노무현은 이 아파트에 거주했었다. 물론 노무현 본인이 삼익비치 아파트에서 노동일을 했다거나, 웃돈을 주고 구입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창작한 내용이다. 고시생 시절 막노동을 한 사실은 맞지만 부산이 아니라 울산이었다.
- 이 영화의 핵심 인물인 박진우는 당시 실제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훗날 당시 부림사건 피고인들에게 노무현이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고 한다.
- 몇몇 언론에 변호인의 주인공 진우의 모티브가 이호철 전 민정수석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완전한 오보이다. 이호철은 부림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이었을뿐 진우의 실제인물이 아니다. 진우의 모티브는 부림사건 피해자인 고호석과 송병곤의 일화를 합쳐 만든 것이다. 고호석은 변호인의 감독이 직접 전화하여 수감 당시의 수인번호를 물어보기도 하였다.[34]
11. 이모저모
- 감독 양우석(이번이 첫 장편 영화 연출이다)에 따르면 초안은 웹툰으로 기획됐다고 한다. 양우석은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됐던 웹툰 <스틸레인>의 스토리작가였다. 차기작으로 스틸레인의 실사 영화인 강철비를 감독으로서 연출하였다.
- 2013년 11월 29일 첫 언론 시사회를 가졌고, 2013년 11월 30일 제주특별자치도를 시작으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전주시, 천안시, 대전광역시, 춘천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수원시, 김포시까지 진행되는 국토대장정 시사회를 가졌다.
- 시사회 후 박찬욱 감독이 울다가 부은 얼굴로 영화를 추천하는 인터뷰를 했다. 영상 보기. 영상에 김지운, 봉준호 감독의 추천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 제작자는 아래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뜨는 엔딩 크레딧 끝부분에서는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 감독은 물론이고 이창동 감독과 김옥빈의 이름도 볼 수 있다.
- 개봉 전 상황으로 봐선 영화적 완성도와 상관 없는 이유로 영화의 가치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소재가 소재인만큼 정식 개봉하기도 전에 누리꾼들 사이에서 진영논리가 팽배하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진영논리의 싸움은 개봉 후에도 이어졌다. 다만 시사회와 개봉 후의 관객 반응과 영화 평론가의 비평에서는 진영논리를 제외하고도 대체로 호평이었다. 물론 모티브가 모티브인 만큼 감정적 서술이 자주 보이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진영 논리는 훗날 국제시장과 연평해전에서 좌우만 바뀌어 비슷하게 벌어졌다. 어찌되었든 결국엔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보여준 사례. 다만 국제시장과 연평해전은 그런 점을 배제해도 평가는 이 영화에 비해 다소 낮은 편이었고, 이후 다른 문제도 터지게 되었다.
-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보니 송강호가 처음에 거절했다고 알려졌는데 송강호 본인은 "그런 영화 외적인 부담감보다는 순전히 내가 그 분의 삶을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김영애는 정치적 외압을 우려해 출연을 망설였다고.
- 위와 같은 이유로 투자가의 유치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나 송강호의 출연이 결정된 이후 투자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편 송우석의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설정되어 몇몇 30대 배우에게 시나리오가 전달되었으나 대부분 난색을 표했고,[35][36] 송강호도 장고 끝에 수락을 결정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선일보 인터넷판인 조선닷컴에서 송강호가 설국열차, 관상을 찍고 또 《변호인》을 찍는다며 "급전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시사회 당시 이에 대한 질문에 송강호는 "급전은 항상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영화가 영화인만큼 논란이나 화제의 영화에 대해서 언급될 때마다 들끓는 평론가 이동진의 블로그 댓글란이 또 난리가 났다. # 이에 대해서 이번에는 이동진은 평소의 부드러운 문체에 비해서 날이 선 답글을 다시 올렸다. 이동진이 영화에 대한 장점과 아쉬운 점들을 들어 정치성과 거리를 두고 평을 적었음에도 정치성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 없다는 뉘앙스의 댓글을 단 누리꾼들 탓. 사실 모티브가 된 인물이 인물이다 보니 리뷰 중에서도 그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소견을 밝힌 리뷰가 많긴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영화 리뷰인데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공격하는 게 옳은 것은 결코 아니다. 몰지각한 이들이 몰려와 댓글 테러를 가하는 바람에 이례적으로 답글을 쓴 것이다.
- 양우석 감독은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서도 균형을 맞추었다. 학생들이 고문 당하고 마지막으로 말을 맞추는 장면에서 임진우 앞에 친구가 "우리가 서울에서 김씨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에 벚꽃을 보면서 예쁘다고 했잖아"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며 임진우는 멍한 표정을 짓는데, 거짓말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기가 차서일 수도 있고, 어떻게 저렇게 사실처럼 술술 말할 수 있는가라면서 놀라서일 수도 있다. '서울 사는 김씨'는 당시 주사파의 지도자격이었던 김현장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김씨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이라는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벚꽃을 보고 예쁘다고 했다'는 학생들 사이의 진실이 교묘하게 섞이면서 거짓을 지어내고 그것을 실제와 연결시키는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장면을 연출한 의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벚꽃이 피는 시기는 3월 말에서 4월 초이고, 지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개화 후 2주일 후인데 작중 임진우의 친구가 말하는 5월 16일 대전역에서 본 벚꽃이 아름다웠다는 것은 일반적인 벚꽃의 개화시기와는 크게 어긋난다. 즉 이는 고문에 의한 잘못된 자백이 나오는 상태임을 암시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 본 영화의 표를 대량 구매했다가 막판에 대거 환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것도 관객수가 많은 주말을 노려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주말 객점율이 평일 객점률보다 낮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점 테러와 엮여서 고의적인 영업 방해일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배급사 측은 전 극장을 확인했는데도 확인된 바가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 1,000만 관객을 넘자, 공짜표가 남발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몇몇 기업에서는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할 목적으로 배급사와의 협의를 통해 《괴물》 등의 한국 영화나 외국 영화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사를 홍보하는 방식을 홍보수단의 일종으로써 행하고 있다.[37] 따라서 이는 각 기업들의 홍보 수단으로 해당 영화를 상영했을 뿐이며 배급사와 협의를 통하여 관람객 수를 통보하여 업체에서 돈을 주기 때문에 공짜표를 뿌린다는 주장은 엉터리 주장이다. 변호인의 배급사인 NEW는 이러한 공짜표에 대해 배급사와 관계 없는 행위라는 발표를 하였다.
- 부산광역시가 배경이기 때문에 당시를 보낸 현 4, 50대 이상의 부산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장소가 많이 나온다. 촬영 자체도 송도 근처의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이뤄졌다. 현재도 촬영했던 장소가 남아 있다고.
- 부산이 배경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부분이 대전에서 촬영되었다. 송변호사가 계란을 맞는 법원 외부장면과 법원 안에서 기자친구와 만나는 장면은 대전 중구에 있는 옛 충남도청사에서 촬영되었다. 그리고 김 변호사집 앞에서의 장면과 사건을 맡겠다고 하는 장면 등은 대전 동구 정동일대에서 촬영되었다. 이들 지역은 대전에선 구도심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개발에서 소외되어 옛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http://daejeonstory.com/5589
- 돈 들일 필요가 없는 영화이긴 했지만 송우석이 변호사일 때의 재판정과 송우석이 피고인인 재판정을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한 것에 대해선 지나치게 무성의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하다못해 내부 인테리어 만이라도 약간 변화를 주는 것이 좋았을 텐데, 마이크 위치까지 동일하다.
- 영화의 소재 중 하나로 돼지국밥이 등장하는데, 정작 송우석 역을 맡은 송강호는 체질상 고기가 신체에 맞질 않는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생선이나 채소류를 즐긴다고 한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은 돼지국밥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고, 삼계탕을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내에서도 송우석이 돼지국밥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돼지국밥 자체를 먹는 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송강호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부분 중 하나. 자세히 보면 딱 한 번 먹는 장면이 나온다.[38]
- 미국, 캐나다[39] 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한때 개봉이 불투명해졌단 소식이 들려왔지만 배급사인 NEW 측이 공식 트위터를 통해 2월 7일 개봉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웰고 홈페이지에 영화 정보 및 개봉 극장 목록이 올라왔다. 캐나다 지역에서는 벤쿠버와 토론토 지역에서 개봉될 예정으로 보인다.
- 흥행 대진운이 매우 좋은 편인데 변호인에 1주 앞서 개봉해 흥행을 위협할 수 있던 대작이던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가 부율 문제로 서울 소재의 CGV와 롯데시네마에서 상영하지 않게 되었고 《변호인》보다 1주일 후에 개봉했던 《용의자》는 평타 정도의 작품이었다. 흥행 페이스가 결정되는 초반에 이렇다 할 대작을 만나지 않은 것은 정말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그 이후 작품은 2014년 1월 16일에 개봉하는 《겨울왕국》 정도였다. 결국 《겨울왕국》에게 1위를 내주었지만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 천만 관객 돌파를 기념하여 본편 공개 4분 영상이 공개되었다. 출연 배우들의 감사 인사 뒤에 본편을 볼 수 있다.
- 미주지역에서는 와이드 릴리스가 아니라 한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한 리미티드 개봉이지만 미국의 양대 권위지라고 할 수 있는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모두 이례적으로 리뷰 기사를 게재하였다. 뉴욕 타임즈평, 워싱턴 포스트평.
- 표본은 적으나 로튼 토마토에서는 73%(평점 7.5, 표본 11), 메타크리틱에서는 55점(표본 7)을 기록하였다. 로튼토마토에서는 관객 점수 86%, IMDB에서는 7.8점을 획득하였다.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청룡영화제 작품상, 맥스무비 2014 최고영화상 등의 작품상 수상을 휩쓸고, 각종 영화제의 각본상 및 주연상, 조연상을 휩쓸어 나름대로 잘 만든 수작으로 분류된다.
- 이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넘기자 현대사 실존 정치인을 다룬 영화들이 여럿 기획되고 있으나 그 중에선 반대의 정치 이념적인 망상으로 홍보되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육영수를 그려낼 <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 # 같은 경우엔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과 같이 투자 설명회가 있었으나 각본이나 여러모로 비아냥을 듣으며 투자가 뚝 끊겼다. 그러다가 이 영화 대박으로 해당 업체에서 다시 영화를 기획하고 있으나 역시나 평이 무척 안 좋아서 별다른 제작 투자 소식이 없다. 더불어 서세원은 '노무현 영화도 대박을 거둬들였으니 이제 내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직접 감독하여 전국 3,000만 관객이 당연히 와야 한다'느니, '하나님 뜻으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온갖 종교적, 정치, 이념 편향적 헛소리를 지껄여 비웃음을 들었고 보수 언론들에게도 좋은 반응이 없다. 서세원 항목 참고할 것.
- 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는 점에서 존 포드 감독, 헨리 폰다 주연의 《젊은 날의 링컨》과 비교되기도 했다. 듀나의 젊은 날의 링컨 언급, 평론가 허문영의 글.
-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에 참여한 인원들은 "한국이 거친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배웠다"면서 이 영화를 예로 들었다. # 참고로 홍콩에서는 역권대장(逆權大狀)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역권은 권력에 저항한다는 뜻이고, 대장은 법정전문 변호사(Barrister)를 의미[40] 한다. 참고로 택시운전사는 권력에 저항하는 운전사라는 뜻의 역권사기(逆權司機)로, 1987은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이라는 뜻인 역권공민(逆權公民)이라는 부제가 붙어 개봉되었다.
- 2018년 초, 예술계에서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면서 우연의 일치지만 이 영화도 씁쓸하게 재조명받았다. 주요 배역을 맡은 오달수, 조민기가 모두 연루되었기 때문. 게다가 조민기는 자살하는 결과로 이어져서 씁쓸한 결말이 되었다. 다만 오달수는 무혐의로 결정났다.
11.1. 후폭풍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밝혀진 바로는 CJ E&M의 창립자인 이미경 부회장 퇴임이 본 영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CJ가 배급하지는 않았지만, CJ창업투자라는 자회사가 투자하였다. 결국 CJ창업투자는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로 사명을 변경했다.[41] 개봉-흥행 시기와 청와대의 압박이 공교롭게 교차한다는 것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부회장의 갑작스런 퇴임에 의아해 했는데 박근혜-최순실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사실에 수긍했다고 한다. # 결정적인 퇴임 사유는 다음 해 '다보스 포럼'의 저녁 만찬에서 싸이와 이미경 부회장이 대통령보다 더 튀어보여서 찍혔다고 한다. #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아예 공정거래위원회 인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CJ 조사를 종용하기도 했다는 폭로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었다. #[42]
- CJ 관계자는 자신들이 배급하거나 메인투자를 하지 않았다며, 분산투자를 하다보니 한 해 만들어지는 상업영화의 40%에 투자한다며 억울해했다. 부분투자여서 엔딩크레딧에 오르는 것인데, 올랐다는 자체만으로 CJ가 좌파영화를 만든다는 오해가 퍼졌다고 항변했다. 이 문제는 사내에서 꽤 심각하게 논의됐고 그 결과가 사명 변경이라고. #
- 개봉 이후 배급사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는 2014년,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 때문에 김우택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대표는 대상포진에 걸릴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전해졌다. 이에 대해 실미도 등을 연출한 강우석 감독은 "마치 영화계에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 세무조사를 받은 사실 자체로 '좌파로 찍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2015년,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여러 영화사들이 참여했다가 빠지기를 반복해 제작에 어려움을 겪던 연평해전을 배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김우택 대표는 연평해전까지 배급했는데 정부에서 홀대한다며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
- 공동투자로 참여한 캐피탈원은 모태펀드가 출자하는 투자조합에 참여할 수 없도록 청와대가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
- 김기춘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은 이 영화를 본 후 혀를 차며 걱정해 했으며,[43] 유진룡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이러한 류의 영화를 만드는 회사들을 왜 제재하지 않느냐?"고 말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
- 양우석 감독과 송강호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지지 선언에 동참하면서 박근혜 정부가 작성한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바 있다. 또한 제작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정우성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 이 영화 발표 이후 박근혜 정부에게 더욱 찍혔는지 송강호에게 잠시동안 작품 제안이 없었다고 한다. 송강호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좀 당황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하고요. 뭐 주변에서도 혹시 불이익을 받지 않았나 걱정해 주시는 분도 많이 계신데. 물론 변호인을 제작한 제작자나 투자하신 투자사 분들이 조금 곤란을 겪고 어느 정도 불이익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 같고요."라고 밝혔다. #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검열"이였다고.
- 개봉이 지난 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설날까지 TV에서 방영된 적이 없었다. 천만 영화들은 대부분 그 다음 해 명절에 특선 영화로 방영되었고 2014년에 여름에 개봉된 명량마저도 이듬해인 2015년 추석 때 TV 방영했고, 2015년의 암살(영화)도 2016년 가을 SBS에서 TV 방영했다. 그러던 2017년 3월, JTBC에서 TV 방영권을 구매했다고 밝혔다. # 그리고 2017년 추석에 최초로 TV에서 방영되었다.
- 문화계 좌파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조직된 국가정보원 엔터팀에서 영화 변호인에 특별히 많은 경계를 하였다고 한다. 이 국정원 엔터팀이란 조직은 국정원 정보보안국 소속으로 진보성향의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을 사찰하고 우익 색채의 영화 제작을 기획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훗날 이 조직의 실체와 이제까지 해온 만행이 드러나 큰 논란이 되고 있다. #
- KBS의 간판 영화 프로그램인 영화가 좋다는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려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소개 하지 않았다. 관객수가 천만을 넘어서야 MC가 해당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