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고려)

 

般若
(?~1376년)
1. 개요
2. 생애
3. 등장한 작품


1. 개요


고려 제31대 공민왕후궁. 우왕의 생모로 추정된다. 신돈의 시녀 출신이다.

2. 생애


원래 신돈의 시녀였으나 공민왕이 반해 가까이 했다고 한다. 혹은 노국대장공주와 닮은 여인을 보고 가까이 하였는데 그녀가 반야(般若)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설이 돌았다. 그녀가 사실은 신돈의 첩으로 신돈의 아이를 임신한 채 공민왕에게 상납됐으며 따라서 우왕은 신씨라는 것. 이 설은 조선 건국 세력들이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지 사실 여부는 모른다.[1] 심지어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우, 신창으로 기술한 뒤 반역열전에 넣었다.
반야는 아들을 출산할 때부터 신돈의 집에서 몸을 풀고 아들과 기거했는데,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한 후 우를 왕궁으로 데려온다. 공민왕은 아직 신분이 불안했던 우를 궁인 한씨(순정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입적시켜 왕자로 올린다. 공교롭게 이듬해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우왕이 10세에 즉위한다. 반야는 이 때 "내 배 아파 낳은 주상을 어찌 한씨의 소생이라느냐?"며 따졌는데, 즉시 하옥돼 임진강에 던져졌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서는 우왕의 생모가 순정왕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려사에 반야가 만삭 때 신돈이 반야를 승려 능우(能禑)의 속세 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능우가 순정왕후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우왕과 능우의 한자 우(禑)가 같아 혹시 우왕이 순정왕후와 능우의 불륜으로 태어난 숨겨진 아들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생모가 순정왕후라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

3. 등장한 작품


노국공주 역을 맡은 서지혜가 1인 2역을 맡았다.[2]

[1] 그러나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정몽주였다. 이를 행동에 옮긴 것이 이성계였고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이 뒷받침했다.[2] 평소 물에 대한 공포가 많은 서지혜가 하필 마지막화인 61회에서 임진강에 수장되는 신을 찍어야 해서 간신히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해당 기사61회, 해당 장면1 2 잘 보면 정말 공포감을 느끼는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그냥 던져진게 아니고 입에 재갈이 물려진 후 손발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다리에 돌까지 매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