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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抱川 半月城. 포천 반월성은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성#s-3으로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에 위치한 청성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시대에 성이 조성된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으나 인조 때부터 버려져서 현재는 그 터만 확인된다. 명칭은 반월성,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불려졌으며,[1] 이 가운데 반월성이라는 이름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성의 모양이 반달 모양인 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포천 반월성은 1998년 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반월성은 청성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인조대에 버려진 지라 현재까지 남아서 확인되는 성벽의 길이는 약 1,080m 가량이다.[2] 이는 경기 북부 지역에 남아 있는 성채 유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경기도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유일하게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이라고 한다.[3]
1994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시행된 반월성 학술 발굴 조사에서[4] 남쪽과 북쪽에서는 성문의 터, 치성(雉城)[5] 4개,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지휘대인 장대터, 망대터 등을 발견했다.[6]
반월성은 정확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는 태봉의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다.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최초 축성은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본다.[7][8] 하지만 이후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반월성도 고구려의 성으로 넘어가 약 1백년 가량 고구려의 영역으로 있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한강 유역을 영토로 확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7세기 초엽에 들어서 반월성도 신라가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라가 반월성을 점령한 이후인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들면서는 군사전략적인 요새보다는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9]
하지만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반월성의 전략적인 이점이 다시 떠오르면서 군사기지로 부각하는데, 궁예가 수도인 철원성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반월성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말 들어 시행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 반월성을 궁예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그러나 궁예의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기 들어서면서 반월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반월성은 군사기지로 잠시 다시 활용되는데 이때도 성채를 재건하지는 않고, 남아 있는 일부분만 재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성을 개축하여 인조 1년인 1623년까지 사용하였다고 하는데,[11] 이는 후금이 처들어 올 시에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월성을 재활용 한 것이다. 이렇게 반월성을 재활용 하면서 중군(中軍)도 성에 주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군을 해체하였고, 이와 함께 반월성은 버려져 딱히 수행하는 역할도 없이 점차 폐허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12] 이를 증명하듯이 막상 병자호란이 발발 했을 때엔 반월성은 광해군의 노력이 무색하게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1899년에 발간된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13] 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자[尺]이고,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閉)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어서[14] 인조때 반월성이 버려진 뒤 폐허로 남겨진 채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다.
1. 개요
抱川 半月城. 포천 반월성은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성#s-3으로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에 위치한 청성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시대에 성이 조성된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으나 인조 때부터 버려져서 현재는 그 터만 확인된다. 명칭은 반월성,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불려졌으며,[1] 이 가운데 반월성이라는 이름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성의 모양이 반달 모양인 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포천 반월성은 1998년 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반월성은 청성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인조대에 버려진 지라 현재까지 남아서 확인되는 성벽의 길이는 약 1,080m 가량이다.[2] 이는 경기 북부 지역에 남아 있는 성채 유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경기도에 남아 있는 유적 중에 유일하게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이라고 한다.[3]
1994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시행된 반월성 학술 발굴 조사에서[4] 남쪽과 북쪽에서는 성문의 터, 치성(雉城)[5] 4개,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지휘대인 장대터, 망대터 등을 발견했다.[6]
2.1. 역사
반월성은 정확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는 태봉의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다. 대략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최초 축성은 백제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본다.[7][8] 하지만 이후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반월성도 고구려의 성으로 넘어가 약 1백년 가량 고구려의 영역으로 있었으나,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한강 유역을 영토로 확정하고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7세기 초엽에 들어서 반월성도 신라가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라가 반월성을 점령한 이후인 통일신라시기에 접어들면서는 군사전략적인 요새보다는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9]
하지만 통일신라 이후 후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반월성의 전략적인 이점이 다시 떠오르면서 군사기지로 부각하는데, 궁예가 수도인 철원성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반월성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말 들어 시행된 학술 발굴 조사 이전까지 반월성을 궁예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 것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그러나 궁예의 태봉이 멸망하고 고려기 들어서면서 반월성은 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반월성은 군사기지로 잠시 다시 활용되는데 이때도 성채를 재건하지는 않고, 남아 있는 일부분만 재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성을 개축하여 인조 1년인 1623년까지 사용하였다고 하는데,[11] 이는 후금이 처들어 올 시에 방어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월성을 재활용 한 것이다. 이렇게 반월성을 재활용 하면서 중군(中軍)도 성에 주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군을 해체하였고, 이와 함께 반월성은 버려져 딱히 수행하는 역할도 없이 점차 폐허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12] 이를 증명하듯이 막상 병자호란이 발발 했을 때엔 반월성은 광해군의 노력이 무색하게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1899년에 발간된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13] 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자[尺]이고,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閉)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어서[14] 인조때 반월성이 버려진 뒤 폐허로 남겨진 채 내려왔던 것을 알 수 있다.
3. 기타
- 1994년부터 2001년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학술 발굴 조사가 이뤄졌는데, 일련의 발굴 조사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산성 유적 발굴에 있어서 반월성 발굴 조사처럼 계획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총 7권에 달하는 발굴 보고서가 발간된 사례가 그 이전까지는 없었다고 한다...[15]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포천 반월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반월성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반월산성 유적
- 고고학사전 : 반월산성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
- 대한민국 구석구석 : 포천 반월성
- 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
5. 사적 제403호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포천반월성지 → 포천 반월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출처 : 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2]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3] 출처 : 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4]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5] 치성은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뜻한다. 참조 : 네이버 국어사전 - 치성3 雉城[6]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7]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8] 하지만 고구려가 만든 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포천 반월성 (抱川 半月城)[9]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10]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 반월산성[1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반월성지[12]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13]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포천군읍지[14] 출처 : 두산백과 - 포천 반월성[15]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포천 반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