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국 철원성
1. 개요
태봉, 고려시대의 도성 및 궁궐이다.
처음 궁예왕은 구 신라 한주 송악군에 도읍했으나 곧 한주 철성군(鐵城郡)으로 천도하여 철원성(鐵圓城)이라 하였다. 이후 궁예왕이 몰락하면서 태조 왕건이 즉위, 대략 1년 정도 신 고려 왕조의 본궐로 사용되었다.
국호를 "마진#s-3"으로 변경하는 것과 철원 천도는 거의 동시기에 일어났다. 학계에선 나라에 전체적으로 고구려색을 뺌으로써 패서 귀족을 위시한 기득권들의 입김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천도와 국호 변경을 시도했다고 추측한다.
천도후 철원은 철원경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왕건이 궁예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하면서 다시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게 된다.[1]
고려가 철원성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축과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기록엔 도성이 무지하게 크고 사치스러웠다 하는데 성궐 유적의 면적을 보면 당시 크기는 진짜 컸던 걸로 보인다. 사치스러웠는지는 남은 건축이 없으니 판단하기 어렵고.
1.1. 사서의 기록
'''재위 원년, 무태(武泰) 원년, 서기 904년:'''
'''가을 7월, 청주(靑州)의 인호(人戶) 천명을 철원성(鐵圓城)에 옮겨 경(京)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중.
'''재위 1년, 성책(聖冊) 원년, 서기 905년:'''
'''신경(新京)에 들어 관(觀), 궐(闕), 누(樓), 대(臺)들을 수리하니 지극히 사치스럽고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중.
'''궁궐이 크고 웅장한 것에 집착해 절제하지 못하고 노역을 부리니 원성이 커졌다.'''
고려사 태조 세가 중.
'''(동주는) 본래 고구려 철원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철성군으로 고쳤다. 후 궁예가 기병하여 고구려 옛 땅을 취하니, 송악군에서 와 도읍했다. 궁실을 지었는데 지극히 사치스러웠다.'''
고려사 동주 지리지 중.
이상이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철원성에 관한 기록 중 일부이다. 조선시대의 정철이 쓴 시에도 태봉 철원성이 등장한다.'''궁예궁전(弓裔宮殿)의 옛 터는 동주 북쪽 27리에 있는 풍천지원(楓川之原)에 있다.'''
고려사 동주 지리지 중.
이미 정철 대에도 태봉 철원성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궁예 왕 대궐의 터에 오작이 지저귀니, '''
'''천고흥망을 아느냐, 모르느냐.'''
정철의 관동별곡 중.
2. 도성의 명칭
태봉과 궁예가 워낙 단명했고 고려에 의해 감추어진 사실들이 많아 도성을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었다.
- 궁예도성
- 궁예왕궁
- 궁왕도성
- 태봉도성
- 태봉국도성
- 철원도성
이는 한국의 역대 왕조의 도성을 부를 때 일반적으로 '국가명 + 지역명 + 성'으로 부르는 전례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평양성, 조선의 한양도성 등등. 자세한 건 링크 참조.https://blog.naver.com/nrichpr/221358314942
-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공식 블로그 주소.
3. 철원성
철원성은 제대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일제 강점기부터 조금씩 조사된 결과론 외성, 내성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이후 내성 내에 궁성이 또 있다는 것 또한 발견됐다. 또한 주요 특징으로 당나라 장안의 모습을 본딴 사각형 구조였으며 지형상 왼쪽 성궐이 조금 삐뚤어져 있다. 당 장안성 구조를 수용한 것은 발해 상경성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했다. 외성 > 내성 > 궁성 순으로 지은 것 또한 동일하다. 후 고려 만월대도 같은 방식으로 성을 쌓았다.
3.1. 외성
철원성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성궐. 외성은 나성과 같은 의미다. 남아있는 외성 흔적의 길이가 무려 12,600m다.[2]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들었다. 일단 도성의 넓이 하나는 확실히 컸다.
외성에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3.2. 내성
철원성의 두번째 성궐. 외성 안 북쪽에 위치해 있다. 약간의 흔적만이 남아있으며 길이는 대략 7,700m로 추정된다. 내성은 황성과 같은 의미이며 안에 관사, 정부 청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황성이 정부 청사를 두르라고 있는 성이니까.
철원성 내성은 상경성 황성[3] 보다 훨씬 크다. 이는 발해는 철저하게 당 도성제를 지켰지만 태봉은 적당한 선까지만 지켰기 때문. 고려 같은 경우 외성 > 내성 > 궁성 순서만 지키고 완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지었고 조선 왕조는 내성이 없었다.
보통 궁궐의 크기를 잴 때 황성의 둘레를 잰다. 이는 궁성에서 조금 추가된 황성의 부분을 포함하기 위함인데 우리나라는 발해를 제외하면 황성이 있는 나라가 태봉, 고려인데 둘 다 당제를 독자적으로 수입한 바람에 내성(황성)이 무지막지하게 크다... 조선 경복궁은 아예 황성이 없어서 우리나라는 보통 궁궐의 크기를 궁성까지만 잰다.
3.3. 궁성
철원성의 마지막 성궐. 내성 북쪽 즈음에 위치했을 거라 본다. 길이는 대략 1,900m. 태봉의 본궐을 둘러 쌓았다. 특이하게 궁궐 자체는 그닥 크지 않았던 것 같다.[4] 이 궁성이 바로 조선의 경복궁 격이다. 당시 궁궐에선 궁예가 부인 강씨, 두 아들 보살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 6월에 태조 왕건은 궁예왕이 궐내 창고에 곡식을 너무 많이 저장했다고 언급했는데 그 중 ''''동궁(東宮)''''을 언급했다. 동궁은 태자궁의 다른 말인데 이를 보아 철원성에 태자궁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 궁궐에서 500년 고려 왕조가 시작되어 태조 신성대왕이 즉위했다.'''
3.4. 건축
- 석등
- 포정전(布政殿)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221612271&code=900308
- 태봉 철원성 유적 기사.
4. 위치
그런데 이 도성의 현재 위치가 참 절묘하다. 정확히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관통한다.[5]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6] 휴전선 안엔 궁예가 건설한 철원성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라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요원한 상황. 기껏해야 먼 거리에서 관측해서 도성의 크기와 형태를 추정하는게 전부이다.
태봉 도성은 경원선과 3번 국도가 정확하게 남북 방향으로 관통한다. 하지만 현재 경원선은 원래의 노선이 단선에다가 선형이 약간 좋지 못한 관계로, 도성의 동쪽을 지나도록 새로 노선을 계획했다.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 태봉 유적의 대대적인 발굴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월정리역부터 평강역까지 새로 철도가 놓일 것이고, 아마 통일 후에는 경원선이 주간선이므로 복선 또는 복복선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엔 도성 일대 지역(철원군 북면 홍원리)을 '풍천원(楓川原)'이라고 불렀다.
5. 평가
철원은 수도로서 입지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철원 지역은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손꼽히는 곡창 지대지만 한 국가의 수도로서 기능하려면 이런 자체 생산력 외에도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전국의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전 근대 시절의 주요 도시들이 해안이나 강가에 있는 것도 수운을 통해서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수운은 전근대에는 가장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었다.[7] 한국사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등장하는 주요 국가들의 수도가 하나같이 강이나 호수[8] , 바다를 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9]
- 부여 역시 송화강(쑹화강)을 끼고 있다. 부여, 가야보다 더 중심이 약했던 동예와 옥저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접하고 있었다.
-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자,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은 대동강을 끼고 있다. 한반도 바깥이지만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지린성 지안 시 는 압록강 중류였다.[10]
-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형산강을 끼고 있고, 동해와 적당하게 가깝고, 양산단층 가도를 따라 낙동강과 남해에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11]
- 가야의 경우 금관국 금관가야의 김해는 낙동강 하류를 끼고 있었으며[12] , 반파국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군도 낙동강과 접할 뿐 아니라 전성기에는 섬진강 유역까지 차지했었다. 그 외 안라국은 강이, 고자국은 바다가 있었다. 의혹이 심하지만 성산가야와 고령가야도 전해지는 추정지들을 보면 하천을 끼고 있다.
- 발해는 초기 수도 동모산이 인접한 강이 없자 강을 낀 동경 - 중경 - 상경으로 옮겼다. 수도는 아니지만 서경은 압록강 상류에 안정적으로 흐르는 강과 냇가가 있었고, 남경은 동해안과 접했다. 그리고 주요 지방 중 하나였던 동부 만주 및 연해주에서도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는 만경강을 끼고 있다.
-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예성강과 임진강을 끼고 있다.[13]
- 전기 백제와 조선과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은 한강을 끼고 있다. 이후 후기로 접어들어 천도한 웅진([[공주시]), 사비(부여군) 모두 금강을 끼고 있다. 한때나마 수도로 정하려 했던 익산(금마)도 만경강과 가깝다.
다시 말해 철원은 수운을 이용한 물류 이동은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철원이 비옥하다는 것도 근대 들어서 평강 봉래호저수지가 축조된 이후의 이야기지, 그 이전의 철원평야는 한탄강의 유량에 한계가 있어 인근 다른 산골짜기 지역들보다얀 낫지만 그렇게 특출난 곡창지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장 세종실록지리지만 봐도 철원과 평강을 '땅이 메마르다'거나 '논이 별로 없다'고 기록해놓은 것을 보면[14] 전근대에는 지금 보는 것처럼 농업생산력이 대단했던 지역이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15] 이런 마당에 농경지를 거주구역이 잠식하면서 농사를 지을 땅이 비좁아졌고, 도성의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한탄강의 수운이 마땅치 않음은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자체 부양력까지 떨어지게 되니 식량의 수급에 적신호가 켜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철원의 물가는 크게 올랐고, 궁예에 대한 반감도 커져서 궁예가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태조 원년 8월)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당시 철원의 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에야 철원이 한반도 중부의 교통 요충지지만[16] , 이는 근현대에 철도, 교량, 터널 등 육상교통 인프라 토목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사정이 변한 것이다.가는 포 1필로 쌀을 5되밖에 살 수 없었다."
6. 기타
후삼국시대 궁예와 태봉국을 테마로한 역사, 문화 테마 공원이 조성된다고 한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태봉국 수도 철원은 백성들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가는 생지옥이자 인간도살장[17] 으로 묘사된다. 국왕의 광증으로 인해 높으신 분들 마저도 여기 있길 꺼려하는데, 호족들은 고위직에 앉길 꺼려하며 장수[18] 들은 철원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구르는 걸 선호할 정도였다.
원래 궁예는 철원을 수도로 삼으려고 했는데, 왕륭이 추천한 송악(개경)에 도읍을 세웠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아지태의 농간에 넘어간 궁예가 다시 철원을 살피고 극단적인 거대함, 화려함 및 북벌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주 공방전 등으로 이미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궁예는 철원에 거대한 황궁을 다시 지었고, 이에 국고는 바닥나며 옮겨온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진다.
그렇찮아도 철원에 이주한 백성들에게 별다른 지원도 없는데 극심한 가뭄까지 겹치다보니 철원은 한 국가의 수도임에도 점점 길거리에 아사한 시체들이 널려있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 세기 말 지옥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궁예는 허황된 북벌, 전쟁, 법회에만 신경 쓰니 구휼 활동 같은 게 있을 리가...
이런 상태가 몇 년 지속되다가 시중 왕건이 아지태의 무리한 북벌을 중단하고 구휼 활동을 벌이면서 민심이 어느 정도 안정된다. 하지만 궁예는 무리한 군사작전을 다시 추진하면서 또다시 철원이 궁핍해질 위기에 처했으나 그 전에 왕건이 역성 혁명을 따르면서 태봉국이 사라지며 고려로 되돌려진 이후 송악(개경)으로 다시 왕건은 천도한다.
[1] 이때부터 송악 일대는 개경(開京), 왕경(王京), 황도(皇都), 상도(上都) 등으로 불리게 된다.[2] 한양도성이 18,600m라는걸 생각해보면 크기가 가늠된다.[3] 궁성에서 조금 앞으로 나온 모습이고 둘레 3,100m.[4] 조선의 본궐 경복궁 길이가 2,500m이다.[5] 아래의 추정도 그림에서, 윗쪽을 비스듬히 지나는 희미한 점선이 군사분계선이다. 그림의 아래쪽, 즉 도성 중 왕궁이 있던 곳이 북한령이다.[6]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를 두고 "남북이 통일하면 국호를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아닌 태봉으로, 수도도 서울이나 평양 어느 쪽도 아닌 철원으로 하라는 계시인 거냐"라는 우스개를 쳤다.[7] 사실 현대에도 여객이나 긴급화물은 철도 등 다른 운송수단이 대체했지만 대부분의 중장거리 화물은 상선의 효율성이 철도ㆍ도로ㆍ항공을 압살한다.[8] 세계사에서 볼 때 호수의 경우 지금의 캄보디아인 크메르 제국의 중심지가 있었던 톤레삽 호수가 대표적이다.[9] 근데 바다의 경우 너무 가까우면 전근대 기준으로 좋은 위치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으로 온조왕의 형이었던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지만 해안 일대라 소금기가 많았고, 당시로서는 농업이 그렇게 발달된 시기도 아니었기에 바다를 통한 무역만 빼면 농업 등에선 불리했으며, 이들이 해상 무역을 잘했다는 언급도 딱히 없는 걸 볼 때 이곳에서의 생활 역시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미추홀이 땅의 조건이 안 좋아서 망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비류 문서 참조. 그리고 세계사에서도 페니키아, 카르타고, 고대 그리스, 베네치아 역시 해상무역으로 발전했다.[10] 첫 수도였던 오녀산성은 산에 세워져 방어에 좋았지만 농경지가 부족하고 철원처럼 내륙 한가운데에 가까웠던 지형이었다. 그래서 얼마안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11] 다만 동해바다 건너에 왜(현재의 일본)이 있었기에 초기 신라는 이들의 공격을 당하곤 했다.[12] 당시엔 남해와도 접했다.[13] 다만 시가지는 예성강과 임진강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고려시대 내내 수도로서의 개경의 약점 중 하나로 작용했다.[14] 철원도호부에 대해서는 간전 4,343결 중 논이 1/4도 안 된다고 하고, 평강현은 더 심해서 논이 '''58결'''뿐이라고 기록되어있다.[15] 분단으로 봉래호저수지의 수자원을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1972년 토교저수지 축조 이전까지 철원평야는 만성적인 용수부족과 가뭄에 시달렸다. #[16] 이것도 한반도가 통일된 상황에서나 해당된다. 물론 통일 후에 인프라를 복구시키면 강원도 북부와 원산, 함흥을 넘어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거점지로 재탄생하게 된다.[17] 작중에서 기침한 신하, 석총, 열병식 당시에 웃은 여인들, 강 장자, 석총의 제자들, 연화, 청광, 신광, 형미 등이 철원에서 처형되거나 살해되었다.[18] 가령 복지겸은 병부령으로서 동료 장수들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으나, 궁예의 무리한 북벌 요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예 전장에 나가 싸우길 바랄 정도. 결국 마군장군으로 강등당했으나, 오히려 복지겸은 이를 반가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