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로바노브스키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소련'''}}}
{{{-2 20대, 25대, 27대, 30대
'''우크라이나'''}}}
{{{-2 8대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의 수상 이력'''





''' 우크라이나의 축구감독 '''
[image] [1]
'''이름'''
'''발레리 로바노브스키'''
'''Valeriy Lobanovskyi'''
'''본명'''
발레리 바실료비치 로바노우스키
Валерій Васильович Лобановський
'''출생'''
1939년 1월 6일 /
소련 우크라이나SSR 키예프주
'''사망'''
2002년 5월 13일 (향년 63세) /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
'''국적'''
우크라이나
'''신체'''
187cm
'''직업'''
축구선수(공격수[2]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FC 디나모 키예프(1957~1964)
FC 초르노모레츠 오데사(1965~1966)
FC 샤흐타르 도네츠크(1967~1968)
'''감독'''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1969~1973)
'''FC 디나모 키예프(1973~1982)'''
'''소련 대표팀(1975~1976)'''
소련 대표팀(1982~1983)
'''FC 디나모 키예프(1984~1990)'''
'''소련 대표팀(1986~1990)'''
UAE 대표팀(1990~1993)
쿠웨이트 대표팀(1994~1996)
'''FC 디나모 키예프(1997~2002)'''
우크라이나 대표팀(2000~2001)
'''국가대표'''
2경기 0골(소련 / 1960~1961)
''' UEFA 유로 준우승 감독 '''
무뇨스(1984)(1988)포크츠(1992)
1. 개요
2. 현역 시절
3. 감독 시절
3.1. 클럽
3.2. 국가대표
4. 철학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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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 과학자(the soccer scientist)"'''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과학 축구의 선구자'''
우크라이나(소련)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수학, 과학적 수치에 기반한 과학 축구의 선구자로 유명하며, 압박의 활용, 선수들의 체계적인 식단 관리 등 현대 축구의 필수적인 요소들이 바로 이 사람에 의해 유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역사상 최고의 감독을 논할 때 알렉스 퍼거슨 경, 또는 그래도 축구 좀 안다는 사람은 리누스 미헬스, 아리고 사키, 엘레니오 에레라, 오트마어 히츠펠트 등을 꼽겠지만, 로바노브스키 역시 이 반열에 충분히 오를 만한 감독이다.[3]

2. 현역 시절


로바노브스키는 현역 시절 디나모 키예프, 초르노모레츠, 샤흐타르에서 활약했다. 주 포지션은 왼쪽 윙어였는데, 날카롭게 휘어지는 킥으로 정평이 났었다. '코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디나모 키예프의 인기스타였지만 정작 감독이자 은사인 빅토르 마슬로프와의 철학과는 맞지 않았다.[4][5] 선수로는 상당히 빠르게 은퇴했는데, 이는 샤흐타르 시절 동료들의 허접한 플레이에 '그들이 도저히 축구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3. 감독 시절



3.1. 클럽


선수 로바노브스키는 1968년 샤흐타르 도네츠크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평범한 배관공 일을 할까 고민하다 1969년 드니프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6]의 감독직을 수락하며 본격적인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드니프로는 2부리그에 속한 구단이었고 로바노프스키는 팀을 맡은지 3시즌 만에 1부리그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6위를 차지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로바노브스키가 드니프로에 과학 축구를 도입하고 있을 때, 디나모 키예프는 아직 빅토르 마슬로프가 지휘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마슬로프는 1970년 월드컵에 선수들이 6명이나 차출되었음에도 계속 진행되던 리그에서 당연히 부진한 성적을 냈고 디나모 키예프에서 경질당했다. 후임은 민스크의 감독 세비도프였는데,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7] 지속되는 변방 팀의 약진에 분노한 키예프 보드진들에 의해 경질당했다.
여기에 후임 감독으로 내정된 인물이 바로 로바노브스키. 로바노브스키는 자신의 사단들[8]과 함께 디나모 키예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디나모 키예프 시절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전설'''. 3차례에 걸친 디나모 키예프 시절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소련/우크라이나 리그 우승 13회를 위시해 UEFA 컵위너스컵 우승 2회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올레흐 블로힌, 이고르 벨라노프, 안드리 셰브첸코, 볼로디미르 베소노프, 아나톨리 데미아넨코와 같은 우크라이나 축구계의 슈퍼스타들이 로바노브스키 휘하에서 활동했다.
[image]
노년의 모습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도 2002년 초부터 불규칙한 심장 박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자주 병원 신세를 지내오다가 그해 5월 7일, 메탈부르크 자포리지아와의 경기가 끝나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어 뇌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오랜 감독 생활 동안 불철주야 쉬지 않고 일한 탓에 생긴 합병증으로 5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의 장례식 영상.
[image]
키예프의 바이코프 공동묘지에 있는 발레리의 무덤.

3.2. 국가대표


잠시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는데, 1976년 올림픽 동메달, 유로 1988에서 소련의 준우승을 이끌어냈다.[9] 2000년에 조국인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2002년 월드컵 출전을 노렸으나 2001년 경질당했다.

4. 철학


감독이 되기 전에 이미 선수 시절부터 로바노브스키는 축구와 과학을 결합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축구가 11개의 상위 시스템이 각각 2개의 하위 시스템을 지녀 총 22개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축구는 개인이 아님 팀원 간의 유대에 기인한다'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10]
드니프로의 감독 생활 중 1972년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해인데, 로바노브스키 사단 4인방을 구성할 인물인 아나톨리 젤렌초프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만남 덕분에 로바노브스키는 수월하게 과학적인 요소를 축구계에 도입할 수 있었으며 이는 자신을 대표하는 철학인 '압박'을 위한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바노브스키에게 축구 =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그 목적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었고, 로바노브스키는 이를 위해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3단계에 거쳐 팀을 정비했다. 그 3단계는 이와 같다.
1.자신의 철학에 의한 선수들의 기술 재정비
2.상대의 전술적 대응에 의한 우리 팀의 전술적 대응
3.경기 종료까지 가장 효율적인 체력 상태 유지
'체력'은 로바노브스키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고 때문에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뒤에는 최상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승부를 노리다가 패배하는 일도 빈번했다.
로바노브스키 축구의 또다른 핵심 요소는 '압박'이다. 로바노브스키의 팀은 마치 70년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것처럼 압박을 구사했다. 그러나 '압박'은 선수들이 한 공간에 집중되기 때문에 공간이 생기고, 상대 팀에게 역습을 허용할 수 있다는 위험 요소가 존재했다. 이를 위해 로바노브스키는 볼을 소유한 상태에서는 경기장을 넓게 만들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경기장을 좁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련장에서도 로바노브스키는 자신의 평가 기준에 따른 공격, 수비 훈련을 시행했다. 리누스 미헬스가 원한 것 처럼 모든 선수들이 만능 플레이어가 되길 원했다. 물론 선수들을 축구하는 로봇 다루듯이 대한 것은 아니다. 또한, 경기 내에서도 기계적인 플레이 보다는 임기응변식의 경기를 하길 원했고 항상 우위를 점하는 축구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로바노프스키의 축구 철학에 맞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디나모 모스크바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감독을 맡았던 콘스탄틴 베스코프였다. 그는 축구를 예술로 바라봤으며,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창의적인 자유를 부여해 선수들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길 원했다. 베스코프가 스파르타크에서 이룩한 업적은 1979년과 1987년에 이룬 두 차례의 우승뿐이었지만, 당시 소련 내에서의 실질적인 존경은 흥미진진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베스코프 쪽이 더 높았다.

5. 평가


디나모 키예프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디나모 키예프의 홈구장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로바노브스키 디나모 스타디움이다.
[1] 1988년의 로바노브스키와 1999년의 로바노브스키이다.[2] 스트라이커[3] 월드사커에서 2013년에 선정한 역대 최고의 감독 5인에는 이 목록에서 히츠펠트는 빠지고 로바노브스키는 들어갔다.[4] 로바노브스키는 개인 기량이 출중한 선수였는데, 마슬로프는 시스템을 중시했다. 물론 마슬로프가 개인기를 부리는 선수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로바노브스키는 곧바로 퇴출되었을 것이다.[5] 아이러니하게도 로바노브스키 역시 자신은 자신의 팀에서 뛰지 못할 것이라며 마슬로프의 견해를 인정한 바 있다.[6] 이하 드니프로. 현재는 2015년도 유로파 리그 준우승과 준우승 견인에 1등공신인 예우헨 코노플리얀카의 출신 클럽으로도 유명하지만 재정 문제 여파로 2016년 6월 29일(현지시간), 구단 해체를 선언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7] 2시즌간 준우승 2회.[8] 로바노브스키 본인을 포함해 젤렌초프, 바실레비치, 오셈코프를 말한다. 이들은 데이터에 기반을 둔 상대 팀 분석, 선수들의 체력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으며, 로바노브스키의 철학이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9] 소련 해체 직전이었던 시기를 감안하면 마지막으로 기록된 메이저 대회 결승 기록이다.[10] 이 때 당시 전술은 하나의 옵션에 불과했고 감독들은 그저 바지사장에 불과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깨버린것이 맨유의 전설적인 감독 맷 버스비와 발레리 로바노브스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