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리 셰브첸코
[clearfix]
1. 개요
우크라이나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부터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무결점 스트라이커'라는 별명이 붙었다.
2. 선수 경력
2.1. FC 디나모 키예프
셰브첸코는 자국 리그의 명문 구단인 FC 디나모 키예프의 리그 5연패 및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의 주역으로 유럽무대에 그 이름을 알렸다. 특히 컬쳐쇼크급 활약을 보여줬던 경기는 97-98 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바르셀로나 전으로 1997년 11월 5일 홈에서 '''3-0'''으로 캄 노우에서는 '''4-0'''으로 떡실신시켜버린 사건인데, 솁첸코는 캄 노우 원정에서 '''전반전 해트트릭'''이라는 폭탄을 터트려 전 유럽을 경악케 만들었다.[6] 그 뒤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넣은 선수는 없었다가, 2021년 2월 17일, 16강전 1차전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23년 4개월만에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파리 생제르맹의 4:1 역전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16강전에서는 키예프가 홈에서 유벤투스에게 1:4로 참패하며 탈락했는데, 여기서 거꾸로 키예프 홈에서 유벤투스 소속이던 필리포 인자기가 해트트릭을 터뜨렸고 셰브첸코는 우벤투스 전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1998-99 시즌, 챔스 조별리그에서 만난 아스날을 상대로 프리킥 결승골을 터트려 팀을 8강에 올려놓았고 8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는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기록하며 팀을 챔스 4강으로 이끌었다.
4강에서 만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2골을 기록했지만, 팀의 열세로 3-3 무승부로 1차전을 마쳐야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1-0으로 아쉬운 패배를 당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이 시즌 그는 챔피언스리그 득점왕(8골)을 차지했고 UEFA 올해의 공격수로 선정되었다.
2.2. AC 밀란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셰브첸코는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데뷔시즌 득점왕''' 이라는 엄청난 업적과 함께 성과를 이루어나간다.[7]
부상과 이에 따른 컨디션 난조로 리그 5골에 그치며 극도로 부진했던 2002-03 시즌을 제외하면 매시즌 20골 언저리를 기록하며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우뚝선다. 그러나 이 부진했다는 2002-03 시즌 후반기 머리를 삭발하고온 그는 조별리그 1차전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결승골을 뽑아 팀을 1위로 16강에 진출시키고, 8강 아약스를 상대로 천금같은 동점골, 4강에서 벌어진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도 2차전 골을 기록하여 원정다득점 원칙에 따라 팀을 결승에 올렸고, 결승에서는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PK를 성공시키는 등 팀의 6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계속해서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던 셰브첸코는 2004년 세리에 A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차지하며 마침내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8]
다만 2004-05 시즌에는 팀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올리는 활약을 했으나, 리버풀에게 이스탄불의 비극을 맛본다. 셰브첸코는 이 경기에서 크레스포의 골을 어시스트했지만 예지 두덱에게 수 차례 결정적인 슈팅이 막혔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섰을 때도 실축하면서 리버풀에 우승을 내주게 된다.[9]
2005-0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5차전에서 페네르바흐체 SK를 상대로 혼자 4골을 득점하였고 4강에서 만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차전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골은 파울로 취소되었는데 이것은 카를레스 푸욜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인한 오심이었다. 그는 첼시로 건너가기 전 챔스 득점왕(9골)에 올랐지만, 아쉬움을 남기며 4강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시절의 셰브첸코는 정확한 골 결정력과 '''동유럽의 호나우두'''[10] 라고 불릴 정도로 빨랐던 스피드, 상대 수비수들을 초토화시키는 몸싸움, 준수한 테크닉, 윙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는 전술적 이해도[11] 까지, 무결점 스트라이커란 칭송이 아깝지 않았다.
밀라노 더비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이며 레전드 군나르 노르달에 이은 구단 역대 최다 득점 2위(173골)로 사실상 노르달의 기록을 깰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았으나...
2.3. 첼시 FC
첼시 FC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솁첸코를 영입하는 것에 강한 욕심을 드러냈고, 약 500억 정도로 추산되는 거액의 이적료와 솁첸코의 아내를 통한 설득을 통해 결국 영입에 성공하였다.
그의 아내는 모델이었는데 미국 출신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아내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그들이 사는 곳은 이탈리아고. 그 와중에 영국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이 손을 뻗혀 왔으니 애 아빠가 어쩌겠는가? 국내 밀란 팬 클럽 커뮤니티에서는 "하필 미국인과 결혼해서 이러느냐" 라는 말까지 나왔다. 뭐, 결국 최종 승자는 밀란이 되었지만.[12]
이런 과정 뒤에 첼시로 와서 리버풀과 커뮤니티 실드 경기를 치렀다. 오자마자 첫 경기에서 골을 삽입한 그는 역시 솁첸코라는 말을 들었으나, 부상을 겪으며 컨디션이 떨어졌고, 같은 자리 경쟁자인 디디에 드록바가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며 선전했다.[13]
드록바는 당연히 기대를 받으며 확고한 주전 자리를 지켜나갔고, 솁첸코는 연거푸 부진과 부상을 오가며 벤치를 달궜다. (06-07~07-08시즌: 리그 47경기 9골)
리그 보다 중요도가 낮은 FA컵에 등장해 골을 넣자 일부 팬들은 '컵첸코'라 놀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 'N첸코'가 붙기 시작한다. [14] 심지어 둥팡줘에 빗대어 동팡첸코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특히나 2007년 2월 존 테리에게 응급처치[15] 를 취했는데 이것이 매우 적절한 행동이라 '메딕첸코', '셰브란스'로도 불렸다. 후일 사람들은 세브첸코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이것을 꼽기도 했다. '''셰브첸코가 존 테리를 살렸다!'''[16]
여담으로, 이 부진한 기간 동안에도 국대에서는 골을 넣었다. 그래서 '애국첸코'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후 그는 AC 밀란으로 임대 복귀했으나 임대기간 1년동안 리그, 컵 경기 모두 합쳐 2골 1도움이라는 초라한 성적. 결국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시간 때우기용 교체선수로 전락했다. 임대 만료 후 첼시로 복귀했지만 그에게 더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첼시에서의 실패 요인으로 많은 근거가 언급되는데, 일단 신체적 한계가 찾아온 것과 리그 템포 차이가 결정적으로 꼽힌다. 이미 2000년대 초반 부상으로 신체적인 힘이 크게 떨어진데다 그게 첼시로 이적할 당시 나이는 한국 기준 31세였다. 지금이야 관리가 잘되고 하니 선수 수명이 길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0대에 들어선 선수들은 전부 내리막을 탔다. 거기다 드록바가 그보다 2살밖에 더 어리지 않음에도 밀릴 정도로 피지컬이 급격히 내려오고 있었다.
2.4. 디나모 키예프로 귀환
2009년 8월 말 결국 자신이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디나모 키예프와 2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였고, 2010-11 시즌 종료 후 1년 계약을 연장하였다.
리그에서는 55경기 23골을 기록하며 고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2010-11 시즌 12경기 5골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특히 2011년 3월 맨시티와의 UEFA 유로파 리그 16강 1차전 홈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득점을 기록하자 부활이니 제2의 전성기라느니 등의 설레발이 있었다. 하지만 2011-12 시즌 5경기 무득점에 그쳐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2.5. 국가대표
1995년 국가대표로 첫 발탁됐으며, 첫 득점은 1996년 5월 터키와의 친선전에서 기록하였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는 조별리그(9조)에서만 3골(PO 포함 4골)을 득점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크로아티아에 1차전 0-2, 2차전 1-1(셰브첸코 득점), 합계 1-3으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UEFA 유로 2000 예선에서는 프랑스에 승점 1점이 뒤져 플레이오프로 밀려났으며, 플레이오프에서 슬로베니아에 1차전 1-2(셰브첸코 득점), 2차전 1-1, 합계 2-3으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상황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조별리그(5조)에서만 9골[17] (PO포함 10골)을 득점했으나 폴란드에 밀려 플레이오프로 밀려났으며,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는 독일에 1차전 1-1, 2차전 1-4(셰브첸코 득점), 합계 2-5로 패해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UEFA 유로 2004 예선에서도 총 3골을 기록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조별리그(6조) 3위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당시 조별리그 1위는 그리스, 2위는 스페인이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결실을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맺었다. 2006 독일 월드컵 예선(5조)에서만 6골을 넣었고 드디어 우크라이나는 조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게 된다. 이는 1991년 소련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본선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는 팀의 0-4 대패를 막지 못했지만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1골[18] 1도움, 튀니지를 상대로 1골[19] 을 기록하며, 아나톨리 티모슈크, 세르히 레브로프, 안드레이 보로닌 등과 함께 팀의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는 전,후반 연장전 득점없이 맞이한 승부차기에서 첫 키커로 나서 실축했지만 나머지 3명의 키커들이 모두 PK를 성공시키고, 팀 동료 키퍼였던 올렉산드르 쇼우코우스키가 스위스 키커의 킥을 2번 선방하는 맹활약을 함으로써 3명이 연달아 실축[20] 한 스위스를 제치고 월드컵 처녀출전에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21] 그러나 8강전 상대는 이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였고 결국 3-0으로 패하면서 셰브첸코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은 8강에서 마무리되었다.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는 조별리그(B조)에서만 5골을 기록했지만 조 4위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에서는 조별리그(6조)에서 6골을 넣었으나 잉글랜드에 밀려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으며, 플레이오프에선 2경기 모두 출전하고도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그리스에 1차전 0-0, 2차전 0-1, 합계 0-1로 패했다. 당시 본선 진출권을 그리스에게 내 주게 되자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뭇 축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2010-11 시즌이 끝나자 2012년 자국에서 폴란드와의 공동 개최로 열리는 UEFA 유로 2012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본선[22] 첫 경기인 스웨덴 전에 선발로 나서 0-1로 끌려가던 후반 10분과 17분에 잇따라 헤딩골을 기록하며 조국 우크라이나에 유로 대회 사상 첫 승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안방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연이어 패하면서 탈락했고 유로 대회 첫 승을 챙긴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대회 종료 직후 대표팀과 작별을 고한다.
3. 은퇴 이후
2012년 7월 은퇴 이후 정계 진출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 전진!" 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면서 일단 정계 진출은 무산되었다.
또한 골프 선수로 전향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을 꿈꾸며 2013년 9월 12일 우크라이나 카르코프에서 열린 유럽프로골프 챌린지 투어 카르코프 슈퍼리어컵에서 데뷔전을 치뤘으나 세브첸코는 참가 선수 중 최하위권인 공동 118위에 머물렀다.
4. 지도자 경력
[image]
2016년 2월 16일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UEFA 유로 2016이 끝난 후 7월 16일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와 크로아티아에 덜미를 잡혀 2018 러시아 월드컵 진출은 실패했다. 그래도, 경질되지는 않았고 계속 우크라이나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리그 B 조별리그 1조에 체코, 슬로바키아와 한 조가 되었다. 그리고 3전 전승으로 조국을 UEFA 네이션스 리그 A로 승격시켰다.
UEFA 유로 2020 지역예선에서 2019년 11월 현재 5승 1무를 거두며 포르투갈과 세르비아를 제치고 조 1위로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첼시의 차기 감독이 투헬로 결정되면서 셰브첸코는 계속 우크라이나 감독으로 있을 것 같다.
5. 플레이 스타일
젊을 적엔 탁월한 운동능력을 활용한 폭발적인 돌파가 돋보였다. 다만 이 점이 잘못 전해져 투박하다고 표현되기도 하나, 투박하다고 하면 떠오를 '우당탕탕'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보폭이크고 볼터치가 카카나 호나우지뉴처럼 섬세하진 않아 투박해보이는 것이고, 자신의 신체를 믿고 스피드와 에너지를 앞세운 플레이를 펼쳤던 선수였을 뿐.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루이스 수아레스처럼 테크닉도 훌륭하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극대화시키는 타입.[23]
특히 그의 강점 중 하나는 바로 슈팅 능력이다.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골대 바로 앞부터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까지 득점 가능한 범위도 넓다. 그의 100골 비디오 클립을 보면 머리로만 정확히 25골을 득점하기도 한다. SS 라치오와 경기에선 머리, 오른발, 왼발의 퍼펙트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즉, 어느 부위로든 골로 넣을 수 있었다. 프리킥 능력도 보유하고 있어서 장거리 프리킥을 맡아 차기도 했다.[24] 애초에 무결점 스트라이커라는 별명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플레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료와 협업 플레이를 중시했던 그는 위치를 가리지 않고 뛰었으며 골 욕심이 크지도 않았다. 실제 1:1 찬스를 동료인 인자기에 넘기는 장면을 보이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인터뷰는 "인자기가 컨디션이 좋아서"였다.
운동능력 또한 사기었던 시절은 이 분야 최강자 중 하나인 다비즈조차도 셰브첸코 앞에서는 한수 접고 들어갔을 정도.[25]
무결점의 스트라이커라 불리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멀티 포지션 능력과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다. 소련 축구계의 명장인 발레리 로바노브스키 감독에 의해 육성된 셰브첸코는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위치에서 포지션 소화하는 법을 사사 받았고, 그 결과 공격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플레이를 수준급으로 해낼 수 있는 선수로 성장했다.
원톱과 투톱 모두 능숙하게 뛸 수 있었고, 최전방에서 득점을 노리는 플레이와 보다 공격적인 파트너를 뒤에서 지원하는 처진 스트라이커 모두 가능했으며, 심지어 준수한 수비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속 스피드를 이용한 선수들이 종종 당하는 무릎 부상은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2001-02 시즌 리그 14골, 부상의 여파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2002-03 시즌 리그 5골은 많은 팬들의 우려를 낳는 결과였다.[26] 그러나 02/03 시즌 챔스 4강에서 만난 밀라노 더비에서 과거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며 골을 성공시켰고, 다음 해인 2003-04 시즌 세리에 A 득점왕과 발롱도르를 수상해 팬들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는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득점을 양산했는데, 이는 과거처럼 속도에 매달린 방법이 아니라 1선과 2선을 오가며 패스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이쯤 영입된 카카가 역습시 팀 스피드를 더해 과거보다 솁첸코의 스피드 부담이 줄었다.
리그에서는 꾸준히 20골 언저리를 기록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첼시로 건너가기 전 그는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의 기술적인 완성도와 반비례하는 피지컬 하락이다.
밀란은 멤버 서로가 서로의 특성을 잘 알아 손발이 맞고, 리그 적응도 필요없다. 팀 내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는 만큼 주전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러나 첼시는 당장 성과를 내야할 뿐만 아니라, 주전 경쟁이 기본이다. 프리미어 리그는 예나 지금이나 속도와 피지컬 다툼이 주로 언급되는데, 이에 대한 대비도 미흡했다. 더구나 그는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못했기 때문에 첼시의 팀원들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못했다. 부진과 부상, 적응 실패. 그리고 자신감 상실. 그의 이름과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그의 플레이가 수식됐고, 그는 잉글랜드에서 침몰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FC 디나모 키예프 (1994~1999, 2009~2012)
- 우크라이나 프리미어 리그: 1994-95, 1995-96, 1996-97, 1997-98, 1998-99
- 우크라이나 컵: 1995-96, 1997-98, 1998-99
- 우크라이나 슈퍼컵: 2011
- CIS컵: 1996, 1997, 1998
- AC 밀란 (1999~2006, 2008~2009)
- 세리에 A: 2003-04
- 코파 이탈리아: 2002-03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4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2-03
- UEFA 슈퍼컵: 2003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004; 3위: 1999, 2000
- FIFA 올해의 선수 3위: 2004
- UEFA 올해의 공격수: 1998-99
- FIFA FIFPro 월드 XI: 2005
- UEFA 올해의 팀: 2004, 2005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8-99, 2005-06
- 우크라이나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1996-97
- 우크라이나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1998-99
- 우크라이나 컵 득점왕: 1994-95, 1997-98
- 세리에 A 득점왕: 1999-2000, 2003-04
-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2000
- 세리에 A 올해의 골: 2004
- UEFA 슈퍼컵 맨 오브 더 매치: 2003
- 우크라이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97, 1999, 2000, 2001, 2004, 2005
- CIS컵 베스트 XI: 1997
- 팔로네 디 아르젠토: 2003-04
- 독립국가연합 올해의 축구 선수: 2004, 2005
- FIFA 100: 2004
- ESM 올해의 팀: 1999-2000, 2003-04, 2004-05
- 레키프 올해의 팀: 2004, 2005
- 골든풋: 2005
- AC 밀란 명예의 전당
6.3. 수훈
- Hero of Ukraine: 2004
- Commendatore dell'Ordine della Stella d'Italia: 2018
7. 셰브첸코에 대한 말, 말, 말
[image]
'''모든 스트라이커들에게는 각각의 특징과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솁첸코는 모든 걸 지니고 있고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있다.'''
'''동유럽의 호나우두? 호나우두가 남미의 셰브첸코입니다.'''
'''모든 빠르다는 선수는 다 잡아봤다. 하지만 그는 분명 같이 뛰었는데도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오로지 1명에게 당했다.'''
'''그가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상대팀에게는 공포다.'''
'''무결점의 스트라이커'''
'''우크라이나의 최고의 선수는 셰브첸코다.'''
8. 여담
첼시 FC 시절 존 테리를 응급처치로 살려준 것 때문에 "의대 지망생이었다.[30] 20살 때부터 축구를 했다."라는 루머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셰바는 10살의 나이로 FC 디나모 키예프의 유스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18살에 프로 데뷔를 한 선수다, 월간 포포투 2010년 10월호에 솁첸코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셰바는 키예프 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테스트에서 떨어지자 전차부대 대령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길 고민했다고 한다, 2달 뒤 FC 디나모 키예프의 1군 선수가 되자 테스트를 보지도 않고 입학시켜 줬다고...[31]
페르난도 토레스, 안드리 솁첸코처럼 부상으로 폼이 하락했다가 스타일의 변화로 롱런한 대표적인 선수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출신이자 유벤투스 FC의 카피탄이였던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있다. 알레의 경우엔 상기한 둘과는 달리 볼 컨트롤, 개인기 능력이 세계 정상급이기도 했고 애초에 이들처럼 최전성기이던 20대 초반 피지컬에 극도로 의존하진 않았다.[32]
호나우두, 티에리 앙리,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더불어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 해축팬들에게 4대 스트라이커로 통했다. 이 넷 중 누가 제일 뛰어나냐는 떡밥이 종종 던져지지만 보통은 호나우두를 맨 앞으로, 반니를 맨 뒤로 놓고 앙리와 셰바 중 누가 나은지는 키배로 번진다. 앙리가 EPL을 정복하고 말년에 라리가에서도 정상급의 활약을 펼친 반면 셰브첸코가 밀란 시절까지 보여준 퍼포먼스는 앙리에게 전혀 밀리지 않지만 첼시로 와서는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줬고 후에 밀란으로 복귀해서도 재기에 실패하면서 발롱도르를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비전문가를 통틀어 앙리보다 조금 낮은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국가대표 메이저대회 본선 무대에서의 활약상은 팀 전력을 감안해도 앙리가 솁첸코보다 압도적인 활약을 선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낮은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33]
어깨에 한자 정자체로 大龍이라는 문신을 새겼다. 셰브첸코가 태어난 해인 1976년이 용의 해라 새겼다고 한다.
한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부정하게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었다며 한국을 비난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본인은 그런 적 없다고 인터뷰에서 해명했다. 그러는 와중에 자기는 안정환에 대해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안정환에게 굴욕아닌 굴욕을 안겨주기도 했다.[34]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모국어로, 이탈리아에서 선수생활을 오래 한 탓에 이탈리아어도 수준급이었으나, 정작 영어는 잘 못했다.[35]
첼시로 이적한 2006년부터 가족과 함께 런던에서 살고 있으며, 둘째 아들이 첼시 유스에 입단했다고 한다.
8.1. 외모
이른바 첼시의 "고액의 이적료로 첼시에 온 180cm 이상의 잘생긴 백인 공격수는 망한다" 저주의 시작이었던 선수였던 만큼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다.
남자답고 매우 진한 이목구비의 전형적인 미남형 얼굴이다.
9. 둘러보기
[1] 2004년 수훈, 우크라이나 영웅 훈장 Герой України[2] /ɑndˈrij mɪkoˈlɑjovɪt͡ʃ ʃɛwˈt͡ʃɛnko/. 선수의 우크라이나어식 이름은 '안드리 미콜라요비치 셰우첸코'이며, 러시아어식 이름은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Шевче́нко'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솁첸코'이다. 선수 본인이 우크라이나어식 이름을 선호하는지 러시아어식 이름을 선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일단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기에 우크라이나어식 표기를 쓰기로 한다.[3] 참고로 러시아어식 표기에서 쓰이는 '솁'은 완성형에 없는 글자이다. 그래서인지 이 기사처럼 깨지는 경우가 있다.[4] 스트라이커[5]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6] 축구잡지 포포투의 인터뷰에 의하면 경기 전에 해트트릭을 하면 친구가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을 했다는데, 정말로 악착같이 해트트릭을 하고 거하게 얻어먹었다고 한다. 시즌 중에 카니발에 놀러가고 싶어서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한 호마리우가 연상되는 일화.[7] 세리에 A 역사상 데뷔시즌 외국인 득점왕은 과거 유벤투스의 미셸 플라티니 前 UEFA 회장과 셰브첸코 뿐이다.[8] 다만 해당년도 셰브첸코의 수상에 대해서는 2001년의 마이클 오언의 수상과 함께 FIFA 올해의 선수상과 통합되기 이전까지 발롱도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2003-04 시즌 리그와 함께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FC 포르투의 언더독 신화를 이끌면서 더블을 달성하고 유로 2004에서도 주전으로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메이저대회 준우승을 이끌고 UEFA 올해의 클럽 선수상, 클럽 미드필더상을 동시에 수상한 데쿠나 2003-04 시즌 EPL로의 명칭 변경 이후 2021년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아스날 FC의 무패 우승을 이끌고 리그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 PF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등 EPL 내에서 받을 수 있는 개인상은 모두 차지한 티에리 앙리가 더 적합했다는 의견이 컸었다. 실제로 셰브첸코는 이 시즌 우승 기록이 세리에 A 하나와 리그 득점왕이 전부였고, 심지어 리그 득점수도 24골로 같은 시즌 30골을 넣은 앙리보다 적은 편이었다.[9] 셰브첸코는 선수 시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두 번 경험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 모두 승부차기의 마지막 키커를 맡았다. 2003년 유벤투스와의 대결에서는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을 확정시켰지만, 2005년 리버풀과의 대결에서는 상술했듯 슈팅이 막히며 즉시 리버풀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10] 하지만 셰바의 팬들은 이 별명을 싫어한다고 한다. 셰브첸코가 호나우두 못지않은 대단한 선수인데도 2인자로 전락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고.[11] 카를로 안첼로티는 연습 때 종종 선수들의 포지션을 변경해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솁첸코는 수비수의 위치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고 했다.[12] 하지만 정작 밀란도 최종 승자라고 하기는 힘든 게 이 시즌 솁첸코의 후계자를 제대로 찾지 못했는데 솁첸코의 대체자를 기대하고 영입한 히카르두 올리베이라는 폭망, 게다가 전 시즌 셰바의 파트너로 좋은 활약한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도 부진했고 팀의 중심은 카카로 옮겨갔다.[13] 사실 당시에는 그야말로 유럽을 호령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던 솁첸코가 다이버 별명을 얻으며 뽀록바로 조롱받던 드록바보다 나은 활약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14] 예를들어 칼링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4부리그 위컴과의 준결승에서 골을 넣자 '칼링첸코', '4부첸코'라는 별명이 붙었다.[15] 기절한 상태에서 혀가 말려 넘어가 기도를 막지 않게 혀를 잡아주는 방식[16] 이 사례가 위기탈출 넘버원에 방영됐었다.해당 방송 영상[17] 에베 산(Ebbe Sand)과 더불어 월드컵 유럽예선 득점 공동 1위[18] 이골이 월드컵 데뷔골이다.[19] PK 결승골[20] 하나는 크로스바를 강하게 때린 실축이다.[21] 월드컵에 처녀출전해서 8강 이상 진출한 팀은 90 카메룬, 98 크로아티아, 02 세네갈이 있다. 이중 크로아티아는 4강까지 올라갔다.[22] 개최국 자동출전[23] 셰브첸코와 비슷하게 운동능력을 활용한 테크니션었으나 운동능력을 잃고 기량이 급격히 하락하며 전성기 시절의 절륜한 테크닉조차 투박했던 것으로 절하되는 케이스가 AC 밀란 시절 동료였던 카카다. 다만 테크닉 대 테크닉으로 비교하자면 카카가 훨씬 화려하고 정교하기는 했다.[24] 단거리는 안드레아 피를로가 찼다.[25] 참고로 다비즈는 유벤투스 중원에서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원을 씹어먹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선 호나우두보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호나우두를 따라잡아 1:1 찬스를 커버하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보여준 선수였다.[26] 이 때 당시 그는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부상도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은사이자 정신적 지주인 발레리 로바노브스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흔들릴수 밖에 없었다.[27] 셰브첸코를 10대 때부터 지도하고 성장시킨 은사로 세브첸코의 축구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8] 위에 언급한 내용을 대변하듯이 다비즈는 셰브첸코가 가진 운동 능력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29] 아이러니한 것은 요한 크루이프가 셰브첸코의 급격한 폼 하락을 예언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30] 정작 의사 출신 축구선수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황금의 사중주의 주장이었던 소크라치스였다.[31] 입학 테스트에서 코치 몇명이 자신의 드리블과 다른 몇가지가 마음에 안들어 떨어졌다고 한다. 이 부분만 봐도 의대를 지망했다 라는것은 거짓임을 알 수있고, 어려서 부터 복싱, 레슬링, 아이스하키도 할 정도로 스포츠 중독이었다고 한다.[32] 하지만 알레 또한 부상 전 압도적인 스피드를 활용하여 수비수들을 터는데 매우 능하였다.[33] 단 디나모 키예프에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스날, 바이에른 뮌헨 등 유럽 빅클럽들을 상대로 선보인 활약과 챔스 득점왕 2회(1998-99, 2005-06 시즌) 등 유럽대항전에서의 퍼포먼스면에서 앙리보다 셰브첸코를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34] 한국 기자가 "당신이 했던 비하는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길 수 있었던건 홈어드벤티지였고, 당시 AC 페루자 칼초에서 뛰던 이류선수 안정환의 골로 이탈리아가 탈락했다는 내용이었다" 라고 하자 셰브첸코는 "저는 안정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라고 했다.[35] 정작 세브첸코처럼 영어를 잘 못했던 카를로스 테베스는 득점왕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