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

 


'''신성모 장관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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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국방부 장관
신성모
申性模 | Shin Sung-mo
'''
<colbgcolor=#dd0000><colcolor=#FFFFFF> '''출생'''
1891년 5월 26일
경상도 의령현#
(現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
'''사망'''
1960년 5월 29일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이대동대문병원[1]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4
'''본관'''
고령 신씨[2]
'''호'''
소창(小滄)[3]
'''재임기간'''
제2대 내무부 장관
1948년 12월 24일 ~ 1949년 3월 20일
제2대 국방부 장관[4]
1949년 3월 21일 ~ 1951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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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dd0000><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신재록[24], 어머니 김해 김씨 '''친인척''' 사위 이학림 '''학력'''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
상하이 오송상선학교 (항해학과 / 편입)
남경해군사관학교 (졸업)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대종교·천도교
'''경력'''
영국 정기여객선 선장
임시정부 군사위원직
대한청년단 최고위원
대한청년단장
교통부 자문위원
제2대 내무부 장관
제2대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주일본 수석공사
제8대 한국해양대학 학장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군사 경력'''
'''임관'''
중화민국 난징해군군관학교 (기수 불명)
상선사관
'''복무'''
중화민국 해군
1915년? ~ ?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해군)

1. 개요
2. 생애
2.1. 해방 전
2.2. 해방 후
2.2.1. 국방장관
2.2.2. 6.25 전쟁 초반부의 병폐 행각
2.2.3. 말년
2.2.4. 사후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950년 6월 17일 38선 부근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왼쪽부터 유재흥, 존 덜레스,[5] 신성모.)[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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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2대 국방부 장관.
해방 이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었기에 낙루장관(落淚長官)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 생애



2.1. 해방 전


신성모는 1891년 5월 26일 경상도 의령현(현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에서 아버지 신재록(申載祿)과 어머니 김해 김씨[7]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5대조 신성제(申聖濟)가 6대조 신급(申汲)에 입양된 이후 아버지를 포함한 직계 선조가 모두 무녀독남으로, 신성모 또한 6대독자로 태어났다.[8]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신채호안희제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상하이에서 중화민국 해군총장 겸 오송(吳淞)상선학교 교장 싸전빙 제독의 허가로 오송상선학교 항해과에 특별입학하였다. 이후 난징해군군관학교로 전학하여 졸업 후 중화민국 해군 원수부에서 소위로 복무하였다. 이후 해사 쪽에서 일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를 맡았다. 이때 그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에 대해서 이승만을 탄핵하는 입장에 섰다.
1921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식 이름인 신철을 받았으나 이중신앙을 허용하는 대종교 특성상 천도교도 믿게 되었다.[9] 후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선에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석방되고 런던으로 유학, 1923년 에드워드 7세 항해대학에 입학하여 1등 항해사 자격을 얻고 선박 분야에서 일하다가 1939년 선장 면허를 취득하고 인도 제국으로 이동하여 뭄바이의 상선회사 고문으로 일했다. 신성모의 인도 시절은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유족들은 뭄바이랑 반대 방향인 콜카타에서 살았다고 잘못 기억할 정도로 신성모가 무슨 회사에서 일했는지도 자료가 안 남아 있다. 이유가 신성모의 6.25 당시 행적 때문에 아무도 신성모를 연구할 생각을 안 했기 때문(...). 해방 후 허정의 추천으로 1948년이 되어서야 환국하였다.
[image]
상선사관 시절로, 견장으로 보아 선장 진급 이후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이 이 사진 띄워놓고 "군대의 군자도 모르게 생긴 뱃놈을 국방장관에 올리다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상선사관의 경험이 군대와 맞지 않는 것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 상선사관을 양성하는 해양대학교가 거의 해군사관학교와 구분 안갈 만큼 생도 생활을 하고, 배에선 말단 선원들부터 선장, 기관장까지 해군에 준하는 위계질서와 통솔, 근무 환경 등에서 사는 점 등을 고려해 봐야 한다. 당장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한국 해군의 창설멤버 거의 대부분은 상선사관 출신이었고[10] 미국은 아예 미국상선단사관학교라고 상선사관들에게 해군, 해안 경비대, 해병대 등의 예비대 소위 자격을 주며, 일부는 예비역이 아닌 현역 임관도 가능하다.[11] 게다가, 신성모는 위에서 언급했듯 짧게나마 해군 장교(소위)로 근무한 군복무 경력자이며 인도 상선회사 고문 자리에 대해서 진짜 단순히 뱃놈한 것으로 무시를 당하지만, 당시 상선들이 해치고 다녀야 했던 해역이 '''태평양 전쟁''' 한가운데의 피튀기는 전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신성모는 사실상 전시 업무를 일부 수행한 것이다. 역시나 포병, 보급, 군사교육의 전문가였던 채병덕이 육참총장이라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서는 직책을 맡아야 했다가 삽질한 전례를 생각해보면 이 양반도 해군이나 수송 분야만 전담했으면 이 정도로까진 안 망가졌을수도.

2.2. 해방 후



2.2.1. 국방장관


1947년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었다. 그 당시는 해방 이후라서 독립운동가들을 띄워줬는데, 그 과정에 그도 띄워졌다. 그리고 1948년 11월에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이때 '''신성모 제독'''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해군 중장 계급도 부여되었다. 물론 그는 영국 상선선장을 지낸 후 인도 상선회사 고문으로 있었을 뿐.[12] 굳이 핑계를 대자면, "Admiral"이라는 단어에는 상선 여러 척을 거느린 선주라는 뜻도 있긴 하다. 제독 문서 참조.
귀국 후 그는 친이승만 인사가 되었다. 국내 기반이 전혀 없던 그는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했다. 그리고 그 후 1년 동안 내무부장관, 국방장관으로 승진했다.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며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낙루장관, 즉 눈물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육군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은 신성모가 김구 암살의 배후일 거라고 회고록에 지목한 바 있다. 이어서 군부에서는 그 암살이 한국독립당(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일인 것처럼 꾸미려고 했다고도 한다. 이건 걸러서 들어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장흥 본인이 임시정부 출신[13]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 암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3일 뒤에 교체되었다. 장흥 자신은 다음날 해임되었다고 주장한다.

2.2.2. 6.25 전쟁 초반부의 병폐 행각


문제는 명색이 국방부장관이면서 '''국방에 대한 개념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고, 하필이면 그의 재직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 게다가 그를 보좌하는 육군참모총장이라도 유능하면 퉁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 육참총장마저도 하필이면 똥별로 악명높았던[14] 채병덕이었다. 그의 잘못된 처신은 6.25 전쟁 초기에 한국군이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한편으로 아군 피해가 속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애초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자리에 있었다지만 지청천, 이범석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광복과 귀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된 일만 했기 때문에 군사 쪽에 대해 아는 건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보다 없었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부에서 일했었지만 해당 업무를, 그것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경험 자체는 거의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국방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6.25 전쟁 직전까지 북진통일 발언을 무책임하게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49년 7월 17일에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실제로 이승만과 수뇌부들은 호남선 기차를 타고 대전, 익산, 목포로 가서 목포에서 해군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15]
직위가 직위이고 대북관련 사안이라 38도선 접경지대에서 북한군과 한국군의 국지전이 수시로 벌어졌고,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자 '''오해다'''라고 해명했으나 그해 9월에 "때가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부산까지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신성모의 헛소리는 후에 북한이 남한의 북침설을 내세우는 떡밥이 되었다. 6.25 전쟁전의 남과 북의 전력 그리고 멍청한 신성모 국방장관 그런 놈이 정작 그 이듬해 여름에는 전쟁준비는 커녕 육군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 그것도 전방부대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들을 장교클럽에 모두 모아놓고 술파티나 하고 자빠졌다. 당시 일부 장성의 증언에선 이후에 북한 스파이인 것이 발각되어 사형된 장성이 이때 파티 비용 전액을 지불했다고 하는 내용도 있다. 진짜라면 간첩 입장에선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왔을 듯. 아무튼 저렇게 발언했으면 오히려 전방부대를 중무장시켜야 말과 행동이 맞는 건데, 말은 저렇게 해놓고 행동은 지휘관들을 빼다가 술파티를 벌이고 있었으니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휘관으로서는 실격이다.
더욱이 군사능력의 부재로 예비전력을 자기 마음대로 해체해버렸다. 1949년 바로 징병제 핑계를 대면서 한국군의 예비군 전력인 호국군의 존재를 해산시켰는데, 문제는 6.25 전쟁 전까지 국회에서 병역법에 의거한 의무병역제도 법률이 제대로 통과가 안 되고 있었던 상황인데 2만 명의 육군 예비전력을 자기 마음대로 해산시켜버리고 예비전력으로 신설한 게 바로 청년방위대였다. 문제는 이 청년방위대는 호국군처럼 예비군이나 즉흥 예비전력이 될 수 없는 정치조직에 가까운 오합지졸들이었고, 정작 6.25 전쟁 때 이들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게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의 북진통일론과 별개로 한국군 내부적으로는 이미 수세적인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계획 제38호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이 계획도 세부적으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다 1950년 3월에야 계획이 세워져서 실행에 옮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으며 현실반영도 별로 안 되었고[16], 내용 자체도 '잠깐 물러났다가 단시일 내에 실지를 회복하고 북진'이라서 해당 계획에 끼친 신성모의 악영향이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전쟁 발발 전에는 이런 저런 단체들을 반강제로 통합하여[17] 만든 대한청년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추대했고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고 선언문에 썼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악한 채병덕이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에 채병덕은 가회동에 살고 있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모의 소재를 물었는데, 이때 신동우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채병덕은 신동우를 불러 신성모의 집으로 안내하게 한 다음 신성모에게 직접 상황을 보고했다. 그때가 아침 7시였는데 신성모는 일요일에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10시 30분, 신성모는 이승만을 찾아가서 북한군이 이미 1시간 전에 개성을 함락시키고 탱크를 앞세워 춘천을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이 놀라서 "국군에는 탱크를 막을 수단이 없지 않은가?"하고 혼잣말을 하자 신성모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란 말을 되풀이하며 이승만을 안심시켰다.
결국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해 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2011년 9월 4일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에서 등장한 퇴역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에 의하면, 신성모가 전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놓고 대정부 겸 대국민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육군이 38선 부근에서 분전하면서 북진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중요한 건, 불리했던 전세를 '''이승만에게만 보고했다는 것'''이고, 그걸 들은 이승만은 27일 대전으로 튀어버렸다.
그리고 남하 저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한강철교한강대교 폭파(!), 철교와 대교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되어야하긴 했으나, 신성모가 너무 빨리 폭파한 탓에 국군의 후퇴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서 신성모가 까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육군 공병최창식 공병대령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에게 다 떠넘겼다... 채병덕 장군은 온갖 욕을 먹은 결과 보직해임 후 하동 방면 전선에서 전사했고, 최창식 대령은 '''단지 신성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총살당했다. 자세한 내용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이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했고 심지어 다수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요인들과 김규식 등의 저명인사들도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저명인사들이 납북되거나 적 치하에서 학살당했고 가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서부전선의 한국 육군 사단들이 와해되어 버렸다.[18] 훗날 김홍일 장군이 지휘하면서 버티던 한강방어선에서 소집되어 투입한 한국 육군의 낙오병력은 한강교 폭파 전 기존의 전선에 배치된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장비는 거의 모든 중화기를 상실해서 개인장비만 간신히 갖춘 상황이었는데, 이는 북한 쪽에서 대규모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하는 형태의 전과를 만들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정도만 해도 당연히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사안이지만, 비슷한 병폐를 저지른 채병덕 장군이 패전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19]에 비해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삽질은 어디가지 않아서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합리화하였다는 대한민국 국회의 비판을 받았고, 곧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신성모가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에서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는데, 국방부장관이라는 직위에 따른 책임도 있었지만,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신성모가 단장으로 이끌었던 대한청년단 단원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20] 하지만 후안무치하게도 사건 수사를 방해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하였다. 예를 들자면 국민방위군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그들을 재판하는 군사재판장마저 자기 친구로 임명하여 봐주게 했다거나 등. 하지만 수만 명의 청년을 굶겨죽인 것에 비해 형량이 너무 낮게 나와[21]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직에서 사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기붕이 임명되었다. 문제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위를 살려보려고 했는지 당시 여론은 "사위 김윤근을 신성모가 빼돌릴 것이다."라는 소문이 쫙 퍼져있어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이 직접 이례적으로 군사법원 판결과정을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하여 그대로 공개를 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공개처형을 실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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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외 5명의 총살형 집행 순간이다.
또한 자기 위신을 생각하여 백골병단을 제대로 된 훈련이나 장비 지급 없이 대충 만들어서 아군병력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2011년 9월 11일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에서 등장한 채명신 장군에 의하면 당시 북쪽에서 남파공작원들이 들어와 피해가 발생하자 UN군 등에서 왜 한국은 북한처럼 못하냐라는 질책과 비웃음 등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신성모는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신 때문에 우리도 대규모 유격대가 들어간다라고 허장성세와 허풍을 쳐놨고 그렇게 해서 '''대충''' 만들어진 백골병단에 채명신 대위가 가게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당시 채명신 대위가 지휘를 제대로 해서 소모품 수준밖에 안 되는 부대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즉 살아남은 것 자체가 다행인 수준.
이처럼 전쟁 내내 국방장관으로서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병폐들을 잇달아 저질러 오늘날 '국방장관에 민간인 출신이 가면 안 된다'라는 편견을 만든 장본인이다. 뭐, 장성 출신이라고 사고를 안 쳤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문제는 이 인간이 하도 사고를 많이 쳤다는 것.

2.2.3. 말년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한 후 주일대표부 대사에 임명됐으나[22] 병환으로 인한 입원으로 거의 일을 하지 못한 채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6년부터 한국해양대 8대 학장을 역임하다가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지 얼마되지 않아 충격을 받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언은 "훗날 역사가 말할 것이다."였는데 신성모는 관련 학살에서나 부차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이지 그의 독립행적에 대한 단독 연구도 2018년에야 겨우 논문 한편 나올 정도로 묻혀버렸다.

2.2.4. 사후


1990년에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1993년 10월에 의령군 용덕면에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3. 평가


산성모는 처음부터 전투경력이나 지휘경력이 전무한 채병덕을 참모총장에 앉힌 장본인이며, 이와 같은 낙하산 인사, 본인의 군사적인 무능함, 부정부패, 한강대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인해 국방장관으로서의 행적은 옹호해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너무나도 많은 병폐를 일으킨 나머지 뉴데일리 같은 곳에서조차 이름이 금기시되고 있으며, 오히려 이쪽에서는 신성모를 '''북한에서 보낸 고도의 간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육사 8기생들의 회고록에서도 채병덕, 신성모 라인의 간첩설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그나마 말과 행동이라도 일치하면 욕이라도 덜 얻어먹을 텐데 북진통일을 하자는 자가 정작 병력조련을 게을리한 데다가 심지어는 전방을 지키고 있어야 할 지휘관들을 불러다가 육본 장교클럽에 모아놓고 술파티를 벌이는 등 신성모의 병폐는 결과적으로 북한을 도발시키기만 했을 뿐 국방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신성모가 간첩일 확률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한 국가의 현직 국방부장관인 인물을 포섭하려면 북한이 뭘 미끼로 던져주어야 할 지 생각해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게다가 북한 입장에서 봐도 위에 언급한 병폐를 저지른 인물을 막대한 대가를 주고 굳이 영입할 필요가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어차피 영입 안해도 알아서 삽질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간첩설까지 나돌 정도로 신성모의 병폐와 삽질은 심각했다. 따지고 보면 신성모 덕에 김일성은 6.25 전쟁 초반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므로 김일성이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실제로 당시 계인주 대령이 신성모 국방장관을 북한의 이중간첩으로 의심했다는데 이건 본인이 적전도주한 뒤 변명하는 것에 가깝다. 당장 계인주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사령관이었으나 뚜렷한 이유없이 작전 구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구에 나타났다. 원래 사형당해야 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중간에서 호송차 탈취 후 어찌저찌 미군 특수전 요원으로 싸웠다. 계인주가 남겨놓은 부하들중 둘은 김포지구가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참고로 계인주는 죽을 때까지 이때의 일을 사죄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살면서 이름만 들으면 아시는 정치인의 미국 망명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그런데 2009년에 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해기사 명예의 전당을 준공하면서 신성모를 최초로 선정하고 흉상 조형물까지 헌정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원인은 의외로 진지하였으니,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해당 이시형 박사와 함께 헌정된 이유는 그가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Extra Master[23]을 취득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 태동기에 있던 한국 해운업이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한 업적 때문이다. 국가 기반사업 육성 차원에서 정부의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던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에 흡수될 뻔한 것을 막은 것도 이 사람. 만일 당시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와 통합되었다면, 역시 지원금 문제로 해군사관학교와 해양대학이 통합되어 있는 필리핀으로부터 볼 수 있듯이 해군도 해운업계도 망조를 탔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해기사협회와 항만청 측에서도 신성모의 병폐를 인정하였고 논란 역시 많았으나, 정치가 신성모와 해기사 신성모는 별개로 보고 해기사로서의 공과만을 평가하기로 한 결정 끝에 헌정자로 결정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해양사를 평가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특유의 연공서열과 기수에 묶여 있는 데다 일반의 관심도 없고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도 몇 안 되는 상황 때문이다. 결국 인재가 없고, 누굴 선정하더라도 논란을 못 피하는 상황. 따라서 이 사람을 어쩔 수 없이 헌정자로 올릴 수밖에 없던 셈.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민통제를 추진하는 데 큰 장애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문민통제를 반대하는 측에서 자주 예시로 드는 인물. 문민통제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이 인물을 언급하며 '문민통제는 필요하지만 이런 자가 등장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할 필요 또한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진수가 맡았다.
  • 1989년작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선 배우 양택조가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김정태가 맡았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김영선이 연기했는데, 상세 내용은 신성모(야인시대) 참고.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박용식이 맡았는데, 50회 긴급각료회의 장면에서 등장했다.

5. 관련 문서


[1] 2008년에 폐원되었으며 현재 한양도성 성곽이 복원되어 공원화되었다.[2] 정은공파 21세손 모(模) 항렬.[3]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사창(沙滄)으로 오기되어 있다.[4] 재임기간 동안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50년 4월 21일 ~ 1950년 11월 22일)[5] 미 국무부 고문 자격으로 방한했으며, 국무장관이 되는건 1953년이다.[6] 금성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책에도 나오는 사진으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표지로도 쓰였다.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 '''북침을 모의하는 미 국무부 덜레스놈과 남조선 괴뢰국방군의 모습'''이라고 선전한다.[7]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김해 김씨는 보이지 않고 다만 신재록의 부인으로 인천 이씨만이 등재되어 있다.[8] 참고로 아들 신명구(申明求)까지도 7대독자였다.[9] 이 때문에 영국에서 천도교 활동도 꽤 했지만 나중에 천도교였다는 사실이 싹 묻혔다. 천도교 교단에서는 정말 다행이다 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10]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학을 일본해군병학교에서 폐교시까지 거부한 데다, 수병도 1943년에서야 조선인 지원자를 받았다. 전쟁 말기에 그나마 2선급 장교로 취급된 비행연습생 정도만이 개방됐으나 대부분 종전으로 임관 못했다. 다만 손원일 제독의 회고에 따르면 해군 창군멤버 중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 일본 해군병학교에 입학해 소좌까지 진급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나 예외 중의 예외적 케이스다(일본해군의 사관양성기관으로는 해군병학교 외 해군기관학교와 해군주계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 출신 조선인이 있었는지는 차후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수병과 하사관도 전부 육전대나 지원부대, 항공대에만 배치해서 일본 해군 출신들 대다수가 배에 대해 무지했기에, 자연히 상선사관 출신들에 밀려 대다수가 해병대 창설시 그쪽으로 빠졌다.[11] 한국해양대학교도 원래 총원 해군 ROTC 제도를 운영했으나, 80년대에 거의 폭동에 가까운 폭력투쟁으로 이를 철폐해 현재는 희망자만 입단한다. 군사문화 타파라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 같은 기간 군함보다 돈 '''훨씬''' 많이 받는 상선에서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대체복무를 하는 게 박봉에 근무 여건도 안 좋은 해군 장교 생활보다 나았기 때문에 저지른 짓이다. 이래놓고 후배들에겐 이런 흑역사 안 가르쳐서, 지금 후배란 것들은 왜 미국 해대는 예비역 해군 장교 다 시켜주는데 자기들은 안 주냐는 개소리를 수시로 하고 있다.[12]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신성모 항목.[13] 국민혁명군 육군 군관이었다가 넘어왔다.[14] 정확히는, 자신의 전공(병참, 군수행정)과 거의 상관없는 고위직에 앉아 있었던.[15]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도망친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으로의 밀항은 이른바 '돼지몰이'로 불렸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 원까지 올라갔다. 밀항을 위한 배를 빌리는 돈은 500만 원에서 1천만 원까지 이르렀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105쪽[16] 육본에서 계획을 내려보내면 각 사단이 이를 받아 다시 사단 단위의 작계를 짜야하는데 시간이 없다.[17]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이범석, 장택상 등의 각 정치가들이 자신을 따르는 청년들을 모아만든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의 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를 죄다 통합시켰다.[18] 사실상 이들은 동부전선의 육군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한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가용 병력이었다.[19] 사실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기보다는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에게 채병덕의 보직해임을 요구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20] 국민방위군 사령관이던 김윤근은 아예 신성모의 사위였다.[21] 부사령관만 고작 5년형이 선고되었다.[22] 정식 외교관계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 대사는 아니다.[23] 지금도 존재하는 영국의 명예 선장 면허로, Extra Master가 모는 배는 보험료 감면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신성모의 약력을 다룬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등 항해사'라는 표현은 Extra Master의 오역으로 보인다. 1등 항해사로 번역되는 직책은 Chief Officer이며 신성모는 해당 자격을 1923년에 이미 땄으며 이후 16년이나 더 걸려 Extra Master가 된다. 이 자격은 진짜 쉽게 따는 거 아닌데, 신성모는 중화민국 해군 복무 경험에 영국에서 대학을 나오고도 한참을 영국배에서 항해를 하고 나서야 이 자격을 취득했으며, 해방 후 미국인 고문들도 당신 학교는 나왔소?라는 식으로 무시하다가 신성모가 영국에서 Extra Master 자격을 땄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자세를 고치며 "sir"이라고 불렀다고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