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안토니아
1. 소개
'''Antonia Minor/Julia Antonia'''
'''BC 36 ~ AD 37'''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황족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 장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매 중 차녀로 본명은 율리아 안토니아(Julia Antonia)였다. 동복언니와 풀네임인 율리아 안토니아가 똑같은 이유 탓에 통상적으로 동생 안토니아를 서구권에서는 '안토니아 더 영거'(Antonia the Younger), '안토니아 마이너'(Antonia Minor)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통칭을 번역할 때 편의상 첫째를 대(大) 안토니아, 둘째를 소(小) 안토니아라고 구분해 부른다.
외삼촌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외숙모는 초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였으며, 남편은 로마 제국의 장군, 정치가, 행정가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였다. 따라서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남편 대 드루수스의 동복형이므로 시숙(시아주버니)이 되었다.
남편 대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게르마니쿠스와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였으며, 딸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리빌라였다. 손주로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5대 황제 네로의 친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 등이 있었으며, 외손자로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있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로마 내전 당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상호 우호 등을 위해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런 연유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친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낳은 두 딸 중 차녀가 바로 소 안토니아였다. 아들과 손자가 연이어 황제가 됐고, 소 안토니아 본인이 생전 여러 존칭을 받으며 사후에는 아우구스타의 직위를 받은 이유 때문에, 출생일이 명확하지 않은 언니 대 안토니아와는 달리 태어난 장소와 생일 등이 상당히 자세히 알려져 있다.
소 안토니아는 BC 36년 1월 31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율리아 안토니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직후 부모는 이혼했고, 친아버지 안토니우스는 인지를 해줬다. 그러나 말 그대로 로마법상 “내 친자가 맞다”는 인지통보였다고 하며,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 모녀에게 무관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소 안토니아는 태어난 직후부터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소 안토니아의 외삼촌 옥타비아누스와 악티움 해전에서 맞붙어 패배한 뒤 기원전 30년 8월 1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이때 안토니우스파와 화해하고, 내전 당시 분열을 더 이상 없게 하려는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선언에 따라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어머니 옥타비아, 이부오빠 마르켈루스, 이부언니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자매, 동복언니 대 안토니아 그리고 이복 오빠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외삼촌 부부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일원으로 모두 거둬들여졌다. 하지만 이 선언 전부터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와 그 자녀들을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중 가족으로 받아들인 뒤 보호자가 되었고, 누나 옥타비아가 낳은 자녀들을 자신의 친자녀로 생각해 많은 정을 쏟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아버지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유언장을 통해 옥타비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에게도 유산을 상속해준 까닭에 소 안토니아는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일대의 부동산을 어린 나이에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상속받아 보유한 부동산들은 훗날 그녀를 로마에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부인으로 만드는데 큰 일조를 했다.
2.2. 결혼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정숙하고 교양이 풍부했으며[3] , 뛰어난 미녀이면서도 여장부다운 성격과 자제력, 책임감이 대단했던 까닭에, 어머니 옥타비아와 아우구스투스 부부 모두에게 유독 예쁨을 받았다.
특히 친자녀가 외동딸 율리아 밖에 없었던 외삼촌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가 낳은 조카들을 친자녀처럼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조카인 소 안토니아를 아주 아꼈다. 이는 외숙모 리비아 드루실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남편처럼 소 안토니아를 예뻐했던 그녀는 정치적 이유와 소 안토니아가 갖고 있던 여러 자질 때문에 일찌감치 소 안토니아를 자신의 둘째 아들 대 드루수스의 배필로 점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리비아는 결혼 결정권을 쥐고 있던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꾸준히 설득해 두 사람을 결혼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소 안토니아는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이 되자 그녀보다 3살 위였던, 외삼촌의 양아들이자 외숙모의 둘째아들인 대 드루수스와 결혼했는데, 이는 다른 정략혼과 비교해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가 진짜 적게 나는 편의 결혼이었다고 한다[4] . 이때 소 안토니아는 정략결혼으로 대 드루수스와 결혼했음에도 남편과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하며, 남편의 임지가 있는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으로 함께 떠나 아이들을 낳고 손수 젖을 먹이고 키워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5]
첫 아이였던 게르마니쿠스는 남편 드루수스가 공식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둔 해에 로마에서 낳았다고 하며, 다른 자녀들은 모두 남편의 임지인 갈리아의 도시 루그두눔에서 낳았다. 하지만 안토니아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겨우 26살이었을 무렵, 남편 드루수스가 29살의 나이에 개선식을 앞두고 게르마니아 땅에서 낙마사로 요절하면서 끝나게 됐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남편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으며, 다섯 자녀 중 세 자녀(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리빌라) 만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안토니아 부부의 자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가족으로 로마인들과 원로원 모두 인정한 만큼, 아들과 손자, 외증손자는 모두 티베리우스 사후 연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고 '''카이사르 가문'''이라고 불렸다. 이들이 바로 칼리굴라(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셋째 아들), 클라우디우스(소 안토니아 부부의 막내아들), 네로(입양손자이자 장남의 외손자)였다.
2.3. 딸 리빌라와의 대립과 충돌
남편 대 드루수스와 사별한 이후, 로마로 돌아온 조카에게 외삼촌 아우구스투스는 수 차례 재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소 안토니아는 황제였던 외삼촌의 강압적인 명령을 모두 거부한 채 아이들을 홀로 키웠다. 이때 다른 황족 여성들이나 상류층 귀부인들과 달리 어떤 뜬소문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정절을 지켰고, 본래 여장부다운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어떤 정치적 음모나 사건에서도 유독 자유로웠다. 따라서 안토니아는 남편과의 사별 후에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두 황제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인질로 유학온 동맹국 왕자들과 게르만 족장들의 아이들의 기숙사로 그녀의 저택 일부가 선정돼 그녀가 살아있던 시절 내내 인질들의 기숙사로 이용됐다.
그러나 그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9년 10월 시리아 속주(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 남부)의 도시 안티오키아에서 요절했다. 이때 안토니아는 남편 사후 누구보다 의지하던 장남의 갑작스러운 요절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고 하며, 국장으로 열린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을 요청했을 당시에는 시아주버니 티베리우스와 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간곡한 반대로 장례식에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23년 9월 사위이자 조카인 소 드루수스가 집에서 급사한 이후, 황실 안팎에서 안토니아의 며느리 대 아그리피나가 반티베리우스 파벌을 구축해, 화해를 요청한 티베리우스와 계속 대립하는 가운데[6] , 안토니아의 딸 리빌라는 소 드루수스 생전부터 세야누스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불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소 드루수스 사후 2여년이 지난 25년, 리빌라는 세야누스를 통해 티베리우스에게 재혼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리빌라는 세야누스와 연인관계를 지속했고, 오빠 게르마니쿠스 생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새언니 대 아그리피나를 제거하려는 세야누스측의 움직임에 가담했다.
그 결과 세야누스의 전횡 당시, 딸 리빌라는 세야누스와 합심해 소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등 율리우스 일가 남성들을 제거했다. 이때 세야누스 일당은 리비아 드루실라 사후, 어떤 보호자도 없게 된 율리우스 가의 미성년자 가이우스마저 죽이려고 했다. 당시 안토니아는 시어머니이자 외숙모였던 리비아 드루실라 사후 손자 가이우스를 비롯해 게르마니쿠스의 세 딸 소 아그리피나(Agrippina the Younger), 율리아 드루실라(Julia Drusilla), 율리아 리빌라(Julia Livilla) 및 외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손수 돌봤고, 차남 클라우디우스가 두번째 부인과 이혼한 이후에는 차남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Claudia Antonia)[7] 까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뒤 혼자 힘으로 키웠다.
이때 세야누스파의 다음 숙청 대상이 된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는 할머니 안토니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세야누스는 안토니아 가족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런데 이런 감시속에서 안토니아는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똑똑하고 충직한 노예 팔라스에게 친필편지를 준 뒤 카프리 섬에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그녀는 시아주버니 티베리우스에게 죽은 남편 대 드루수스와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으며, 소 안토니아의 친필편지를 전한 팔라스 역시 마음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황제에게 모든 정황을 전하면서 이전까지는 마음이 꿈쩍하지 않던 티베리우스에게 큰 감동을 줬다고 한다. 따라서 안토니아는 이런 노력 끝에 서기 30년 막내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를 티베리우스가 있는 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보내 세야누스 일당의 음모에서 살릴 수 있었다[8] .
이후 세야누스가 31년 숙청되어 몰락했는데,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기 직전 “전남편 세야누스가 리빌라와 불륜관계를 맺고,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독을 먹여 급사하는 방식으로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따라서 소 안토니아의 친딸 리빌라가 했던 극악한 범죄들이 모두 드러나게 됐다. 이때 디오 카시우스 등에 따르면 분노한 티베리우스가 며느리 리빌라를 그냥 처형시키지 않고, 피해자이기도 한 소 안토니아에게 보내 처분을 맡겼다. 리빌라는 소 안토니아의 집으로 끌려 왔는데, 누구보다 믿었던 친딸이 저지른 악행들에 분노한 소 안토니아는 리빌라에게 그냥 자살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두 손자와 며느리가 고통받았던 방식 그대로 리빌라에게 되돌려줬다. 그래서 디오의 구체적인 기록에 의하면 안토니아는 자신의 앞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친딸 리빌라를 딸이 머물던 방에 가둔 뒤 물 한모금도 못 주게 하며 굶겨 죽였다고 한다.
2.4. 손자와의 충돌과 사망
서기 37년 소 안토니아가 목숨을 걸고 살린 손자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손자로부터 각종 영예를 선사받았다. 하지만 멀쩡하던 손자가 중병으로 쓰려졌다가 깨어난 이후, 고종사촌관계이자 공동제위계승권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의심해 처형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칼리굴라의 할머니이며 동시에 게멜루스의 외할머니였던 소 안토니아만이 게멜루스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열병 이후 권력과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게 된 칼리굴라를 막을 수 없었다. 눈 앞에서 친손자가 외손자를 죽이는 동족상잔을 보고 크게 상심한 안토니아는 얼마 안 가 화병으로 쓰러져 72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3. 사후 영예
안토니아의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이후, 그는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만이 생전에 누린 '''아우구스타(황후)'''의 명예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선사하고 매년 부모를 기리는 축제를 개최했다.
4. 성격 및 평가
상당한 미녀였음에도 생애 전반에서 보여지듯 안토니우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답게 상당한 여장부였다고 하며, 다른 또래 로마 귀부인들과 달리 공화정 초기의 전통적인 로마, 이탈리아 어머니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소 안토니아는 로마 내에서도 행실이 나쁜 외사촌언니 율리아와 많이 비교될 정도로 결혼생활 내내 남편 대 드루수스와 사이가 좋았는데, 26살의 나이에 남편의 요절로 홀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평생동안 그 흔한 남성과의 소문도 없었다. 따라서 조카에게 수차례에 걸쳐 재혼을 강요한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조차도 안토니아의 뜻을 알고 재혼 명령을 포기했고, 차갑고 잔정없기로 유명한 시아주버니 티베리우스는 동생 사망 후에도 조카들을 누구의 도움없이 홀로 책임진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리비아 드루실라의 며느리, 티베리우스의 제수씨, 칼리굴라의 할머니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소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시대 내내 로마 제국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황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평생동안 그 흔한 정치적 음모에서 늘 거리가 멀었고, 그녀가 굳이 나섰던 경우도 손자와 외손자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일 정도였다고 한다. 또 안토니아는 젊은 시절부터 남편이 남긴 세 아이들에게 기대치가 상당했는데, 몸이 편치 않은 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상당히 쌀쌀맞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에토니우스로부터 안토니아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학대했다고 까이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그녀의 막내 아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에 올랐고, 안토니아의 둘째아들은 그녀의 기대치 이상의 모습을 황제로서 보여줬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오늘날 평균 이상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안토니아가 자신에게 많은 정을 주지 않고 엄하게 대했어도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죽은 이후에도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리워했다. 이런 까닭에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친어머니의 아들 학대 및 폭언 이야기는 일부 이야기를 전체로 해석한 뒤 뜬소문을 사실로 포장한 그의 저술 스타일상 걸러들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태어나 티베리우스의 제수씨이자 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내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오랜기간 생존했음에도, 자신의 딸 리빌라가 사위 소 드루수스를 독살하거나 다른 손자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손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등 온갖 못 볼 꼴을 다 지켜봐야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따라서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주인공 클라우디우스에게 차갑게 대하면서도, 가문의 상쟁 등 여러 위기 상황에서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는 여장부로 묘사된다.
[1] 이탈리아 로마의 국립 로마 박물관에 있으며, 사후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노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2] 실제 소(小) 안토니아의 조각상과 차이가 있는 얼굴로 소 안토니아의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기린다는 의미로 주노 여신과 결합해 만들어진 조각상이다.[3] 로마인들에게 “교양이 픙부하다”는 기준은 정상적인 상식과 간단한 덧셈, 뺼셈과 같은 지식 외에도 모국어인 라틴어 읽기, 쓰기, 말하기 그리고 지중해 세계에서 통용된 그리스어 구사능력이었다.[4] 통상적으로 이 당시 로마 상류층의 정략혼에서 신랑, 신부의 나이는 적어도 10살 정도가 평균일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다. 그래서 초혼의 경우, 신부의 나이는 15~17살 전후였지만, 신랑은 초혼일 경우라고 해도 군복무를 마친 이후 결혼을 한 탓에 빨라도 20대 중반이었고 보통은 공직생활에 한참 접어든 나이인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5] 공화정 후기부터 로마 사회에서 소 안토니아처럼 남편을 따라 다니면서 같이 살고, 아이들을 유모, 가사노예들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젖을 먹이고 가정교육을 시킨 ‘전통적인 로마 어머니’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고 한다.[6] 안토니아의 며느리 아그리피나가 티베리우스를 겨냥해 집 안팎에서 대립했음에도 큰 사단이 나지 않은 이유는 소 드루수스가 양측을 잘 중재해주고 세야누스를 중심으로 한 파벌의 정치공작을 잘 막아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7] 상당한 미녀였다고 하며, 남편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였다. 조카뻘인 네로에 의해 남편이 인품이 좋고 인기가 많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해된 이후, 네로에게 재혼 요청을 받았는데 이를 거절했다가 반역죄 혐의를 뒤집어 쓰고 살해당했다.[8] 이후 안토니아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친필편지를 티베리우스에게 전하면서 가이우스를 살린 팔라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뒤, 그를 해방시켜줬다고 한다. 하지만 팔라스는 해방노예가 된 이후에도 안토니아와 그녀의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이전처럼 헌신했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로마 최고위 장관직까지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