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초토화
1. 개요
독소전쟁 중 나치 독일이 벨라루스에서 벌인 초토화 작전과 학살, 잔혹 행위. 초기에는 파르티잔 소탕을 위한 징벌적 학살이 만연했으며, 후기에는 민간인과 거주지를 모조리 파괴해 초토화시키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파르티잔 토벌은 핑계로, 목적은 처음부터 "게네랄플란 오스트"에 따른 제노사이드, 즉 레벤스라움에서의 '''완전한 슬라브인 절멸'''이었다. 토벌 작업은 독일 국방군과 SS와 경찰이 벌였으며, 1941년부터 1944년까지 140개 이상의 대규모 토벌 작전이 실시되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거나 절멸 수용소,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1년 7월, 점령 직후부터 이런 잔혹한 통치에 반발한 파르티잔 저항군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2. 토벌 작전
1941년 벨라루스를 점령한 독일군은 파르티잔의 저항에 곧바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1941년 7월, 무장친위대의 경찰 연대가 수많은 마을을 파괴했고, 8월에는 제221, 제286 경비 사단, 제162, 제252 보병 사단이 보그세브스키 인근 지역에서 벌어진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작전 단 한 번에 무려 13,788명의 민간인들이 처형되었다. 4396명이 학살된 1942년 3월 26일 밤베르크 작전, 12897명이 학살된 1943년 2월 8일 호르눙 작전 등 이러한 학살은 소련군이 벨라루스를 해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벨라루스에서 학살 정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바르샤바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이다.8월 25일. 사람이 있는 집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집은 쉽게 불이 붙고 빠르게 타오른다. 불은 다른 오두막들로 옮겨 붙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울었고,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이런 방식으로 벌써 마을 10개를 태웠다... 슬라브인들에게는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저주스러운 족속들은 우리에게 외계생물 같다.
― 국방군 하사 요하네스 게르더의 일기
1943년 무렵부터는 차량화보병, 전차,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가축, 곡물,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 노동 적령기의 인구는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됐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의도된 기아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타 버렸고 광대한 면적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1943년 5월 20일에 벌인 콧부스 작전의 결과에 따르면 수십 군데의 마을이 불탔고, 1만명 가량을 죽였으며, 6000명 가량이 독일로 수송되었다.
3. 초토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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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군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1943~1944년에는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점령 지역을 모두 파괴해 황폐화시키는 일을 수행했다. 나치는 최소 5295군데의 마을을 파괴하였는데, 무려 81%가 1943~44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하루에 최소 5곳의 마을을 파괴한 꼴이다. 작전의 목표는 퇴각하기 전 소련이 탈환할 땅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초토화 작전의 방법 중 하나는 '''주민들과 그 거주지를 모조리 태워 없애는 것으로,''' 사람들을 집이나 창고, 헛간 등에 몰아넣은 후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비쳅스크 지역의 경우 마을 243곳이 두 차례 불탔고, 83곳이 세 차례, 22곳이 무려 네 차례나 불태워졌다. 거주지와 주민들은 거듭 공격받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벨라루스가 해방됐을 때는 많은 지역이 사막처럼 변했다.
예를들어 1943년 3월 22일 벌어진 Khatyn 마을[1] 학살에서는 제118 보안경찰대(Schutzmannschaft)와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집에서 헛간으로 몰아넣고 짚으로 덮은다음 불을 질렀다. 갇힌 사람들은 헛간문을 무너뜨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기관총 사격으로 사망했다. 헛간에 갇힌 주민들은 모두 불에 타거나 총에 맞거나 질식해 사망했고, 카틴 마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2] 독일군은 이런 방식으로 벨라루스에서 5,295개의 마을을 불태웠고, 나치 독일 점령 3년동안 200만여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벨라루스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4. 강제 수용소
이 외에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또한 벌어졌다. 민스크 게토에만 10만 가량의 유대인들이 수용됐고, 1944년 소련군이 민스크를 탈환했을 때 남아있던 유대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민스크 근방의 말리 트로스테네츠 절멸 수용소에서 민간인과 포로들이 학살되었다. 죽은 사람들은 샤시코브카에 설치된 소각로에서 불태워져 블라고브치나에 묻혔다. 민스크의 유대인들을 전부 죽인 후에는 폴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들을 기차로 실어와 학살했다.
말리 트로스테네츠 또한 바비야르 학살을 감춘 제1005 특공대에 의해 흔적이 지워졌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드러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조사단은 블라고브치나에서 50미터 길이의 매장지 34군데를 찾아냈는데, 3미터 깊이에서 뼈가 타고 남은 재로 된 50cm~1m 가량의 지층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15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묻혔다.
5. 증언
여기에 프랑스 역사학자 Christian lngrao (크리스티안 잉라오)는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소규모 저항 단체가 숲에 숨어 독일군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 보복으로 마을 전체가 쳬계적으로 파괴되고 주민들은 살해됐죠. 죽은 부대 대신에 리투아니안인, 라트비아인, 우크라이나인 살수 부대가 벨라루스에 파견되었습니다.)
"아무도 우리 임무가 뭔지 말해주지 않았어요.갑자기 아침에 우리를 트럭에 싣고 이동했죠. 도착해서야 어디로 왔는지 알 수 있었어요. 군사기밀이었죠. 독일 군인과 리투아니안 지원자들은 민스크(벨라루스)로 보내졌어요. 거기서부터 시작됐거든요. 유대인들의 학살이요.
(질문: 처음 유대인을 쏜 곳이 어디입니까?)
작은 마을이었어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요. 그곳에서 나치가 힘없는 사람들을 죽였죠. 유대인 남자들은 전쟁에 나갔어요. 노인과 여자 아이들만 남아 있었죠.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명령이 내려졌어요. 죽이라고요.
(질문:아이도 죽였습니까?)
네, 구덩이 안에 있는 아이들을 죽였어요. 아이들을 죽여야만 했죠. 고통을 겪으며 죽게 하지 않으려면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으니 그편이 훨씬 자비로웠죠. 빨리 죽이는 편이요.
...'''소이탄으로 쐈어요'''. 그게 옷가지를 태우거든요. 온통 타는 냄새가 났죠.
(질문: 어머니가 아이를 지키려고 했을 때는 누구를 먼저 노렸나요?)
먼저 부모를 죽이고 그 뒤에 아이를 죽였어요.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죽는 걸 볼 필요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춤) 끔찍한 짓이었죠! 큰 애들은 운명을 알았어요. 그래서 구덩이에 엎드려 있었어요. 하지만 작은 아이들은 죽은 부모 쪽으로 기어갔죠. 팔다리를 움직여가면서요. "
Juozas Aleksynas(유오자스 알렉시나스, 리투아니아인 소총병)
TV 다큐멘터리 아인자츠그루펜: 나치의 학살부대, 2009, 3화 중
"사람들은 주로 헌신적인 애국자예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민병대에 참가하는 것이 전쟁 포로에서 벗어나거나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거죠. 아니면 비참함을 면하고 당국에서 시민에게 할당한 식량을 좀 더 얻는 한 방법으로도 볼 수 있어요.
Christian lngrao (크리스티안 잉라오, 프랑스 역사학자)
TV 다큐멘터리 아인자츠그루펜: 나치의 학살부대, 2009, 3화 중
6. 결과
3년 간 나치 치하에서 2,230,000명이 죽었으며, 380,000명이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수송되었다. 매일 평균 2천여명이 죽은 셈이다. 전후 벨라루스는 인구 1/4과 거의 모든 지식인층을 잃었다. 마을 9,200곳이 파괴되었는데, 그 중 나치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된 것만 5,295곳이고(즉 최소한의 수치이다), 그 중 628곳은 거주민 전원과 함께 절멸되었다. 또한 1,200,000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특히 민스크와 비쳅스크 등 대도시는 건물과 인프라의 80%가 파괴되었고, 민스크는 전후 영웅 도시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7. 기타
-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학살을 정리한 사이트.
- 벨라루스의 학살을 다룬 영화로 컴 앤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