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

 


1. 유대인 수용구
1.1. 비슷한 개념
2. 빈민 거주구역
3. 코드 기아스의 가상의 지역


1. 유대인 수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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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의 여타 구역과는 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1].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유대인은 이쪽 길로 다닐 수 없다!(Benutzung dieser Straßenseite für Juden verboten!)'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통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영상 속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다수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Ghetto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킨다. 13세기 모로코에서 처음 등장했고, 14~15세기부터는 유럽 전역에서 이런 거주제한규정이 생겨났다. 게토라는 이름은 1516년경 베네치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만 널리 알려진 사실과 달리 게토의 원래 목적은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1090년대 말 십자군의 광기에 (하인리히 4세의 유대인 보호 칙령에도) 신성로마제국 곳곳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12세기 슈파이어의 주교가 유대인 주거지에 성벽을 두르고 자치권을 주어 학살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주교궁에 숨은 유대인까지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이다. 물론 게토의 어원은 베네치아였고, 최초의 게토라 불린 곳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대인 강제수용 지역이 맞다. 베네치아 이전의 유대인 거주지는 차이나타운류에 가까웠다.
게토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게토에서는 유대인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했으나 시민권을 절대 주지않았다. 게다가 게토를 나갈때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노란색 옷과 챙달린 뾰족모자를 걸치고 마크까지 달아야 했다. 해가 진 후에는 게토밖으로 나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고 기독교인들이 보초를 서고 게토를 감시했다.[2] 거주제한 때문에 게토의 유대인들은 건물을 높이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부터 점점 없어져 1870년 로마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 악명을 떨쳤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집단이주하기 전까지 남아있었다.
2차 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또한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곳의 주거 환경 역시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점점 패망하려들자 폴란드의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를 시발점으로 무기를 밀수하여 그곳에 있던 나치 독일군들과 해방 전투를 벌였는데 아쉽게도 진압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유대인들도 나치 독일군들에게 희생당했다.
여담으로,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그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3]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고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4] 나치 독일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의 그 당시 게토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그 당시의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이 철저한 고증을 조사해 찍은 것이다.

1.1. 비슷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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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는 이른바 "체르타 오세들로스티(Черта́ осе́длости, 속칭 Pale)"라는 유대인 집중거주구역[5]이 있었으나 러시아 혁명 후 유대인들의 거주지 제한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이를 이디시어로 슈테틀(שטעטלעך)이라고 했다.[6] '체르타 오세들로세티' 거주 유대인 인구의 3/4가 슈테틀에 살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러시아 제국의 박해 때문에 2백만 명이 동유럽을 떠났고, 결정적으로 홀로코스트 때문에 슈테틀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을 게토화라고 한다. 한 예로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무슬림들을 들 수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었던 흑인 거주지역인 반투스탄도 특정 인종의 격리라는 측면에서 게토와 비슷하다.
북미(캐나다, 미국)의 차이나타운은 사실 화교들을 몰아넣는 게토였다. 반화교 폭동과 학살도 벌어졌다.

2. 빈민 거주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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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빈민 거주지역[7]을 의미하며, 갱스터 랩 애청자들에겐 많이 들어봤을 용어이다. 일종의 속어지만 미국의 흑인 밀집 빈민가가 흑인 특유의 스웨거 문화와 맞물리면서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했기에 미국에선 이미 고유명사화된 상황이다. 이 게토 문화권에서 비롯된 독특한 음악장르나 문화들도 많은데 일례로 시카고 게토에서 유래된 게토 하우스-주크 하우스/풋워크가 게토 문화권에서 창출된 음악장르중 하나다. 예를 들어 싸구려 음식 앞에는 게토-라는 접두사가 붙는다든지 [8] 뭔가 좀 허접한 물건으로 스웨거를 나타낸 경우 That's ghetto라고 한다든지. 미국의 래퍼 XXXTENTACION은 시끄럽고 음산한 느낌의 앨범을 만들어 제목을 ‘A Ghetto Christmas Carrol’이라고 짓기도 했다.
UC 버클리가 위치한 버클리에선 Asian Ghetto가 존재한다. 아시안 식당들이 모인 골목길.
아래는 그러한 게토 문화의 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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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럼 좋아하는 농구팀 로고가 들어간 웨딩 드레스라든지, 그 밖에도 딸이 찍어준 매춘부 사진이라든지, 차체를 무지하게 올린 차라든지. 흑인들이 많이 피운다는 편견이 있는 담배 브랜드 뉴포트도 그렇다.
하여간 이러한 것이 일종의 으로 자리잡아 아예 그런것만 모아둔 사이트도 있다.#
청주대학교 이종호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3. 코드 기아스의 가상의 지역


코드 기아스의 등장하는 가상의 지역. 상위 항목의 의미 그대로 사용된다.[9] 다만 여기에서의 게토는 일정 지역을 지정한게 아니라, 조계 외부의 모든 지역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개념.
브리타니아-일본 전쟁의 승전으로 일본을 식민지화한 브리타니아는 구 일본의 주요 대도시 일부를 새로 개발하여 브리타니아인 전용 거주 지역으로 복구하였다. 이를 조계[10]라고 칭하는데, 구 일본 국민들은 브리타니아에 충성을 맹세한 소수의 인원 외에[11] 조계 외부에 있는 게토로 쫓겨나 살아가게 되었다.
조계는 전쟁으로 초토화 된 도시 폐허를 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도시를 지어 신 시가지가 구성되어 있지만[12] 게토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모습 그대로, 심지어 여러 종류의 잔해조차 치워지지 않은 상태. 이렇다보니 조계와 게토의 생활 수준 차이는 처참할 지경이다.
[1] Das Judenviertel ist mit Mauern vom Übrigen Warschau abgesperrt.[2] 베네치아의 경우에는 보초를 세우는데 필요한 돈을 유대인들이 내야했다(...).[3] 영화 중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4] 한 노파가 먹으려고 한 죽을 노인이 훔치려다가 그만 바닥에 쏟았는데 노인은 그것마저도 먹으려고 엎드려서 흙투성이인 죽을 먹으려고 핥았고 노파는 울며 막으려다가 울면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5] 물론 유대인 '집중거주구역'이라고 해서 유대인들 사는 동네는 절대로 아니었다!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슬라브인이 엄연히 다수 민족이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폴란드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사이의 접경지대에 집중거주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벗어나 사는 것은 금지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19세기20세기의 유대인들이 좀 더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고. 독립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유대인 거주구역이 죄다 쪼개져버리니까. 유대인들의 이러한 불안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현실이 되었다.[6] 슈테틀은 정확히 말하면 읍 정도 되는 개념이었다. 렘베르크 같은 큰 도시는 슈토트(שטאָט), 작은 유대인 마을은 도르프(דאָרף)라고 불리었다. 독일어 비슷한 느낌이 들 텐데 동유럽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이디시어가 그 계통이라서 그렇다.[7] 슬럼과 같은 의미다.[8] 싸구려 냉동 부리또를 보통 Ghetto Burrito라고 부른다.[9] 다만 에리어 11 일본 외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인지는 불명.[10] 租界, 19세기 중국에 있던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에서 어원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11] 이들을 '명예' 브리타니아 인으로 분류한다.[12] 심지어 조계 중앙부는 도시 구획을 몇 개 층으로 설계해두었다. 도시 면적만한 구조물이 수십 미터 솟아오른 모습은 감탄이 나올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