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스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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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정부와 친위대 슈츠슈타펠 계획상에 있던, 레벤스라움을 포함한 대게르만국(Großgermanisches Reich)[1] 의 대략적 영역. 핀란드가 포함되지 않고 레벤스라움에 포위당하다시피 한 것은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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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나치 독일의 최전성기인 1942년 9월 달성 목표에 근접한다.[2]
1. 개요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란 독일어로 '생활권'(생존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으로,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독일의 팽창 정책이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주요한 사상 중 하나로 확장/외교 정책, 그리고 홀로코스트 등 민간인 대량 학살 정책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처음 명칭을 제시하고 지정학의 권위자인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가 주창한 이론으로, 요약하면 '독일의 영토를 넓혀서 독일 민족이 살아갈 공간을 마련해야만 독일 아리아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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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스라움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하우스호퍼.
레알폴리틱(Realpolitik)[3] , 안슐루스(Anschluss) 같은 독일사 용어처럼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 광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레벤스라움이라고 쓰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특히 독어독문학과 수업에서 독일사를 배운다면 절대 번역하지 않는다. 영미 학계에선 굳이 번역하는 경우엔 Living Space로 번역한다.
레벤스라움은 당시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대륙세력 계열 지정학 이론의 대가였던 할포드 매킨더의 '심장지역'(heartland) 이론과 유사한 개념이다.[4] 심장지역 이론은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차지하여 광활한 인구를 이주시키며 농지를 차지하고, 동서남북 전 방향으로 세력을 팽창하는 데 유리한 전초기지를 확보한다는 발상이었다.
2. 히틀러 이전
역사적으로, 히틀러 이전에도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미 중세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튜튼 기사단의 동부로의 영토 확장과 함께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이 일어났으며, 프리드리히 라첼은 1901년에 지리학적 서식지를 인간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한 요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인문지리학 용어로서의 레벤스라움을 만들었다. 라첼은 인간과 사회가 기본적으로 지리적 상황에 영향을 받고, 한 지역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회는 자연히 국가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일의 인구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넘쳐나는 독일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해외 식민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의 군국주의 선전가들은 라첼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생활권을 위한 인종적 투쟁의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다음 전쟁은 분명 독일의 인종적 우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가 충족되는 레벤스라움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 체제에서는 카를 하우스호퍼와 그의 지정학 연구소가 레벤스라움 이론의 확립과 독일 민족주의에의 이용에 기여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image]소련의 폐허 위에 동방의 독일 제국을 세운다는 히틀러의 장기 목표는 단순히 추상적인 소원에서 발한 비전이 아니었다. 1918년에 세워진 동방의 영토에서, 이 목표는 확실한 출발점을 가졌던 것이다. 동방의 독일 제국은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이미 현실이었다.
독일의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저서 <독일과 두 세계 대전(Germany and the Two World Wars)>에서
'''9월 계획(Septemberprogramm)'''에 따른 독일 제국의 점령 목표(주황색)
제1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된 1914년 9월, 독일 제국 정부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Hollweg) 당시 총리가 비밀리에 지지하던 9월 계획을 공식 전쟁 목표로 제출했고, 그에 의해 전장의 승리를 거둔 뒤의 독일은 '''폴란드 서부 지역을 합병'''한 후 그곳에 독일계 개척자들을 보내고,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를 식민지화'''할 것이었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유럽 러시아의 많은 영토가 독일에게 양도되었다. 독일인들은 그 당시 레벤스라움이 거의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1918년 당시 최악에 빠진 서부 전선의 상황은 정부의 정보 통제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독일인이 동부에서의 승전보만 듣고 있던 채로 1918년 10월 킬 군항의 반란 등의 사태가 일어나 독일이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패전 이후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히틀러의 제1차 세계 대전 유대인 음모론과 팽창주의 선동에 넘어가게 되었다.[5]
3. 히틀러와 나치즘
나치즘에서 레벤스라움이라는 곳은 히틀러의 말대로라면 피와 돈에 굶주린 사악한 유대인 패거리가 열등 인류(Untermensch/운터멘쉬)[6] 인 슬라브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유럽을 말한다. 미텔오이로파의 장악이야 진작에 선결되어야 할 기본사양이다.[7]우리의 농민 인구의 증가는 동방의 슬라브 노동 계급자 무더기가 들이닥치는 것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방어이다. 6백 년 전에도 그랬듯, 독일 농민의 운명은 슬라브 인종에 대항해 어머니 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통해 독일인들의 유산을 보존하고 늘려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히틀러의 계획대로라면, 유대-공산주의의 온상인 동유럽과 러시아를 쳐부수고 동유럽을 게르만 민족이 영원무궁히 발전할 수 있도록 곡창으로 개간한 뒤, 슬라브족을 게르만 민족의 노예로 삼아 번창하는 천년제국을 세웠겠지만 알다시피 말도 안되는 계획에 눈에 먼 히틀러는 소련과 양면전쟁까지 일으키고 패망한다. 서유럽 국가들은 나치의 사상으로는 좀 더 인종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기에, 대놓고 그곳에 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고 떠들지는 않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레벤스라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은 슬라브족을 게르만족에 동화시키기 위해 각종 국가판무관부 수립을 계획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몇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수립되었다.
실제로, 전쟁 중의 독일 정책인 게네랄플란 오스트(Generalplan Ost)[8] 는 '열등한' 슬라브인들을 사살, 추방, 노예화하고 레벤스라움을 이루기 위해 독일계 인구로 동유럽을 채우는 것이었다. 도시 인구는 기아를 통해 말살될 예정이었으며, 슬라브가 아닌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에겐 나치즘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했다. 이러한 점은 현지의 사람들에게 나치의 가혹한 통치를 통해 현실화되었고, 처음 나치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호의를 가지고 해방자처럼 대하던 소수민족이나 소련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조차 나치에 대한 복종보다는 반항을 선택하게 되어 빨치산을 대거 양산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통치 정책에 대해서 현지의 나치 관료들조차 대재앙 같은 단어를 언급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4. 평가
나치는 소위 아리아인이 살 땅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을 다 꿀꺽해 그 땅에 살던 타 민족을 복종이 아닌 절멸시키려고 했지만 사실은 그 광대한 땅을 이용하기 위한 인력은 독일 국민 전부를 동원해도 턱없이 모자라다는 자기당착에 직면하였고,[9] 결국 아리아인만을 빠르게 늘려 퍼트린다는 망상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아리아인만을 생산하는 기관인 레벤스보른을 만들어 아리아인이란 개념에 맞는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자들을 교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인간이 그렇게 쉽게 늘어날 리가 없다. 이건 마치 임산부 10명이 있으면 애 하나를 1개월만에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수준의 소리다. 차라리 슬라브인에게 2등국민 지위라도 주는 식으로 소극적인 참여라도 유도했다면 일시적으로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레벤스라움을 주창한 하우스호퍼는 훗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히틀러와 사이가 멀어졌고,[10] 후에 일련의 사건들[11] 을 이유로 히틀러로부터 버려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난 뒤 독일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의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나치의 만행 여부를 떠나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히틀러가 하우스호퍼의 의견을 받아들여 독소전쟁을 안 했다면, 유럽 대륙은 크게 나치 독일과 소련이 양분하는 상태로 장기화되었을지 모른다. 독소전쟁에만 어마어마한 인력과 물자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에, 만약 독소전쟁을 안했다면 그 인력과 물자를 기존 점령지 탄압 및 방어시설, 주둔병력 증대에 충분히 투입, 즉 '굳히기'에 들어갔을 게 뻔하기 때문. 그리고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여파로 중화기는 거의 다 놔두고 몸만 딸랑 자유 프랑스군 등과 함께 영국으로 도망친 건지라, 장비도 겨우겨우 미국이 랜드리스를 해줬을 뿐 그 자체로 상륙 작전 및 탈환을 할 상황이 도저히 못 되었다. 미국도 독일과 소련을 한꺼번에 상대할 마음은 나지 않았을 게 뻔하고, 스페인이나 헝가리 등 나머지 점령 안 당한 국가들은 말이 독립국이지 나치 독일의 괴뢰국 혹은 꼭두각시 수준인지라 미국과 영국에 대한 협조도 기대할 수 없었을 테니..
경제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레벤스라움은 헛소리에 가깝다. 산업사회에서 국가의 경제적 힘은 잘 교육받은 많은 인구와 고도의 인프라가 갖추어진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광대한 동유럽 전체를 독일 수준으로 산업화시키는 것은 자원 및 자본의 한계로 불가능에 가까운 반면, 레벤스라움이 이루어져 인구가 계속 유출될 독일은 인공자궁과 복제인간 기술이라도 개발되어 사람을 말 그대로 찍어내지 않는 이상 인구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한 예시가 헬레니즘 제국 시절의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그리스 사람들이 죄다 동방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본토는 인구 부족으로 쇠퇴해 버렸고 결국 빈껍데기만 남아 로마 제국이 낼름하게 된다.
이건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전처럼 경제적 목적으로 거점으로 조금씩 식민지 만들던 것에서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드넓은 식민지를 만들다보니 유지비용이 감당이 안 된 것. 거기에 착취가 목적이다보니 식민지인들의 반발은 당연했으며, 그걸 진압하느라 비용이나 인력을 식민지에 너무 많이 써야 해서, 1차 대전 전의 영국과 프랑스는 실제 국력이 독일보다 뒤처졌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재상부터가 식민지 너무 넓히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그냥 거점별로, 상징적인 수준에서 조금씩 만들고는 그만두었다. 사실 빌헬름 2세가 트롤링 안하고 비스마르크의 구도대로 계속 갔으면, 지금쯤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가 그대로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레벤스라움은 커녕 옛 독일 제국 영토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서독이 인구 부족 문제로 인해 수백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게 부족한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었다.'''[12]
물론 그렇다고는 쳐도 이 인구로는 레벤스라움 달성은 턱도 없는 수치. 당연하겠지만 2차대전 전 독일 인구는 2차대전 후보다 많기는 했지만 땅 역시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안슐루스, 뮌헨 협정으로 인해 1939년 당시만 해도 그 때의 독일은 현 독일+폴란드 일부+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였다. 물론 그 인구들은 뭐냐고 하겠지만 이 인구를 다 합쳐도 소련 땅은 그래도 그들이 감당하기엔 광활하다. 현 러시아의 우랄 산맥 서쪽 영토는 오히려 구 소련 시절보다 축소되었지만 그 넓이는 나머지 유럽 대륙 국가들을 다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레벤스라움을 전부 경영할 만한 독일인의 인구라고 하면 현재 독일 땅 크기에 10억 명 정도는 살았으면 나라 안에서 인구밀도 때문에 정당성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예술적, 철학적으로 유명한 고흐의 낡은 구두 논쟁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 그림에 늙은 아낙네를 상정함으로써 땅과 삶터, 근간에 대한 이 사상을 담았다고 해석된다.[13] 이러한 하이데거의 구두 그림 해석은 유대계에서 민감한 주제였으며, 유대인 은사의 영향을 받았던 마이로 샤피로가 은사의 유고 논집에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반박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레벤스라움은 나치 침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철저히 비판을 받았고, 지리학계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되었다. 나아가 지정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침략자들의 사이비 이론'으로 매도되어 없어질 위기에까지 놓였지만, 얼마 안되어 냉전 시대로 진입하면서 다시금 지정학은 국제정치의 중요한 이슈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5. 기타
영토 확장 이론은 파시즘 계열의 특징인지 비슷한 것으로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 이탈리아 왕국의 스파치오 비탈레가 있다.
더 이른 시기에 나온 자매품으로는 프랑스의 '자연국경론'이 있다. 절대왕정 시절 루이 14세가 처음 주창한 이론으로 대서양, 지중해,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라인 강은 자연이 프랑스에 내려 준 국경이며, 이 안쪽은 당연히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왕국 시절부터 공화정, 제정에 이르기까지 수백년 간 정복전쟁을 치렀고 결국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 및 빈 체제의 도래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혁명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확장한 영토만 빼앗겼을 뿐 왕국 시절 확장한 영토는 그대로 프랑스의 일부로 인정받으면서 현재의 프랑스 국경이 자리잡게 되었다.
6. 매체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의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레벤스라움이 이뤄진 후의 모습이 나타난다. 다만 여기서의 레벤스라움은 북유럽(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무르만스크[14] )을 독일 영토로 합병하지 않고 동유럽에 러시아의 유럽 영토까지만 합병한 모습이다. 선전대로 독일은 엄청난 영토를 얻었지만 정작 그 생활권이라는 것은 구 폴란드 및 소련의 잔당들의 지속되는 테러와 척박한 환경 때문에 아무도 가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레벤스라움으로 이주할 경우 정부 보조금도 공짜 농장도 주고 레벤스라움이 굉장히 살기 좋다는 선전도 하고 있지만 이주를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며 가서도 고생을 하는 모양. 작중 등장인물도 가서 살지도 않을 생활권이 뭔 소용이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높은 성의 사나이에선 레벤스라움 정책이 성공한다. 슬라브족에 대한 인종 말살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인데, 발두어 폰 시라흐가 소수 민족화하는 선에서 중지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실행된 것 같다.
울펜슈타인: 영블러드에서는 1980년이 되서도 유라시아 대륙은 여전히 나치의 휘하에 있는데 1971년에 우주 개척 시뮬레이팅을 할 영토를 만든답시고 옛 러시아 영토를 아예 거대한 방사능 지역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레벤스라움이 아닌 토텐라움이 되어버린 셈.
7. 관련 문서
- 레벤스보른
- 스파치오 비탈레
- 대동아 공영권 - 일본판이다.
- 나치즘
- 동방식민운동
- 우생학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명백한 운명[15]
-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 레벤스라움의 모범적인 모델. 왜 그런지는 항목 참조
- 제국주의
- 중국
- 중화사상
-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
- 하나의 중국
- 중국몽 - 레벤스라움의 중국판이다.
- 절대방위선
- 간도 회복[16]
- 환빠 - 한국판(?)이라고 볼 수 있다.
[1] 정식 명칭은 '''독일 민족의 대게르만국'''(Großgermanisches Reich Deutscher Nation/그로스게르마니셰스 라이히 도이체 나치온).[2] 스웨덴이 빠져있긴 하지만 스웨덴은 나치 독일에 필요한 자원들을 엄청나게 공급해주는 등 매우 우호적인 중립국이었다.[3] 다만 이는 나치가 아니라 19세기 독일 작가 로하우(Ludwig von Rochau)가 고안한 말이고, 오늘날에도 정치학계에서 잘만 쓰는 단어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주로 '현실정치'로 번역된다.[4] 매킨더의 라이벌격 인물로는 미국 해군대학 학장으로 해양력 이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알프레드 마한 제독이 대표적이다.[5] 다만 독일인들이 실상을 몰랐다는 것은 허구이다. 실상을 정말로 몰랐다면 킬 군항의 반란이 독일 11월 혁명으로 이어지고 황제가 퇴위하는 데까지 채 1주일도 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6] 영어로 번역하면 Under-man.[7] 제3제국의 관점에서 중부유럽은 최초의 게르만 제국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8] '동방총계획'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9] 당시 독일 인구가 1이라면 소련 인구는 2였고 소련의 우랄 산맥 서쪽 땅만 해도 독일보다 훨씬 컸다. 2배, 3배 그 이상이었으니 전국민을 동원한들 될 리가 없다. 하다못해 여기가 살기 좋은 땅이라면 모를까 소련의 겨울 추위는 겁나게 무서운 수준이었다. 개발을 시도해도 될 턱이 없다.[10] 하우스호퍼는 독일이 대륙세력으로서 영국, 미국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서는 역시 대륙세력인 소련과의 제휴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는 독소 불가침조약과 이후 2년 동안 계속된 독일의 유럽 지배가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11] 하우스호퍼의 제자인 루돌프 헤스가 영국 관계자들과 접촉하는가 하면, 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했다.[12] 다만 이는 2차대전 직후 성인 남성이 부족해진 것과 동서로 쪼개진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물론 인구가 더 많이 늘어난 현대의 독일도 땅이 부족해서 곤란함을 겪고 있지는 않다. 국가별 인구 밀도 순위 참조.[13] 실제로 하이데거는 나치에 열렬히 협력했으며, 그 덕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에 임명되었고 나치당에서 고위간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총장 당시에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나가 살인을 하라고 권장했다.[14] 핀란드가 차지했다.[15]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말살하여 "미국인"(앵글로색슨 계열 백인)들의 생활권을 확보하자는 면에서 비슷하다.[16] 과거에 한민족이 살았다는 이유로 남의 땅을 강제로 강탈해야 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