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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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1939년 3월 16일 만들어진 나치 독일의 자치 보호령이다. 이 3월 16일에 독일 국방군이 뮌헨 협정과 1차 빈 중재로 합의금을 챙기고 남은 영토를 침공하면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부분을 묶어 독립시켰다. 이는 3월 14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세워진 지 이틀 만에 일어났다.
대통령으로 제2 공화국의 대통령이였던 에밀 하하가 부임했으나, 나치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고 이후 나치 독일에게 사실상 속령으로 취급받았다. 더 가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악독하게 착취하는 등 그곳에 거주하던 체코인과 유대인에게 악명을 떨쳤다. 이로 인해 체코인들로 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가 자주 들고 일어났다.
1945년 5월 9일 프라하 봉기가 일어났으며, 직후 소련군의 프라하 공세가 일어나면서 체코 지역에 주둔하던 독일 국방군이 일소되었고 1945년 5월 11일 프라하가 점령, 대통령 에밀 하하와 보호령 고위 관료들이 체포되면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은 해체되었다.
2. 나치의 잔학 행위
1940년 인구 조사 시에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는 738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 3.3%(225,000명)만이 순수 독일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지역을 차후 "대게르만국"에 편입할 계획이던 "드랑 나흐 오스텐" 정책을 실시해서 독일화를 꾀했고, 카를 프랑크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체코인 말살을 시도하여 1945년까지 5년간 체코인 전체의 절반을 독일인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처럼 나치 독일은 이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서 체코인에 대한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한 전적이 있다.
또한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에는 레티 절멸 수용소라는, 로마족(집시) 임시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곳에서 집시들을 모아놓았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역할을 했으며,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대략 4천 명 가량의 집시가 수용되었다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서 학살당했다.
이에 비해 같은 보호령이던 덴마크에선 같은 게르만족 국가라 그런지 자주권을 인정받는 등 대우가 훨씬 좋았다. 어떠한 외교/군사적 마찰없이 나치 독일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3. 역대 수장
3.1. 총독(Reichsprotektor)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1939년 3월 16일~1943년 8월 20일)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1년 9월 27일~1942년 5월 30일)
- 쿠르트 달루게 (1942년 5월 31일~1943년 8월 20일)
- 빌헬름 프리크 (1943년 8월 20일~1945년 5월 5일)
3.2. 대통령(Staatspräsident)[2]
- 에밀 하하 (1938년~1945년)
3.3. 군정통치령 대표(Wehrmachtbevollmächtigter)
- 에리히 프리드리히 (1939년 4월 1일~1941년 10월 31일)
- 루돌프 토슈인트 (1941년 11월 1일~1943년 8월 31일)
- 페르디난드 샬 (1943년 9월 1일~1944년 7월 26일)
- 루돌프 토슈인트 (1944년 7월 26일~1945년 5월 7일)
[1] 단순한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으나, 망명정부와도 연락을 하긴 했다. 그러나 전쟁 등 격변기에는 일종의 보험 차원으로서 공식적인 적대 세력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정치인이 드물지 않은 법이다.[2] 단순한 허수아비 대통령이었으나, 망명정부와도 연락을 하긴 했다. 그러나 전쟁 등 격변기에는 일종의 보험 차원으로서 공식적인 적대 세력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정치인이 드물지 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