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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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 제3공화국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 왕국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무솔리니의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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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뭐? 내 의자는 없다고?'''[1]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습니다.'''[2]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의 총리

'''우리들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패배를 보았다.'''[3]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출처.[4]

윈스턴 처칠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938년에까지 이르는 배경
3.2. 1938년, 9월 이전
3.3. 1938년 9월
4. 뮌헨 회담
5.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을까?
6. 결과
7. 후일담
9. 관련 문서


1. 개요


'''뮌헨 協定'''
영어
'''Munich Conference'''
독일어
'''Münchner Abkommen'''
프랑스어
'''Accords de Munich'''
이탈리아어
'''Conferenza e accordo di Monaco'''
체코어
'''Mnichovská doho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dohoda'''
1938년 9월 30일 나치 독일 뮌헨에서 체결된 협정. 뮌헨 회담으로도 부르나 이는 4국 정상 간의 회담만을 뜻하며, 그 결과물이 뮌헨 협정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1년 늦춘[5] 들 간의 야합으로,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는 1년 후 발생한 나치의 폴란드 침공의 도화선이었다는 점, 그리고 1차대전 후 2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베르사유 조약민족자결주의 체제의 붕괴가 이 뮌헨 협정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2. 배경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민족자결주의베르사유 조약 사이의 모순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로[6] 역사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최초의 독립 국가였다.[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도 독립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사실 이렇게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나라를 독립시키자니 국경선이나 영토 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졸지에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독일인, 유대인, 집시 등이 한 데 모여 섞인 다민족 국가가 되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지녀 온 사실상 다른 민족[8]으로, 남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 지방의 헝가리인과 테셴 지방의 폴란드인(본래는 폴란드 영토였으나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삥 뜯으면서 체코 영토가 되었다), 동부 끝자락의 우크라이나인루신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국가 내 최대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수데텐란트독일인이었다.
중부유럽은 오랜 기간 신성로마제국과 그의 계승국인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오랜 기간 슬라브인들의 이주 운동과 독일인들의 이주 운동이 만나 겹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국 내부의 행정구역상 구분만 있었지 국가나 민족 단위의 확고한 경계선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체코인 거주 구역으로 분류된 지역 한 가운데 독일인 촌락이나 도시가 들어서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협상국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하고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주변국들이나 새로 독립한 국가들에게 원래 예상되던 영토보다 좀 더 큰 영토를 할양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 영토에 거주하던 이질적 민족들이 다른 민족 국가들의 소수민족으로 편입됐다. 이것이 다민족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이었고, 이는 베르사유 체제가 대원칙으로 삼은 민족자결주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3. 전개



3.1. 1938년에까지 이르는 배경


이런 배경이 있어도 어쨌든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국으로서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 어느 정도 충실하였고,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등의 지도 아래에 어느 정도 서방 국가들과 타협점을 찾는 등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영-프도 전후 복구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뒤집힌 계기가 바로 세계 대공황인데,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영-프 양국은 물론 독일에까지 대규모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던 영국 중심의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며 세계 여러 국가들에 타격을 줬는데, 특히 1차 대전으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한 독일은 이런 자유무역 체제의 붕괴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 내에서는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의 농간 때문이라는 배후중상설이나 영국과 프랑스가 죄없는 독일을 겁박한다는 피해망상적 주장들까지 등장했으며, 마침내는 독일이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무역 체제의 붕괴 속에서도 그나마 식민지/자치령들과의 블록으로 버티고 있던)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거대한 식민제국으로 발돋움 해야 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일 민족을 위한 거대한 생활권, 레벤스라움의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주장들은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독일 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주장들을 흡수하며 위대한 독일의 재건, 독일 민족을 위한 제국의 건설을 기치로 본격적으로 집권한 것이 나치당이었다.
그리고 나치는 이 레벤스라움의 건설을 위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주변 지역으로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으며, 국가의 사회/문화/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를 이를 위한 대비 상태로 만들어나갔다. 집권 직후 독일 내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 추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데 이어,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1936년에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선언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을 시도하는데, 그 첫번째 목표는 당연히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있었고, 또한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중부 유럽 지역이었다.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 병합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팽창이 시도되었고, 나치는 이를 시작으로 범게르만권[9]으로의 팽창을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대가 지나며 프랑스와 영국은 아직 세계 대공황의 타격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으나, 독일은 이미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중공업에 군수산업을 접목시켜 빠른 경제회복을 이루어냈다. 게다가 영-불 양국은 독일의 성장세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고, 영국프랑스를 합한 정도의 국력이 있어야만 독일과 동등할 것이라는 오판을 내렸다. 사실 당시 나치 독일의 경제력은 프랑스를 능가하긴 했으나 식민지를 제외한 영국 본토와는 비등한 수준이었고, 따라서 전체 국력도 프랑스보다는 강했어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정도의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농업 생산량은 프랑스가 훨씬 우위에 있었고 1차 대전의 여파로 청년층이 크게 줄어들긴 했지만 자국 방어에 필요한 수백 만 명을 모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요새와 방어 전략을 이용해 버티기만 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전쟁의 양상이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반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도 둘을 합친다 하더라도 독일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고, 독일과의 전쟁은 양국에 큰 피해를 입힐 것은 분명했다. 즉,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어떻게 됐든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영-불 양국은 "독일 또한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도 전쟁을 피하려 할 것이다."라고 오판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한 세대도 안 지난 20년 전에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고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영-프 양국의 기대와 달리 그런 건 히틀러의 우선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전선이 고착화되기 전에 빠르게 승전을 거두면 된다는, 지극히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제국 군부와 유사한 사고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도, 프랑스를 상회했던 국력도, 당시의 독일 행정체제까지도 군수산업에 기반을 둔 지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넘쳐나는 물자는 다시 칼끝을 돌려 독일에 엄청난 행정적, 경제적 마비를 불러올 것이었고, 공약을 지키지 않은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자칫 정부 전복이라는 대위기를 불러올 것이었다.
독일이 잠재적 위협으로 재부상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영프 양국은 확실히 독일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 국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소련을 후보로 물색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경계감이 독일에 대한 불안보다 더 높게 여겨져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때문에 영프 양국은 국제연맹으로 미국을 끌어들이고, 영프미 삼각 집단 방위체제를 형성하거나 미국-영국/미국-프랑스 개별 양자 동맹을 형성해 미국을 유럽 문제에 끌어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으나 결국 미국 내의 고립주의가 심화되며 실패에 끝났다.[10] 미국에서는 "모든 전쟁을 불법화한다."라는 사실상 실효성 없는 형이상학적 말장난이나 다름 없는 켈로그-브리앙 조약[11] 정도만이 확보 가능한 안전 보장의 상한선이었고, 결국 영프 양국 지도부 사이에서는 압도적 국력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3.2. 1938년, 9월 이전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아돌프 히틀러제3제국이 국민 투표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12], 리투아니아[13],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14], 스위스[15] 등에 나뉘어진 독일계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쥐트티롤[16]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쥐트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티(Sudety) 지방, 즉 수데텐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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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삼키려는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수데텐란트를 노리고, 그곳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17]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2개의 군사 동맹국 프랑스소련 중 훨씬 믿음직한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상 군사 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고 이에 따라 3월 14일 프랑스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에게 조약 준수를 약속하는 한편 이후 영국의 입장을 캐물었으나, 영국은 조약 준수만을 확인할 뿐 정작 참전 문제에는 미적지근했다. 애당초 프랑스는 영국없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는 상황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국이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자 불리한 입장이 되면서 이후 외교적으로 영국의 뒷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3.3. 193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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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15일 뮌헨에 도착하여 독일 국방군의 사열을 받는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영국 측 인사들. 가운데 있는 남자는 당시 독일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이다.
그러다가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9월 1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수데테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군부의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다.[18]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영국군 또한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이미 앞서서 프랑스는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참전하겠다는 입장은 수데테란트 위기가 터진 이래로 프랑스가 고수했던 입장이었다. 만약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할 경우 지금까지 체결되었던 프랑스와 다른 여타 중부유럽 국가들 간의 조약들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여 휴지조각으로 전락하는데, 이 경우 프랑스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국가들이 자연히 근접한 강대국,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 붙을 것이며 그러면 프랑스는 서구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으로 고립당하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참전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제는 영국의 참전 여부였는데, 그 당시 독일의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독일과 1:1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수였고, 여기에 이탈리아도 독일 측으로 기울어 버린 상황이라 전쟁이 발발할 시 제2전선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앞선 3월에 프랑스 정부가 영국의 입장을 확인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육군 강국 프랑스와는 달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육군력도 없었고 또 한창 재군비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당장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로카르노 조약상으로도 참전 의무가 있었던 것은 프랑스뿐이고 영국은 그럴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전을 안 하자니 당장 영불동맹이 붕괴하고 프랑스가 패배하여 유럽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 불보듯 뻔했다. 이 난처한 상황 속에서 영국이 참전도 안 하고 프랑스와의 동맹도 유지하는 길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가 침공을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을 외교적으로 잘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 이 당시 독일이 들고 나온 구실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이고 수데테란트에서 실제로 폭력 소요가 발생한 것 자체도 일단은 사실이라 명분이 독일 쪽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동원령을 내리지 말라고 압력을 계속 넣었으며 한편으로는 수 차례 중재를 시도했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독일 주민이 과반수인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체임벌린은 즉답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가 9월 18일 프랑스의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지역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신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국가 자체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즉, 이제부터는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책임을 독박 썼던 프랑스가 '''물귀신 작전'''을 편 것인데,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정책 전환이며 의미도 컸지만 '''막상 영토를 뺏기는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몇몇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고는 있었으나 독일계 지역 전체의 할양은 생각도 않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이 터져도 영국은 참전하지 않는다며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장을 전하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참전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식으로 얼렀다. 결국 9월 21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해당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책임을 지고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9월 22일, 체임벌린이 직접 히틀러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며 앞서 15일 히틀러가 제시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전했는데, 처음부터 수데테란트 사태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 해체를 노렸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정말로 독일계 지역을 포기해 버리자 이번에는 그 할양을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할 것과 해당 지역을 독일군이 즉시 점령할 것,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분쟁이 있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의 영토 문제까지 조정할 것 등 고의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이제는 정말로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 영국과 프랑스는 23일 오후 지금껏 막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원령 선포에 동의했고 이를 접수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당일 밤 10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다음날인 24일에는 프랑스도 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9월 26일, 히틀러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닥쳐오는 이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앞서 배경 항목에서 이야기한 부담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 싸울 건가 아니면 발을 뺄 건가?"라는 내용으로 서로 의미없는 논의를 주고 받으며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9월 28일, 또 다른 열강 국가가 끼어들었다. 이탈리아 왕국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으며,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다.

4. 뮌헨 회담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는데 '''당시 나온 조항들 중에 영토문제를 제외하고 제대로 지켜진 게 하나도 없었다.'''[19]
  • 수데테란트는 독일에게 양도된다.
  • 테셴은 폴란드에게 양도된다.
  •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게 양도된다.[20]
  • 회담 참여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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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이후의 국경선 변화. 보시다시피 '''영토가 무지막지하게 쪼그라든 걸 볼 수 있다.'''[22]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수데테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 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걸로 바꾼 것 뿐이다. '''즉, 말이 좋아 양보지 실제로 독일한테서 받아낸 건 아무 것도 없다.'''
이 협상으로 명백한 독립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버려졌다. 이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국의 의사는 단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하고 영토를 주변국들에게 강탈 당했다. 더군다나 군사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돕긴커녕 오히려 폴란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23]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 데 협조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장 독일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과의 국경 지대인 수데테란트가 병합당했고 그곳에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과 수데테란트에 거주하던 300만에 달하던 인구가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5.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을까?


  • 여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이 시기 양국의 여론 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장년층 남성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참호전독가스를 경험했던 이들은 그런 악몽 같은 전쟁이 자기들의 살아 생전에 다시 벌어지고, 아들 세대가 그것을 경험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바로 옆 동네의 독일의 파시즘과 소련의 사회주의처럼 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된 독재국가였다면 모를까, 영프 둘다 각각 입헌군주제공화정을 채택한 민주주의 국가였으므로 양국의 정치권은 그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협정을 극렬히 반대한 처칠이 수상자리에 앉아 협정을 결렬시켰다 해도 전쟁을 극렬히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게다가 프랑스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의 경우 본인부터가 1차 대전 참전 용사였다.
  • 군사
일단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뮌헨 협정 1년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전쟁 준비가 불완전한 상태였다.[24] 그래서 선전포고만 하고 약 8개월 간 전쟁 준비 겸 눈치도 볼 겸 가짜 전쟁 사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프 양국은 세계 대공황의 늪에서 막 빠져나오던 참으로 군사력 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프 양국은 독일 측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작품으로, 영프는 독일의 군사 열병식과 선전 영화 등에 통째로 낚여서 독일의 군사력을 실제 이상으로 보고 두려워했다. 더욱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군사 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프랑스는 위의 문제로 영국의 참여가 없는 대독일 전쟁의 단독 개전을 두려워하고 있어 외교적으로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헝가리도 이 기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얻기 위해 독일에 동조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랑스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 나라였으나 체코로부터 테셴을 빼앗겠다는 욕심에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전쟁 계획을 망가뜨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막강한 것으로 평가 받던 폴란드군까지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25]
  • 경제
경제적으로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식민지가 국익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건 19세기에 이미 증명된 이론이었다.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 모두 식민지가 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대공황 때 식민지도 본토와 마찬가지로 초토화된 상태였기에 피폐해진 본국의 부채를 더 늘리기만 해서 경제력에 심각한 손실이 가해지고 있었고, 세계 대공황과 이어진 보호주의 무역 기조의 강화로 인해 산업과 경제 활력을 크게 상실한 상황이었다. 당장 바로 옆 동네의 나치 독일과 소련이 대공황의 피해를 쉽게 극복한 이유가 따로 돈이 나갈 식민지가 없고 자체 산업과 공업에만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답 나오는 문제다. 해당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가 잠시 안정에 접어들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세계 대공황의 타격에서 간신히 벗어나 간신히 한 숨 돌리는 수준이었고, 독일과의 대규모 전쟁을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이미 세계 대공황의 여파를 완전히 씻어내고 건실하고 막강한 경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던 독일의 경제력과 생산력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 국가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즉, 당시 영프 양국 입장에서 독일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막강한 경제를 바탕으로 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막대한 재정 지출로 말미암은 경제난으로 국내 혼란이 심화될 것이라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26]
다만 이런 독일의 경제력에 대한 평가는 지나친 과대평가였다. 물론 독일의 경제력 자체는 미국에는 크게 못 미쳤으나, 소련에는 약간 못 미치는 정도였고,[27] 영국과 프랑스 각 개별 국가보다는 컸으나, 문제는 히틀러의 망상증적 재무장 집착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군비 중심의 재정확장이 실시되어 민간 경제 영역에 가해지는 압력이 과도한 상황이라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태서 온갖 기득권층과 관료집단, 나치당 내 후원자들의 아귀다툼 속에 진행된 극히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제 자원의 분배와 활용,[28] 기축 통화국들이었던 미국, 영국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은 금융과 무역 분야에서의 제재와 불이익들로 인해 식량과 석유, 철강을 중심으로 한 기초 자원과 미국 달러/파운드 스털링을 중심으로 한 주요 외환 관리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심지어 현재에도 이런 문제들은 정확한 통계와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성질의 문제인데다, 그나마도 나치 독일은 소위 "통계 마사지"라는 과정을 통해 조작된 통계와 정보들을 발표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런 자세한 속사정을 다른 국가들은 알 수가 없었다.[29] 그리고 여기에 더해 진실을 적당히 포장해[30] 독일의 이미지를 실제 국력보다 뻥튀기한 괴벨스의 선전과 특히 눈에 잘 띄는 중화학 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난, 급격한 재정 확대로 말미암은 일시적 경기 활성화의 착시 효과가 더해져 독일의 경제력과 산업 생산력에 대한 과대 평가와 공포가 영프 양국의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 외교
독일은 외교적 명분론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엔 반대하면서도 수데테란트 요구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니 당연하지라는 반응을 가진 영국-프랑스인들도 상당했다. 민족과 국가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외교 협상을 주도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이해 관계가 적었고,[31] 체코슬로바키아를 옹호해야 할 프랑스는 군사 문제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외교적으로 영국에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요구를 수용해주고 총부리를 소련에 돌려 서방으로서는 골칫덩어리인 소련과 나치독일을 전쟁으로 맞붙게 하거나 또는 둘의 대립구도를 만들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이랬기 때문에, 뮌헨 협정 이후 독일과 폴란드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소련이 먼저 서방에 손을 내밀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굴욕적일 정도로 무시했고, 이에 격노한 스탈린이 영국과 프랑스를 믿지 못하면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다.
  • 독일을 확실히 제압할 전략의 부재
결국 위에 나타나는 것들을 종합하면 "당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프 양국에는 여론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독일의 야욕을 꺾을, 즉 독일을 단기간 내에 확실하게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로 귀결된다. 괴벨스가 뻥튀기를 좀 시키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치 독일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두 국가는 독일과의 전쟁을 감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프의 국력 합이 독일보다는 강했으나 압도적으로 강한 것은 아니었던 데다, 양국이 연합하더라도 그 힘이 두 국가의 국력을 합한 그대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더라도 두 국가의 국력 합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단기간 내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즉 독일에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갈 가능성이 컸고, 게다가 경제적으로 크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독일의 국력 또한 1차 대전 직전 수준보다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상황이라 양국이 입을 피해는 제1차 세계 대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되면 제1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전하기 이전처럼 미국이 국채 매입을 통한 자금 지원과 무역을 통한 자원 제공과 물자 공급을 실시하며 간접적으로 영프 양국을 지원하고 나설 가능성도 있었고, 소련이 빈틈을 노리고 참전할 가능성 또한 있었지만, 그런 가능성에 기대기에 독일과의 전쟁은 양국에게 생사가 걸린 너무나 큰 문제였다.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혹시 모를 독일의 팽창 야욕 재발과 유럽 국가들 간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문제에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시 몇몇 이들을 중심으로 만약 미국이 유럽 문제에 개입한다면 유럽 문제는 손쉽게 해결될 사안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으나,[32] 미국이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1938년은 미국 입장에서도 세계 대공황의 타격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한 숨을 돌리려던 상황이었고, 미국의 핵심 이권 지역들 중 하나였던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제국의 팽창으로 말미암은 긴장 관계의 악화로 유럽에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상대적으로 개입주의 성향을 띄던 미국 국무부(와 이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와 고립주의를 주장하던 상원 외교위원회(와 이를 중심으로 한 의회)의 충돌이 고립주의를 지지하던 여론을 업은 상원 외교위원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이후,[33] 대공황 문제까지 겹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은 유럽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경제-군사적 방법들을 많이 포기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나치의 팽창 야욕이 본격화된 1930년대 말까지도 미국의 여론은 전면적인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 정치권이나 미군의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34] 때문에 미국은 유럽 문제에 있어서 유럽인들의 자주적 선택을 존중한다며 개입하기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뮌헨 협정 당시에는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나서며 대화와 타협으로 이 문제를 영프독 삼국이 풀어가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35] 즉,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은 영-프 양국이 사실상 스스로 걷어찬 상황에서, 폴란드는 독일과의 불가침 협약 이행을 주장하며 오히려 협정으로 체코 땅 일부를 할양 받아 이득을 챙길 생각만 하고 있었고, 미국마저도 여러 문제로 인해 직접 개입을 거부하며 미온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독일을 빠른 시일 안에 확실하게 제압할 수단이 없었다. 이는 결국 여러 다른 사유들과 얽혀 영프 양국이 팽창 야욕이 뻔히 보이는 독일과의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결국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했다.

6. 결과


[image]
순서
연도
내용
1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흡수된다.
2
1938년 10월 2일
테셴이 폴란드에 합병된다.[36]
3
1938년 11월 2일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토는 헝가리에 흡수된다.
4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 존재하는 루테니아 지역은 따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독립되었으나,
얼마 뒤 헝가리에 의해 무력으로 병합된다.
5
체코의 나머지 국토는 전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된다.(보헤미아, 모라비아가 보호령으로 전락)
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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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나치식 경례로 환영하는 주데텐란트의 독일계 여성 주민들. 우는 듯한 세 번째 여인과 웃고 있는 첫 번째 여인이 인상적이다.
[image]
데이비드 로우[37] 화백의 풍자화,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치식 경례로 충성을 맹세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에두아르 달라디에, 네빌 체임벌린.
[image]

'''한 남자우리최대의 전쟁으로 부터 구하다!'''

1938년 8월 30일,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 소개 문구.

[image]
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들고 있는 종이는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이다. 기자들 앞에서 이 종이를 흔들며 체임벌린은 '''"여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가 있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하여 이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6년도 아니고, 6개월이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협박해서 체코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다가, 막강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주데텐란트, 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체코가 독일의 직할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슬로바키아가 괴뢰국이 된 직후 이웃에 있던 헝가리가 슬로바키아 동부를 침공하여 동부 국경 지대의 영토 일부를 추가로 빼앗기까지 했다.참고

주데텐란트에 진입하는 독일군과 환영하는 주민들

주데텐란트를 방문해 독일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히틀러

히틀러프라하를 차지하기 앞서 서방 열강을 우습게 보았다. 이번에도 영국프랑스가 말로만 떠들고 행동은 못하리라는 히틀러의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나타낼 반응을 히틀러가 오판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가 참 많다. 경고를 여러 번 받기는 했지만 히틀러가 막상 뮌헨 협정을 파기하니까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충격과 당혹에 휩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란 나라가 무너지면서 영국의 유화책도 깨졌다. 히틀러는 더는 영토 요구를 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뜨렸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복은 히틀러의 정책 목표가 독일 민족을 단일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긴 했지만 히틀러는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해졌다. 3월 17일 버밍엄 연설에서 체임벌린은 새로운 정책을 암시했다. '''"이것은 소국을 겨눈 마지막 공격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공격이 잇따를까요?"''' 체임벌린은 물었다. '''"이것은 사실상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내딛은 걸음일까요?"'''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두고 분열되었던 나라의 국론을 통일시켰다. 영국 국민은 한 목소리로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군대 지원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었다. 정부도 국민도 이제는 히틀러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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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36)

'''"이 참극을 일으킨 책임은 한 사람의 어깨에 있다."'''고 체임벌린은 9월 1일 영국 하원에서 말하면서 '''"무분별한 개인적 야심을 채우려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린 독일 총리"'''를 규탄했다. 이 표현은 지나친 단순화지만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렇게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야 히틀러가 자신의 행동으로 유럽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특이한 권력의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방조한,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저지를 태만과 불찰의 죄를 슬쩍 빼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히틀러의 협박과 공갈이 먹혀든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판도가 그만큼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공갈꾼의 노다지''''였다. 그것은 자꾸만 요구 조건을 키우는 빌미를 히틀러에게 주었고 1938년과 1939년에는 극에 달했다. 종족 관계가 불안해진 것도 결국 전승국들이 일방적으로 영토를 갈랐기 때문이었고 히틀러는 중유럽과 동유럽이라는 인종의 가마솥에서 그것을 이용했다. 또 서방, 특히 영국은 전쟁 배상금을 너무 과하게 물린 데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히틀러가 악다구니를 쓰고 과장을 하는 것도 사실이고 히틀러의 방식이 역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히틀러가 하는 주장이 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그런 편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전쟁에 지친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새로운 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들었고 기존의 점잖은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짓말과 위협을 밥 먹듯이 하는 히틀러에게 끌려다니면서 히틀러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럴수록 공갈꾼의 요구 조건은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서방 국가들이 히틀러의 실체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들은 이제 더는 '미친개'를 꿇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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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95)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 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은 당시 체코와 공동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고,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4자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프의 방관 속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자 영-프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영-프 쪽에서도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폴란드 역시 소련과 방위 조약을 맺는 것을 극력 거부해서 결국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38]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이 결과가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 -
당시에는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적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달래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무력으로 침공한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 조약으로 독일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는데, 체임벌린부터 앞에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으나 뒤에선 맹렬히 재무장을 시작했고 프랑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영프를 위시한 연합국의 의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해서 평화를 얻기보다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먹어치우는 동안 군비를 비축하는 등 대비할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다만 애초에 벌 수 있으리라 보았던 2년은 커녕, 단 6개월도 못 벌었으니 완전한 외교적 실패라고 볼 수 있다.[39] 그나마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영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이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에서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파기하자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로 전 국민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사건은 외견상 무관해 보였던 스페인 제2공화국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당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전 초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모여 비동맹,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대놓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파시스트 진영에게 돈과 무기, 병사를 다스로 퍼다주고 있었고, 소련도 반대쪽에서 공화파 진영에 지원을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좌파 인민 전선 출신의 레옹 블룸의 프랑스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화국에게 지원을 해주려고 했으나 동맹국인 영국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좌초되었다. 결국 내전 내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바로 아래에서 대대적인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공화국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며 영국에게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이미 프랑코 진영의 승세가 유력해지는 걸 본 영국 측에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손을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내내 공화국이 추구하던 외교적 승리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예언하고 경고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총리가 되어 히틀러에 맞서 싸운다'''.

7. 후일담


뮌헨 협정에 관련된 국가들과 인물들과 단체들의 말로는 모두 좋지 못했다.
  • 영국: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으며 뒤늦게 독일 타도를 외쳤으나, 정작 폴란드가 침공당할 땐 도와주지 못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1940년 5월에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을 계기로 실각했다. 그나마 국가가 존속한 상태로 독일과 맞서 싸웠고, 본토가 전쟁에 크게 휘말리지도 않았으며, 결국 전쟁에서 이겼으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경우다. 그러나 전비 소모와 경제적 침체로 인해 전후 대공황급 경제 위기를 다시 맞았고,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대영제국은 영국의 역량 부족으로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는데 그래도 식민지 지배의 무의미함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협상을 통해 독립시킨 덕택에 별 유혈사태 없이, 식민국가들과도 영연방 같은 식으로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가장 사정이 나은 경우다.
  • 프랑스 제3공화국: 국가 대 국가로는 독일을 이길 수 없었으나, 그래도 충분히 버티기 전술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 사이 폴란드와 영국이 참전하게 되면 독일도 다른 지역 유지하느라 지쳐서 포기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정작 실전에 돌입하자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의 협공에 허망하게 패망하고, 프랑스는 전근대적인 군사 전략과 상상할 수 없는 삽질을 반복하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단 6주만에 패배하여 점령당했다. 수도 파리를 포함한 영토 북쪽 지역은 독일군에게 강제로 병합됐고, 남쪽 지역은 독일의 괴뢰 국가가 들어섰다. 뮌헨 회담에 참석했던 달라디에 총리는 정치범으로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프랑스 국민들은 전쟁에서 패한 죄로 독일에 인적·물적 자원을 엄청나게 바쳐야 했고, 그 결과 지독한 물자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특히 비시 프랑스를 독일이 점령한 뒤에는 그나마 형식적인 절차도 없이 대놓고 빼앗아갔으며, 프랑스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유대인들 중 4분의 1이 나치 말살수용소로 끌려가 떼죽음을 당했다. 다행히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았고, 샤를 드골을 비롯한 자유 프랑스군의 분투와 기민한 움직임으로 주요 승전국 지위를 취하고 빠르게 복구하여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서긴 했지만, 이후에도 이 당시의 패전에 따른 불명예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물론 식민지를 포기 못하겠다고 또 버텼는데, 결국 인도차이나 전쟁알제리 전쟁에서 패전하며 탈식민화를 거쳐야 했다. 그나마 서아프리카 지역에 아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나마 이 세력들 중 영국, 프랑스는 세계를 주름잡던 식민 제국에서 그럭저럭 옛날에 쌓아 올린 걸로 먹고 살면서 여전히 강대국의 지위는 유지하는 선에서 그쳤지만[40] 아래 리스트는 아예 장기적으로 외국에 의한 점령, 인종 청소, 대학살, 스탈린주의, 독재 등을 겪으면서 제대로 피박 뒤집어 쓴 경우들이다.
  • 나치 독일: 수데테란트와 체코를 집어삼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든 뒤 세력 확장을 더 계속하고자 1939년 폴란드를 공격했으나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맞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소련에 대한 공격으로 결국 사방에 적을 만든 끝에 양면전쟁을 불리하게 치르게 되었고 이후 미국까지 참전하여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 4개국의 협공을 받으며 전세가 더욱 더 불리해지다가 결국 1945년 패전하여 뮌헨 협정으로 뺏어먹었던 수데테란트 등은 물론이고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등 기존 영토들 상당수도 전부 잃어버렸다. 동독서독으로 나라 자체가 분단되어 버린 것도 덤. 그나마 냉전으로 서방과 소련 양측에서 지원을 받게 된 덕택에 국력은 오히려 나치 시절보다 더 올라갔고, 보태서 분단 역시 동서독 통일로 해결되었지만 그 대가로 기존에 폴란드에 넘어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은 영구히 포기하게 되었다.[41]
  • 폴란드 제2공화국: 독립 이후 체코와 영토분쟁을 겪었던 국경 지역의 작은 영토인 테셴 지역을 차지하고자 뮌헨 협정에서 독일, 헝가리 등 추축국 진영에 붙어서 테셴을 병합한 폴란드는 테셴을 합병한 것으로도 만족을 못한 나머지 야보리나, 토르스테냐 등 슬로바키아 국경 지역의 영토 두 곳을 슬로바키아로부터 추가로 더 뜯어먹었으나 1년 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가해자에서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은 되찾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독일과 소련에게 여러 차례 정복과 점령, 분할, 심각한 인구손실[42] 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나치로부터의 해방 과정에서 신세를 진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냉전 시기 소련의 위성국으로 4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
  • 헝가리 왕국: 루테니아,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 등 영토를 좀 얻었지만 결국 독일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나서다 신나게 털리고, 소련군에게 영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남부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를 포함해 2차대전 당시 얻었던 영토들을 모두 잃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 1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었다.
  • 이탈리아 왕국: 회담의 협상 중재자를 자처하며 사실상 독일을 편들어 독일의 수데테란트 병합을 눈감아주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나 오히려 가장 먼저 항복하며 패전국이 되었고 독일과 추축국의 편에 서며 전쟁을 일으켰던 독재자 무솔리니는 실각 후 반정부군 세력에게 붙잡혀 총살당했으며 무솔리니의 내각 장악과 전쟁 참전을 승인했던 이탈리아 왕실은 전후 국외로 축출되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43]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력과 산업 기반을 재무장과 군사력 유지를 위해 아주 쏠쏠하게 써먹었다. 물론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에게는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강제노동을 하라는 의미였다. 그나마 체코슬로바키아 인들은 이렇게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되어 독일과 폴란드의 말살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학살당해야 했다.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긴 했으나 독일군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뒤이어 소련군이 자국 영토로 들어와 루테니아를 빼앗기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이후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민족, 국가간의 분쟁이 불거지다가 아예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각자 분리 독립해 버렸다. 서로 원해서 분리 독립했기 때문에 감정은 나쁘지 않은 편.
  • 수데테란트: 국가는 아니지만... 독일에 병합된 이후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유권이 체코에게 다시 넘어갔고 전후 체코인들의 분노에 찬 보복을 받았다. 상당수가 매국노로 간주되어 소련군과 새로 들어선 체코 정부가 제지에 나설 때까지 린치 내지 학살을 당했고,[44] 이후 추방령이 내려져 결국 대부분의 수데테란트 거주 독일인들은 재산은 한 푼도 못 가지고 정든 고향을 뒤로 한 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떠나야만 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독일인들의 자업자득.[45]
  • 스페인 제2공화국: 회담의 주된 주제도 아니고, 중부 유럽의 문제에 실려 논의된 수준에 불과했지만 1937년 5월 이후 정치적, 군사적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반파시스트 국제 여론을 통한 외교적 승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공화파의 희망을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히틀러가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메세지를 통해 완전히 박살냈고, 소련의 대 공화파 지원이나 프랑스의 비정기적이고 간접적인 지원 또한 끊어버렸다. 뮌헨 협정의 회담을 보고 전쟁이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한 공화파 지도부는 곧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국제 여단 의용병들을 해산하고 각각의 조국으로 보냄으로써 실질적인 패전이 확실시되었다. 이후 몇달 후인 1939년 봄 마드리드가 함락당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공화국의 시체 위에 파시스트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내부 재건을 명분삼아 히틀러가 원하는 전쟁 참전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체제가 나머지 유럽의 전쟁이 끝나고도 30년이 넘게 지난 1975년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뮌헨 협정에서 교훈을 얻은 국가도 있었다.
  • 미국: 미국은 협상의 해당국은 아니었으나, 뮌헨 협정을 비롯한 이 시기 미국의 대유럽 경제/군사/외교 정책이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고난 이후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 때문에 미국은 국제연합의 창설 멤버이자 강력한 권력을 가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국제연합에 가입했으며, 각지에 미군을 직접 주둔시키고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해 서유럽과 북유럽 각국의 안보를 공동 책임의 형식으로 미국이 직접 강력하게 보장해주기 시작했다. 또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형성을 통해 미국이 막강한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유럽과 미국 사이의 대서양 항로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며, 동시에 미국이 자유무역 체제의 중심이 되어 유럽 각국의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과 이외 국가들 간의 자유로운 무역과 교류를 미국이 옹호하고 보장해주겠다고 선언하였다. 즉, 다시는 나치 독일과 같은 존재가 유럽에서 등장해 평화를 위협하지 않도록 사회/경제/군사/문화/정치적 안전과 자유를 미국이 직접 보장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한 소련의 바람 및 요청과 달리, 냉전 초 독재 국가인 소련과의 비타협 노선을 선택하며 마셜 플랜 등을 실시하며 서유럽의 경제적 부흥과 재무장을 이끌었다.[46]
덤으로 '''비회원국이 무섭다고 회원국을 팔아먹는데도''' 침묵한 국제연맹도 망했다. 물론 국제연맹은 이전부터 지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국가들 때문에 식물연맹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어느 정도의 기능이나마 회복한 건 국제연합(UN)으로 재창설된 이후. 이전과 달리 안보리 상임이사국 제도 등을 도입해 더욱 강력해졌고, 상임이사국들도 어느 정도 UN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실효적 효력을 지니기도 했으나, 냉전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국제연합의 위세는 크게 압도적이지 못했고 지금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사실 상임이사국들조차 미국, 중국과 다른 3개국의 격차가 극도로 커지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미국에 목소리도 제대로 못내고 있는 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르듯 이 조약을 '''뮌헨의 배신(Mnichovská zrada)''' 혹은 '''뮌헨의 강요(Mnichovský diktát)'''라고 한다(우리식으로 따지면 뮌헨'''늑약'''쯤 된다). 한편 처칠이 뮌헨 협정을 반대하고 결국 전쟁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켜 준 은인이기 때문에 체코 및 슬로바키아에서는 처칠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한다. 반면 기존 서유럽 강대국연합국에 대해서는 불신이 팽배하며, 독일이라면 아예 이를 간다. 물론 이유는 좀 다르지만 러시아도 독일 못지않게 싫어한다.
이처럼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에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현실화했다는 호된 비판을 받지만, 당시에 협정 조인 때만 보면 성공적인(?) 협정이었다. 독일은 히틀러가 원하던 독일 민족의 영역을 신성 로마 제국 수준으로 확보했고 중부유럽을 사실상 통일하다시피 해서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일단 전쟁을 피했다. 만일 여기서 히틀러가 만족하고 내치에 힘쓰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면 합스부르크 이후로 최대 영역 확보와 30년 전쟁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에 의해서 파괴된 과거 독일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유능한 정치인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공산주의와 맞서려는 유럽 내의 맹주로 부상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히틀러가 거기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쟁도 없이 땅을 먹었다고 좋아하기는커녕 "멍청한 무솔리니와 약아빠진 체임벌린 때문에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킬 구실을 잃었다." 며 짜증을 냈고, 반년도 되지 않아 슬로바키아 분리주의자들을 부추겨 독립을 선포하게 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구실을 만들어 협정 당시의 약속과 달리 체코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에까지 그단스크(단치히)와 프로이센 북동부 해안선에 대한 영토 반환 요구를 하면서 협정은 완전히 무산되고 만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 대해 해상 봉쇄 등의 온건책을 펴기로 하자 선제 핵공격 등 강경책을 주장하던 커티스 르메이가 이 사건을 언급하며 온건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 르메이의 이 비판은 단순한 비판 수준이 아니었다. 존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체임벌린 정권의 대독 유화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커티스 르메이는 케네디에게 "뮌헨 협정 당시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저들에게 유화책을 쓸 참인가?"라고 깐 것이다. 또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이었는데, 대독일 유화책을 지지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졸업 논문을 통해 유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었다. 실제로 그의 논문은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때문에 케네디 입장에서 자신이 유화주의자라는 비난은 더더욱 모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을 들은 케네디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21세기 현재에 분쟁 중인 국가와 세력들 간의 (한쪽의 항복 협정이 아닌) 평화 협정 결정을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 원흉이 되어버린 협약이다. 실제로 국제 분쟁 간의 평화 협정 떡밥이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론 사례가 바로 이 뮌헨 협정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전쟁 발발의 과정이 된 뮌헨 협정이 재조명되어 국제관계에서 독재 국가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거절하고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이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대응한 것으로, 이후 소련은 약소국을 한 나라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하다 '''제2의 체임벌린'''이란 비난을 받고 싶은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 또한 사방이 적국인 이스라엘도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자국 안보가 무너진다며 항상 긴장을 놓치 않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화를 위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예시로) 만약 이 조약 없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도, 심지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수많은 죽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비록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1년 먼저 시작된 비극이었을 뿐이지만.[47]
간혹 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이란 가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정이었는지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뮌헨 조약 이후 소련의 독촉으로 소영프 3국간 회담을 열었는데, 이 자리는 소련이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동맹의 확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시점에서도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이 고작 '''4개 사단'''이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면서 영국의 전쟁 동원 능력의 현실을 드러내 보였다.
(소련
"우린 20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소."
영국
"우린 8개 사단."
"...뭐?"
"사실은 4개 사단."
"...."
"사실에 사실은 제대로 무장한 건 2개 사단..."
프랑스
"우린 40개 사단."
"오? 선녀같네."
"근데 마지노선 밖으로는 못나가."
"...")
그리고 여기에 열받은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회답. 실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가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병력과 장비 모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근 8개월 간 전투가 전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프랑스보다도 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이 가용한 병력은 불완전하게 준비된 36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는 프랑스가 당장 운용 가능한 40개 사단과 영국의 4개 사단,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20개 사단에 한참 못 미치는 전력이었다. 이렇게 된 건 히틀러가 1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 때문에 독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군비를 증강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군비지출이 많지 않아서였다. 독일이 전쟁을 수행해 볼 만하게 된 것은 6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해진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시점이었고, 그나마도 체코의 산업시설을 돌려서 생산한 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후일 15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하게 된 바르바로사 작전은 유럽 거의 전역을 수탈하여 얻은 막대한 자원과 산업기반, 노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례로 폴란드 침공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체코제 35(t) 전차와 38(t) 전차[48]는 독일 기갑사단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 당시 군사력 균형은 아무리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훨씬 유리했으며, 독일군은 1940년 프랑스 전역 직전이 되어서야 수적으로나마 프랑스군-영국군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 보태서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너무나 무능한 모습을 보인 덕택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영프가 괜히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겁을 내서 양보하기보다 단단히 각오하고서 1938년에 전쟁을 벌였으면 나중에 질 때 지더라도 최소한 1940년처럼 어이없는 패배는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상당히 의외의 이야기지만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서 완벽한 외교적 승리가 될수 있었다. 히틀러는 영-불 측이 안일한 이상주의에 빠져 있을 동안 그들을 이용해서 국력을 팽창시킬 수 있었고 뮌헨 협정은 그것의 대표격으로 볼 수 있다. 헨리 키신저는 만약 히틀러가 뮌헨 협정 단계에서 팽창을 멈추고 영국과의 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면 독일의 국력은 유럽의 그 누구도 막지 못할만큼 강대해졌을 것이라고 평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나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던 것 자체는 사실이고 주변 독일계 주민들을 이용해서 소국들을 하나 둘 병합은 아니라도 친독성향으로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유럽의 제1대국이 됐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그래봤자 독일은 몰라도 히틀러는 절대 그런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히틀러 본인이 국내 혼란에서 독일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저런 뻥카를 걸었는데 그만 둔다고 하면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당장은 영토를 확장시킨 일로 권좌를 지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국내의 혼란을 히틀러의 능력으로 누를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을 테고 다른 사람에게 지위를 뺏겼을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독일 국내를 통치할 만한 통찰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도박과 같은 방법은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무난하게 성장했다면 결국 샌드위치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프랑스는 6주컷을 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전선을 형성하기만 해도 독일과 1년단위로 싸울 체급을 가졌고 폴란드라는 지역강국도 나는 독일이 싫어요를 외치는 중이며, 무엇보다 소련의 체급은 이미 넘사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유럽을 모조리 잡아먹은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소련군을 수백만 단위로 격파하고도 새로 뽑혀나오는 수백만 인민 웨이브에 휩쓸렸는데, 무난하게 성장한 독일이 전력의 반을 프랑스 국경에 배치했다면, 나날이 강해지던 소련군의 인민 웨이브를 얻어맞고 막고 막고 막다가 결국 베를린까지 밀렸을 가능성이 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점령했던 수데테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되었으며, 헝가리가 점령했던 남슬로바키아도 반환되었다. 다만 폴란드에게 점령되었던 테셴은 국경 도시로나마 국경 재조정을 거친 후 일부가 전후 폴란드 영토로 남았으며[49]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고 있던 루테니아는 헝가리의 점령에서 벗어나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어 독립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인 자카르파탸 주(Zakarpattia Oblast)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는 한동안 슬로바키아 고유의 상징인 쌍십자에서 나치 시절 괴뢰정권이 연상된다 하여 금지시키고 불꽃 모양(이 불꽃 모양은 1944년 나치 괴뢰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를 상징한다고 한다)으로 한동안 대체했다가 민주화 이후에야 쌍십자 상징이 부활했다. 물론 종교적 상징물을 부정하는 공산 정권 눈에 십자가가 아니꼽게 보인 탓도 있었다.[50]
그리고 이 사건 등을 통해 범독일권에 속해있음으로 인해 언제든 독일의 침공 명분에 걸려들 수 있음을 인식한 주변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전후해 독일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작업에 착수했다. 게다가 전쟁기 거주 독일인들은 극렬한 친나치 행보를 보인 건 물론이거니와[51] 매국행위를 매우 적극적으로 행했고 체험한 시민들의 적대감은 이런 작업에 더더욱 불을 붙였다. 이 시기에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중부유럽과 동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던 독일인들이 무일푼 맨손으로 거의 다 서독이나 동독으로 추방되었고, 수데텐란트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곳곳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 또한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다른 민족들을 탄압한 것에 당하며 분노가 쌓일대로 쌓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의 공격을 피해 황급히 서독이나 오스트리아로 탈출하여야 했다. 이후 영토 문제나 일부 재산권 문제, 그리고 침공 피해 국가들에 대한 피해 보상 문제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완전한 포기 선언과 대대적 사죄 정책 추진으로 본격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하기 전까지 서독과 각국 사이에 잔존했다. 현재에도 추방 당시 독일인들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도망치면서 남기고 간 재산권의 문제, 그리고 독일인들의 귀환 및 재정착 가능성 문제가 독일과 각국 사이에서 때때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겹쳐져 오늘날에도 체코와 폴란드 지역에서 반독일/반오스트리아 감정은 상당한 편이다.
사실 독일인들이 배상 이야기를 까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2차대전 이후 독일이 전쟁배상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 당시 가혹한 배상금이 독일인들을 자극한 점이나 경제성장을 하려면 일단 자본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번에는 배상금을 독하게 받지 않고, 경제가 회복된 뒤 소련만 적당한 액수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독일은 전쟁배상 등 전후청산을 적당히 넘기는 대가로 기존에 빼앗긴 영토와 추방된 독일인 문제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없어졌다. 이후 피해국가와 독일 사이에 국가간 협정으로 배상이 이뤄지긴 했으나 이러한 이유로 피해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는데, 만일 독일이 실향민 문제와 영토 문제를 걸고 넘어지면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이 당연히 독일 측에 제대로 배상하라고 청구서를 내밀 것이 분명하고, 독일인들이 2차대전 당시 저지른 만행이 어마어마한지라 배상을 받는다 쳐도 독일인들이 그 몇배로 배상금을 피해국들에게 물어야 할 게 분명한지라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8. 녹색 상황



대전 후 사학계의 주류 학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하고자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9. 관련 문서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뮌헨 회담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정치행정 분야)뮌헨회담
(동유럽사)외교 정책과 뮌헨 위기
(네이버 조약사)뮌헨 협정
(한국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영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1] 데이비드 로우 화백의 작품. 폴란드 침공 항목 첫 번째에 있는 만평을 그린 인물이다.[2] 출처. 여기에도 나오듯이, 본래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를 위한'(for our time) 평화라고 말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말은 '우리 시대의'(in our time) 평화라는 문구로 기억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는 않지만...[3] 출처.[4] 조금 의역해서 불명예와 전쟁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다 택했다고 하는 버전도 있다. 공교롭게도 히틀러는 프랑스 함락 직후 "미스터 처칠은 나를 믿어야 한다. 독일과 영국이 전쟁을 계속한다면 둘 중 하나는 파멸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영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그러나 처칠은 뮌헨 협정 당시의 소신을 지켰고 결과는... 물론 좀 더 상세히 적자면 전쟁 초기 노르웨이 전역의 패배와 영국의 고전은 처칠이 불러온 거라 처칠도 큰 소리 칠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5] 이러한 표현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녹색 작전 항목을 참조. 영국과 프랑스는 이 협정 이후에도 먼저 협정을 체결하자고 다가왔던 소련을 개무시하면서 외면하자 여기에 정이 확 떨어진 소련이 '저 놈들이랑 손을 잡느니 나치랑 손을 잡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고, 거기다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폴란드가 절망적으로 처절하게 버티며 도움을 요청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외견상 선전포고만 한 채 1년 동안 가짜 전쟁으로 독일에 대해 몸을 사리기만 했다. 결국 프랑스는 나라가 나치에 넘어갔고, 영국은 나치의 폭격과 봉쇄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두 나라는 간신히 승리한 후에도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주의 강대국에서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 소련의 눈치를 살피는 신세로 전락했다.[6] 서슬라브족 중심의 대 모라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7] 예컨대 16세기 이전까지 보헤미아 왕국이 영향력을 미치던 보헤미아 외 모라바(모라비아), 실레시아(슐레지엔)를 포함한 영토가 곧 체코가 된다. 아예 제대로 된 본체도 없었던 슬로바키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보헤미아 지방(라틴어 명칭)을 부르던 원어명인 체히, 체코를 사용하는 건 체코의 다른 지방에겐 약간 불만이 되는데, 어느 순간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체스코'란 단어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8] 체코인이 보헤미아 왕국으로 1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해오던 반면 슬로바키아인은 11세기 경부터 900년 넘게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 왔다. 대 모라비아 왕국 이래 이들이 한 나라의 주 민족이 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이었다.[9] 서쪽으로는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남쪽으로는 스위스와 발칸 일부 지역,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 일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게르만인 거주권. 발칸 북부와 벨라루스/우크라이나 그리고 일부 러시아 지역의 경우 동방 식민 운동 등으로 독일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한 지역이어서 제법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거주하며 주요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다.[10]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우선 고립주의 여론이 절대 다수인 상황에 더해, 독일계 미국인들이나 극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독일과의 화합을 주장하는 파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제법 수가 되었고 활동력 또한 엄청났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도 독일과 관련된 문제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여론이 참전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 연방 정보 기관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이들 친독/친나치 조직들을 제압하여 해산하는 것이었다.[11] 제 1조의 내용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한다."였는데, 이 조약문 어디에도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지키게 할 것인지, 이를 지키지 않은 국가가 등장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이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상 말 그대로 듣기 좋은 말만 옮겨 놓은 도덕책과 같은 조약이었다. 이후 이 조약을 비준한 독일이나 일본이 이 조약으로부터 이탈할 때 서면 규탄서 전송을 제외한 어떤 조치도 실시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효력이 상실됐다.[12] 특히 단치히 자유시가 문제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13] 메멜 지방. 1939년 3월에 결국 삥 뜯었다.[14] 쥐트티롤, 1943년 이탈리아 항복 후 성립된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압박해 독일로 편입시켰다.[15]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항복하자 취리히, 루체른등 북부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스위스가 독일 편에 붙든지, 아님 독일어권 지역만 이라도 독일에 합병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16]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 속한 티롤 3지방 가운데 중부인 보첸 현.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대가로 얻어냈다.[17]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인들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서 독일인의 공무원 채용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독일인들의 불만사항 중 하나였다.[18] 독일의 전쟁 준비는 이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당시까지도 제대로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반대하다가 사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히틀러의 결단도 어부지리격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점이 있는데, 만약 독일이 전쟁 준비를 마친 후 침공했다면 소련군의 현대화, 미국의 핵개발 등이 완료되어 더욱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 그나마 지켜진 영토문제도 '''1개월도 안 돼서''' 헝가리 왕국루테니아를 합병하고 '''6개월 후에''' 나치 독일체코를 완전히 점령 및 자국 영토로 재편하고 슬로바키아를 분리독립+괴뢰국화 라는 '''환장의 콜라보'''를 시전하면서 백지화 되었다.[20] 루테니아는 독립 국가로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한 달만인 11월에 수도 우주호로트를 포함한 남부의 대부분 영토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배상협정에 의해 헝가리로 넘어갔으며,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에 가담한 헝가리에 의해 나머지 전부가 날아갔다.[21] 이것도 6개월 후에 히틀러의 독일군이 체코를 완전히 점령하고 괴뢰국인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을 세우면서 없던 것이 되었다.[22] 참고로 이 때 영토를 강탈당하면서 체코 쪽에 몰려있던 '''세계최고 수준의 중공업 단지와 막강한 방어력을 가진 요새들까지 한꺼번에 독일에게 넘어갔다'''.[23] 참고로 당시 폴란드는 나름 군사강국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현재 NATO의 동유럽 전진 기지와 같은 위치가 아니라 독립하자마자 연이은 전쟁과 독재로 속은 곪을대로 곪아있던 동부 유럽의 후진국이였고 독립하기 이전부터 딱히 경제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체코슬로바키아만큼 발달된 국가는 아니었다.[24] 근데 황당한건 영-프가 그렇게나 두려워 하던 독일도 전쟁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25] 이렇게 막강한 폴란드군 이미지는 1921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련군이 개관광 타면서 생겨났다. 이후 폴란드는 이후 경제력 등의 문제로 인해 시대의 급격한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고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의 동맹국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이 건에 관해서는 폴란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불길함을 감지하고 프랑스에게 먼저 대독 양면전쟁을 제안했던 것은 다름아닌 폴란드였다. 즉 독일이 사고치기 전에 프랑스와 폴란드가 힘을 합쳐 먼저 예방전쟁을 벌이자는 것. 하지만 침공의 명분도 없는 상황인데다 프랑스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폴란드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폴란드는 소련과도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즉, 폴란드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와주고 싶어도 그놈의 불가침조약 때문에 독일을 견제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게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동참한 걸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하지만.[26] 이런 판단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타격으로 말미암은 사회 혼란은 결국 러시아와 스페인에서처럼 사회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영국과 프랑스 내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공포에까지 나아가곤 했다.[27] 다만 1930년대 중후반 시점의 소련은 여러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겪고 막 경제를 정상 가도에 올리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이해가 바탕이 있어야 독소전쟁 초기 독일의 우세와 이후 1942년부터는 더 이상 독일이 초기의 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처참하게 패배했는 지 이해할 수 있다.[28] 당시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경제 문제를 적절히 제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을, 중장기적으로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재생산할 수 있는,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민간 영역의 기초 인프라와 소비재 경공업 등 민간 소비 품목들을 생산하는 기초 산업 시설에 대한 투자에 집중함과 동시에,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야기하던 실업 및 저소득 문제 해결을 위한 복지 재원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했다. 실제로 미국의 뉴딜 정책도 이러한 기조를 골자로 진행돼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위에서 언급한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경제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는 커녕 잠재 성장률까지 까먹고 있었고 더해서 히틀러가 재무장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경제적 자원인 자본과 자원을 재생산 능력이 사실상 전무한 군수 분야에 쏟아붓고 있었고, 지속 불가능한 경제 구조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또한 재무장에 소모되는 자원들 중, 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던 석유나 철강, 식량은 해외 유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는데, 이들 자원들을 수입하는 데 막대한 자본, 특히 외화를 낭비하고 있었다. 폴란드 침공을 서두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점령지 자원 수급을 노렸기 때문.[29] 다만 후일 거의 혼자서 2차대전을 치른 걸 보면 위의 통계 마사지를 배제하더라도 독일의 경제 규모와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은 맞다. 더불어 식민지가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듯 독일도 여기저기 정복해서 얻은 점령지는 도움이 되긴 커녕 오히려 장애물만 되었다. 그나마 루마니아의 유전 등 추축동맹국들의 지원이 다소 도움이 되었으나, 언제까지나 동맹으로 지원을 받은 것이지 식민지로 지원받은 것이 아니다.[30]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이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는 있었으나, 어쨌건 세계 3위의 규모는 맞았고,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국민들의 생활수준이나 쌓아놓은 자산의 규모 면에서 뒤쳐진 것도 아니었다. 아예 가진 게 없으면 선전해도 먹힐 턱이 없지만, 뭔가가 있으면 통계 마사지로 뻥튀기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고, 괴벨스는 이런 일에 매우 능통한 최적의 인재였다.[31] 당시 영국 정치권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없어도 프랑스가 있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백만 대군을 보유한 유럽에서 손꼽히는 육군 강국인 프랑스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내부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군을 시찰한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백만 대군은 허상이었다며 크게 개탄했고 이것은 후에 프랑스 침공에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32] 실제로 미국은 영프독 삼국을 합한 수준의 경제력과 압도적인 모든 분야 생산 능력을 중심으로 막강한 국력을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드러낸 바가 있었다. 때문에 실제로 히틀러가 미국을 업신여긴 것과는 별개로, 독일 수뇌부도 만에 하나라도 있을 미국의 유럽 문제 개입 가능성에 대해 제법 중요하게 여겼고, 미국 내 여론이나 정치권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미국의 개입을 최대한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33] 이때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행한 조치 중 하나가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안을 부결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자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제창하여 창립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미국의 부재는 국제연맹이 식물 기구가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34] 실제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미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가 함락된 이후인 1941년 1월 6일 네 가지 자유로 널리 알려진 연두교서 발표 연설에서 유럽 등 전세계에서 커져가는 공포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압제 정치와 독재자들, 독재 제국을 언급하며 이에 미국이 적극적을 개입하여 대항해야 함을 암시하기도 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개입에 회의적인 여론이 조금 더 우세했다. 이런 미국의 기조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진주만 공습 사건이었다.[35] 물론 아래 언급되듯, 존 F. 케네디처럼 대독 유화책을 비판하며 미국이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존재하였으나, 아직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36] 이후 1938년 12월 1일에는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의 일부 지역이 추가로 폴란드에 흡수되었다.참고 1참고 2참고 3 [37] 폴란드 침공 문서의 풍자화를 그린 사람이다.[38] 폴란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통해 소련 서부의 영토를 얻었고, 뮌헨 협정 당시는 이 전쟁이 끝난 지(1921년) 2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대로 쌓인 민족 감정까지 겹치면서 폴란드는 소련을 불신하게 된 것. [39] 덤으로 이게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짐을 감안해 보면 더 실패인데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에 우려한 것이 양면전선이었기 때문.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서부전선은 영국과 프랑스, 동부전선은 러시아의 구도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건데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동부전선은 '일단' 발생하지 않았고 폴란드 침공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어 동부전선이 형성되는 약 2년 동안 독일은 폴란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정리해 이탈리아가 바보짓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을 형성하고 그리스 침공을 벌여야 하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최소한 제1차 세계 대전 때보다는 결과가 독일 측에는 좋긴 했다. 즉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동부에서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혹은 견제해야 할 폴란드와 소련이 각각 독소 불가침조약, 폴란드 침공, 독소 폴란드 점령으로 인해 독일을 견제하지 못하거나 견제하지 않음으로서 독일이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어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큰 업적을 달성할 수 있던 것. 만일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지 않았다면 독일은 소련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제1차 세계 대전의 양면전쟁의 부담을 다시 경험해야 했을 것이니.[40] 이들 두 국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2차대전의 승전국들이란 점(상임이사국)에서 발언권이 매우 컸고 2020년 현재까지도 유효한 상태이다. 구 추축국 중 독일과 일본은 핵을 제외하면 종합 국력에서 두 나라를 앞서고, 이탈리아도 한국을 상회 하는 수준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범국가들이라는 점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41] 물론 독일 내에서는 동프로이센 지역 등 독일 고유 영토 포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 미국도 전후 독일 영토 축소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조를 기대할 수 없을 뿐더러, 대놓고 엎어버린다고 쳐도 냉전 와중에 핵심 전범들만 일부 처형하고 동독만 소련에 배상금 좀 내고 어물쩡 넘어간 전쟁범죄 배상과 전후 청산 건도 동유럽과 구소련권 국가들이 통독에 다시, 그것도 제대로 들이밀 것이 뻔한데다 특히 동유럽권 국가들이 나치보다 소련이 낫다며 러시아와 붙어버리는 날에는 당장 독일-폴란드 국경이 최전선으로 바뀌게 되는지라 그냥 나치 탓만 하는 중.[42] 다만 폴란드 내 사망자가 많은 건 폴란드 자체 인구손실도 상당하지만 홀로코스트 수용소가 대부분 폴란드에 있었던 것도 컸다. 폴란드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상당수가 폴란드 내 전쟁 피해자로 기록되고 있다.[43] 실제 이탈리아 구 왕가의 귀국은 2002년에야 이뤄졌다.[44] 참고로 동프로이센이나 슐레지엔, 포메른 등 다른 구 독일령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은 이렇게 혹독한 대우는 받지 않았다. 체코에 살던 이들처럼 열성적으로 병합을 추진하는 등 매국 행위를 한 건 아니었기 때문. 물론 소련, 폴란드 측의 방침으로 결과적으로는 이들도 대부분 예로부터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독일 본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지만 그래도 현지인들의 분노가 체코보다는 덜했고, 소련도 강제이주 방침만 정했지 그 방법은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체코 수데테란트의 독일인 집단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45] 참고로 이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독일과 체코의 입장이 많이 다른데, 독일 정부는 체코 영토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인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가거나 이전 재산 소유권에 관한 소송을 거는 것 자체는 막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나 체코 측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2015년 수데테란트 지방에 속해있던 체코의 한 시의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강제 추방에 대해 사과하였다.[46] 다만 동시에 미국은 소련(냉전 종식 이후에는 러시아)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보장 범위를 적당히 조정했는데, 냉전시절에는 서독, 노르웨이, 그리스, 이탈리아 등 NATO 가입국들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속한 국가만, 그리고 탈냉전 이후로는 폴란드, 체코와 슬로바키아, 핀란드, 발트 3국 등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난 국가들을 추가하여 보호 범위에 집어넣고 그 외의 국가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러시아가 돈바스 전쟁을 걸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보호 대상에서 공식적으로는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7] 덕분에 일찍 일어난 전쟁처럼 만약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하는 소재로 나온 대체역사 작품도 나온 적이 있다.[48] 톤 단위의 무게라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자체에 괄호가 포함된다.[49] 더불어 슬로바키아 국경의 소규모 분쟁지역들도 모두 뮌헨 협정 이전의 국경으로 회귀하였다.[50] 비슷한 이유로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에는 십자가 상징을 금지시키고 방패형으로 생긴 헝가리 국기에 밀 이삭이 둘러진 상징을 사용했다.[51] 현지 독일인들이 나치에게 자신들을 "해방"해달라고 청원하며 독일의 침공을 부추긴 것은 예사로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계 민병대를 구성해 자국 군과 경찰, 공공기관들에 테러를 가하고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을 학살하는 데에 앞장선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