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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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2대 국왕이자 건길지. 분서왕의 장남. 백제 초기 왕 중 유일하게 이름이 한 글자인 왕인데 이름에 포함된 계(契)라는 한자는 계림유사에서 순우리말 "해"를 음차하는 데 사용됐다.
2. 생애
낙랑에 강경책을 고수하던 분서왕이 304년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당시에는 분서왕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 왕위는 비류왕에게 돌아간다. 비류왕은 한동안 끊어진 구수왕의 후계를 잇는 왕으로 여겨진다. 40여 년 후 비류왕이 승하하자 계왕이 고이왕의 후계를 다시 잇는다.
그러나 계왕이 2년만에 승하하면서 고이왕의 후계는 확실히 끊어졌다.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 4대에 걸친 고이왕계가 이렇게 끊어진 이후 백제의 왕통은 근초고왕을 중심으로 한 근초고왕계로 이어지게 된다.
계왕 사후 비류왕의 장남이 아닌 차남 근초고왕이 즉위하였고 근초고왕의 통치 노선이 비류왕보다 고이왕계와 더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직계로는 연관이 없지만 외척으로서 근초고왕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2.1. 가공인물인가?
계왕이라는 왕명 자체가 고이왕통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契(맺을 계) 자는 '끊을 결'로 읽을 수도 있는데 고이왕통을 단절하였다는 의미에서 근초고왕이 고이왕계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고 고이왕통을 단절시켰음을 천명하기 위해 결왕이라는 시호를 올렸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이 훈음은 아주 희귀한 거의 쓰이지 않는 용례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아직 중국에서 시호 제도나 피휘 개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왕의 실제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백제에서 국왕에게 올린 첫 시호는 동성왕이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실제로 이름이 초고, 구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편이다. 따라서 契를 고이왕통을 끝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안습한 속성과 즉위할 때 상당한 나이(최소 40대)를 가졌다는 것으로 보아서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즉위한 이후 임금으로서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즉위와 관련된 설명에 다소 어색한 부분도 있어 계왕이 실제로 존재했다기보다 후대에 백제 사람들이 왕실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건국 연대를 조정하기 위해 삽입한 가공의 인물이 아닐까 추측한 견해도 있다.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비류왕의 다른 이름 중 문휴해(汶休奚)[1] 가 있기 때문에, 계왕은 결국 비류왕과 동일인이라는 것. 그러나 불과 2년을 늘리려 하였다면 비류왕이나 근초고왕의 재위 기간을 늘리면 그만이므로 가공 인물일 가능성도 높지는 않다.
사실 이 정도 계보는 있을 만도 하다. 강직하고 용감하며 승마와 궁술 모두에 능한 왕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른 죽음이 아까운 인물이었으나 비류왕의 즉위로 부활한 초고왕계 왕족들에게 시해당했을 가능성도 높다.
2년 동안 집권했는데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도 계왕을 대표로 한 고이왕계와 비류왕 쪽 초고왕계 왕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집권 기간 내내 벌어졌고 권력 투쟁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사실 비류왕도 40년간 집권했는데 평화 정책을 계속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계속해서 권력 투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옛 역사서에서는 자연 재해를 내부 반란이나 권력 투쟁을 은폐하는 우회 서술로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비류왕 후반기에는 이런 자연 재해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비류왕도 정황상 깨끗한 최후를 맞은 것은 아니었기에 계왕이 시해했을 일말의 가능성을 본다면 계왕의 사망 이후 고이왕계가 완전히 백제 역사에서 퇴출되는 것은 근초고왕이 집권 후 고이왕계를 전면적으로 제거해버렸기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3. 현왕과의 동일인물설
일부 대륙백제를 신봉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계왕의 죽음을 대륙백제와 끼워 넣는다.
백제의 제8대 왕인 고이왕은 중국 산동 반도로 진출하여 대륙백제를 건설한다. 고이왕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평소에 국력에 대한 야망이 컸을 뿐더러 주변에 있는 중국 여러 나라를 견제함은 물론 중국 국가간의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반도의 백제에서는 고이왕계의 혈통과 귀족들 간의 불화가 있었는데 고이왕이 사망하자 유력 귀족 중 하나인 비류계가 이를 계기로 왕위를 찬탈한다.
위협을 느낀 고이왕계는 대륙백제에 건너가 대륙백제 왕이 되어 세력을 키워가고 한반도의 백제에서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대를 이어 가다가 한반도의 백제에서 왕인 비류왕이 사망하자 그의 자식이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반도의 백제를 점령하고 왕위를 되찾아 정식으로 즉위하는 것이 계왕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신변에 위협을 느꼈던 비류계 혈통 중 하나였던 근초고왕 또한 왕위에 올라 이를 계기로 계왕과 왕위를 가지기 위한 전쟁을 하였고 결국에는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계왕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록이 불분명하며 짧은 것, 이름을 모르는 것, 재위 기간의 햇수를 따져봐도 겨우 2년인 것, 근초고왕의 기록이 20년 이후부터 기록된 것도 후대의 왕족들이 그들의 혈통을 살해하고 기록을 지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허나 위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고이왕의 산동 진출부터 입증해야 하는데 사서 기록이나 유물로는 전혀 검증되지 않는다. 또한 부여의 현왕은 346년 전연의 공격을 받아 끌려간 것이지, 그 해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없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계왕 본기'''
一年冬十月 계왕이 즉위하다
三年秋九月 계왕이 죽다
추가로 삼국사기는 제사 편에 옛 기록을 인용한 재위 2년(345년) 여름 4월에 동명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사반왕 다음으로 기록이 적은 왕이다.
5. 대중 매체에서
5.1. 드라마 근초고왕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한진희가 연기하였다. 위례궁과 고이왕통의 수장인 위례궁주의 작위를 지닌 것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계'가 본명임이 사실상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부여준'이라는 생뚱맞은 가명을 지어주었다. 제작진이 '부여'가 아니라 '부'를 성씨로 착각했는지 비류왕도 마찬가지로 '부구태'라는 엉뚱한 이름을 받았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간 비류왕과 으르렁거리다가 비류왕의 아내인 해비 해소술(최명길 분)과 모의하여 비류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얻는다. 이때 비류왕의 장자인 부여찬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며 해소술을 속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40년을 절치부심하여 왕권을 되찾았으나 태자 자리를 두고 부여찬과 자신의 장자인 부여민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부여준은 내심 친아들 부여민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으나 해소술이 비류왕을 시해했다는 것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할 수 없이 부여찬을 태자로 세운다. 설상가상으로 요서에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여 대방으로 돌아온 부여구의 군대와 고구려군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부여준은 부여구를 자기 손으로 제거하고자 친정을 선포한다. 대방으로 떠나기 전 자신이 죽으면 해비와 부여산(비류왕의 3남)을 죽이고 부여민을 왕위에 올릴 것을 명령하나 밀지가 해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해비는 부여준도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해비는 비류왕이 죽기 전에 남긴 조서(부여찬을 태자에서 폐함과 동시에 사사하고 부여구를 왕위에 올려라)를 몰래 빼돌리고 그 과정에서 부여준의 아내인 소해비(해비의 동생이자 부여민의 어머니)에게 칼빵을 먹이고 부여준을 만나러 대방으로 쫓아간다. 해비는 어차피 자신은 부여준 손에 죽어야 하니 죽기 전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부여준을 꼬드기고 술에다 독을 탄다. 부여준은 뒤늦게 독주를 마셨다는 것을 알고 해비를 족치려 하였으나 독이 퍼져 혼수 상태에 빠져버린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나 독주를 너무 많이 마셔버린 부여준은 회생 불능이었고 부여찬과 부여민이 자신의 사후 백제를 반분하여 한성(지금의 서울)과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나누기로 했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한다. 부여준은 백제가 쪼개지면 고구려에게 백제가 망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복인 해건에게 부여구를 왕위에 올려 분열을 막으라 명한다. 신속하게 부여구에게 왕위를 넘기기 위해 부여준은 해건(이지훈 분)에게 자신을 죽이고 옥새를 가져가 부여구에게 바치라 비밀리에 명한다. 해건은 부여준의 가슴을 칼로 찔렀고 부여준은 그 자리에서 서거하고 만다.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연기는 위례궁주로서 은인자중하다가 비류왕이 죽게 되자 부여구의 목숨을 구하려 한 비류왕의 아버지인 흑강공 사훌(서인석 분)을 옛날 자신이 당한 그대로 머리를 꿍꿍 찧으며 절하게 하는 장면이다. 결국 흑강공도 이마가 피투성이가 된다.
김지수가 연기한 부여화의 아버지로 비류왕의 뜻으로 부여화가 고국원왕의 부인이 될 때도 원통해한다."원하지요. 미친 듯이 원합니다. (중략) 늙어서 기억이 희미해지셨습니까.. 이 부여준이 그렇게 뻣뻣했습니까. 이마를 바닥에 깨고!!!! 울며!!! 애원하였습니다! 이마 깨지는 소리를 그대는 못들으셨던가!!!!! 내가 쏟은 한되의 피는 어디 갔던가!!!!!!!!!!"
부여구가 팽창을 추구하는 정복 군주라면 부여준은 내실을 중시하는 군주이다. 이것을 위해 부여준은 고구려와 화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여준의 여러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왜 고구려를 돕냐는 대신들의 질문에) "백제는 예맥족이 아니더냐. 고구려는 백제의 방패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고 방패가 없으면 창이 고달픈 법이다. '''연이 고구려를 삼키고 나면 그 다음은 어디겠느냐. 우리 백제가 아니겠느냐!!!'''"
'''"너희 초고왕통은 언제나 여구 네 놈과 똑같았다! 무슨 놈의 피가 절절 끓는지 전쟁! 전쟁! 전쟁! 땅을 넓혀야한다! 고구려와 싸워야 한다! 밭을 갈아야 하는 장정들을 데리고 전쟁만 한다고 강대국이 되느냐! 앞뒤없이 전쟁만 한다고! 부강대국이 되느냐!!!"'''
'''"멀리 뻗어간다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내실이 튼튼해야 한다."'''
'''"간만 크다고 대인배요? 소국이 소국임을 모르고 대국 흉내를 낸다고 진정한 강대국이 되는거요? 이 모든것이 백제를 위해서임을 어찌 모르시는가!!!'''
'''이 부여준, 비류와는 다르다. 지키지도 못할 땅을 끝없이 탐하고 탐하면 종말에는 파멸이다.'''
'''나는 백제의 내실을 기하자는 것이다! 전쟁을 막고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