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몽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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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지도자(대령) 시절의 몽케.
빌헬름 몽케(Wilhelm Mohnke)
(1911년 3월 15일 ~ 2001년 8월 6일)
1. 개요
2. 입당 및 대전기
3. 전후
4. 매체에서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당시 무장친위대 장군들 중 하나.
빌헬름 몽케는 무장친위대의 가장 젊은 장성들 중 하나였다. SS의 규모가 작았던 극초기부터 SS에 몸담았던 초기 인물 중 하나이다.

2. 입당 및 대전기


고등학교를 졸업한 1931년 9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다음 친위대에 입대했다. 1933년 3월 17일에 요제프 디트리히가 총통 히틀러를 경호하는 경호대를 편성하자 경호대원으로 선발되면서 친위대 소위로서 임관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LSSAH연대의 제 5중대장으로 종군하여 제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1940년의 프랑스 침공시에는 대대적으로 다짐했는데, 이때 휘하 부대가 영국군 포로 80명을 학살하면서 학살 논란의 첫 단추를 꿰게 된다.
1941년의 발칸반도 전쟁에서는 4월 6일에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다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었으며,1943년에는 친위대 중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제 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제 26 장갑척탄병 연대장이 되었다. 1944년 6월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공로[1]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LSSAH 기갑사단장으로 재직시이던 12월 16일에 아르덴 대공세에서는 예하 부대가 말메디 학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후 친위대 소장으로 진급했으나 1945년 2월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났고, 베를린 총통관저로 전출되었다.
4월 22일 베를린 공방전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로부터 총통 관저를 포함한 티어가르텐의 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된 몬케는 9개 대대로 몬케 사단을 편성하여 히틀러의 직접 지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고,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 베를린을 탈출하려던 몽케는 소련군에게 붙잡혀 NKVD로 넘겨져 강도높은 심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3. 전후


이후로도 히틀러 관련자라는 이유로 모스크바 인근 굴라그로 압송되어 6년간 KGB의 강도높은 심문을 받았으며, 1955년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소련 방문으로 서독소련간의 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같은해 10월 10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서독으로 송환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함부르크로 돌아가 화물차 판매 사업을 시작하였고, 몇차례 포로 학살의 책임자로 소환조사를 받았으나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2] 2001년 8월 6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화물차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며 딜러로 살았다.
슈츠슈타펠의 장성급 지휘관중에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 나치당의 득세부터 시작해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의 분단, 냉전과 독일 재통일은 물론 통일후의 혼란으로 인한 기민련의 몰락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집권, '''유럽연합'''까지 지켜보았다.

4. 매체에서


몰락(영화)에서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것에 항의하는 훌륨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다만 실제 몽케는 전후에도 친위대 전우회를 다니며 열심히 네오나치 활동을 한 열성나치다.

[1] 이시기 휘하 부대가 캐나다군 포로 35명을 학살해 물의를 빚었다.[2] 포로 학살의 책임자지만 그 정도는 전시에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라 판단되어 따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