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이 하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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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보다는 링네임인 "마하"로 더욱 친숙한 선수다. 뛰어난 기량과 대인배적인 인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일본 경량급의 강자. 현 류가사키시의원이다.
유도를 수련하던 그는 MMA를 동경하여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의 Shooto에서 선수로 뛰기 위해 슈토 도장을 찾았다. 하지만 슛복싱 도장으로 잘못 찾아간 탓에 슛복싱을 먼저 익히고 2년간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
MMA 데뷔는 1996년 10월 Shooto 대회를 통해서 였는데, 여기서 데뷔전 상대로 만난 선수가 바로 우노 카오루였다. 둘은 훗날 Shooto를 떠받칠 기둥으로 성장하지만 이때는 모두 갓 데뷔전을 치르는 풋내기들이었고, 시합은 시종 하위에 깔려있던 하야토의 삼각에서 이어지는 암바로 인한 서브미션승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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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Shooto에서 무패행진을 거듭하여 1998년 5월 나카오 쥬타로를 만장일치 판정으로 물리치고 Shooto 미들급 타이틀을 얻는다. 1999년 3월에는 GT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0년 3월에는 가토 테츠지를 상대로 스플릿 승리를 거두며 Shooto 타이틀 방어에도 성공한다.[2] 2000년 12월에는 UFC 웰터급의 강자인 프랭크 트리그와 Shooto에서 대결해 2라운드에만 3번의 다운을 빼앗으며 KO로 승리하는 등 연승의 행보를 이어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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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Shooto에서는 타격으로 다운을 당했을 경우 카운트를 셌다
데뷔 이래 20전 18승 2무 14연승을 찍은 마하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것은 훗날 UFC 미들급의 우주요새로 각성할 앤더슨 실바였다. 2라운드 스탠딩에서 난타당했고 그라운드에서도 백마운트를 내준채 컷이 생길 정도로 파운딩을 엊어맞은 후 RNC를 잡혀 패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공 덕에 살아났다. 3라운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며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점수를 만회하지 못하고 만장일치로 패하고 말았다.
2002년 3월에는 UFC에 침공을 단행하여 웰터급 챔피언인 맷 휴즈와 맞붙었으나 휴즈의 레슬링과 근력에 밀려 4라운드 내내 하위에 깔려 파운딩만 얻어맞다가[4] 4라운드에 마운트를 잡혀 TKO로 패했다. 12월에는 다시 돌아온 Shooto 무대에서는 제이크 쉴즈의 끈덕진 그래플링에 말려 그라운드에서 완패하고 말았다.[5]
2003년부터는 Deep에서 경기를 가지다가, PRIDE의 경량급 리그인 무사도에 출전할 것을 발표한다. 2003년 9월 Deep 12에서 초난 료에게 광대뼈가 함몰당하는 부상을 입으며 시기가 늦춰지긴 했으나, 12월 PRIDE 2003 남제에 등장하여 타카세 다이쥬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PRIDE에서는 웰터급에서 주로 경기를 가졌는데, 원래 -76kg인 Shooto 미들급에서 뛰어온 그에게 -83kg의 PRIDE 웰터급은 버거운 듯 했다. 호드리고 그레이시, 크로슬리 그레이시 등에게 패하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보였고 마하 본인도 웰터급은 자신의 체격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했다.[6]
2005년 5월 -73kg 라이트급으로 하향을 단행하여 밀튼 비에이라에게 판정승을 거두었고, 8월에는 잠시 Shooto로 내려가 아직 신인이던 아오키 신야를 잡아냈다.
2005년 9월에는 PRIDE 2005 라이트급 그랑프리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UFC 초대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젠스 펄버였다. 펄버와 난타전에서 수차례 정타를 엊어맞고 다운까지 허용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체급빨로 깔아뭉개며 1라운드 니킥으로 인한 KO승을 거둔다. 2차전에서는 경량급의 '일본인 킬러'였던 요아킴 한센과 격돌하여 치열한 접전 끝에 다운을 따내며 근소한 차로 승리를 거둔다. 판정에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정작 한센은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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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남제에서 드디어 고미 타카노리와 PRIDE 초대 라이트급 타이틀, 2005 그랑프리 타이틀을 두고 맞붙었다. 그러나 테이크다운에 실패하며 오히려 밑에 깔려 파운딩에 난타당한 끝에 스탠딩에서 원투를 엊어맞고 KO로 패하고 말었다.
타이틀전에서 패했으나 이후에도 무사도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2006년 6월에는 올라프 알폰소를 1라운드에 KO로 보내버렸고, 8월에도 다시 승수를 추가했다. 2007년 2월에는 PRIDE 33에서 맥 댄지그를 맞아 타격으로 제압하며 라이트훅으로 실신 KO승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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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PRIDE가 도산하자 마하 역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UFC 등 여러 단체에서 오퍼가 왔으나 그가 선택한 것은 FEG 산하의 야렌노카였다.
2007년 12월의 야렌노카에서 전 Deep 챔피언인 하세가와 히데히코를 판정으로 쓰러뜨렸고[7] 2008년 3월 야렌노카의 후신으로 출범한 DREAM의 초대 대회에서는 몬마 히데타다에게 KO승을 거두었다. 5월 Shooto에서 데이비드 바론에게 길로틴으로 패했으나 DREAM 6에서 만만치 않은 선수인 히로나카 쿠니요시를 잡으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2월의 K-1 다이나마이트에서 만년 자버 시바타 카츠요리를 맛있게 시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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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DREAM의 웰터급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차전 상대는 과거 Shooto에서 싸웠던 적이 있는 아오키 신야였다. 초반 라이트를 휘두르다 테이크다운을 당해 밑에 깔리지만 곧바로 스윕에 이어 그라운드 니킥을 아오키의 안면에 꽂아넣으며 27초만에 실신 KO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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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강에서 만난,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마리우스 자롬스키에게 스탠딩에서 밀리더니 하이킥을 허용하며 1라운드 KO패를 당했다.
2009년 12월의 다이너마이트에서는 SRC의 고노 아키히로와 DREAM vs SRC 구도의 대결을 펼쳤으나 암바로 패하고 말았다. 2010년 5월에는 DREAM 14에서 닉 디아즈와 대결했으나 역시 잘 싸우다가 암바를 잡혀 패배. 2010년 12월 K-1 다이나마이트에서는 제이슨 하이를 상대로 판정패.
2011년 12월에는 겡끼데스까 오미소카에서[8] 초난 료를 맞아 레슬링에서 우세를 보이며 판정승을 거뒀다. 1,2 라운드를 레슬링과 그라운드에서 앞서며 가져갔고 3라운드에서는 초난의 타격에 밀리는 듯 했으나 종료를 1분 30초 남긴 상황에서 회심의 싱글렉을 성공시키며 굳히기에 성공. 지긋지긋한 4연패의 사슬을 끊으며 2년 만에 승수를 추가하게 되었다.
2012년 12월 31일 Dream 18에서 필 바로니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2013년 9월 29일 본인의 이름을 건 대회인 마하 마츠리에서 임재석을 상대로 은퇴 경기[9][10] 를 가졌는데, 초반 클린치에서 밀리며 TD를 당한뒤 풀 마운트를 뺏기고 암트라이앵글 초크를 잡히는 등 매우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라운드 탈출 이후 스탠딩에서 라이트 훅을 맞고 1라운드 TKO패를 당했다.관련기사.경기 영상
서로간에 모르는 상태라고는 하나 그래도 경기 준비는 했던 마하에 비해 임재석은 세컨으로 왔다가 갑자기 불려올라가는 바람에 바지를 빌리고 마우스피스를 사야했던 상태였으니 누가 봐도 마하의 대굴욕이라고 봐야 할 상황. 톡톡히 망신을 당한 마하는 은퇴까지 번복하는듯한 인터뷰를 남겼다.
유도와 슛복싱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스탠딩 타격이 매서우며 한번 흐름을 타면 폭발력이 대단하다. 그래플링 쪽도 약하지 않아서 1999년 아부다비 무제한급에서 리코 로드리게스를 누르고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나다. MMA에서는 TD 능력과 상위에서의 무서운 파운딩으로 이름을 떨쳤다. 링네임인 "마하"답게 박진감 넘치고 폭발적인 경기운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선수.
약점을 꼽자면 TD와 서브미션 방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확실히 레슬링이 최정상급에서도 통할 정도로 좋은가 하면 그건 아닌데, 여기에다 서브미션에 대한 대처능력이 확실히 떨어진다. 그라운드에서 잘 싸우다가도 한번의 서브미션에 역전패를 내주는 경기가 많다.
2002 ~ 2003년 사이 여러 단체를 돌면서 적정 체급을 찾지 못하고 -83kg에서 -73kg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패가 쌓였던 적이 있는데, 이때문에 기복이 심하다는 평도 있다.
일본 웰터급에서는 명실상부한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세계 무대에서는 이런 단점들을 드러내며 한계에 부딪혔고 이후 전성기가 지나면서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2019년 4월 14일, 류가사키시의회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162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엔센 이노우에, 사토 루미나, 아사히 노보루 등과 함께 90년대 Shooto 4대천왕의 일원이다. 뛰어난 기량과 화끈한 경기운영, 후덕한 인품 등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선수 중 하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젊은 시절에는 미남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여성팬도 엄청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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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Shooto 시절
2006년 봄에 잠시 공백기를 가졌다. 당시 웹상에선 길에서 하야토가 일반인에게 구타당해 부당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실은 하야토의 인내가 돋보였던 사건. 길을 건너다 자동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는데 운전자가 도리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 하야토를 가격, 왼쪽 눈에 안와골절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에 이바라키현 츠치우라 경찰서 조사결과 드러나 하야토는 대인배로 칭송 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상대를 이승에서 삭제시킬 만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도가로서의 자존심과 상대의 안전을 위해 엄청난 인내를 사용한 것. 바로 다음 경기인 올라프 알폰소 전에서 화가 덜 풀렸는지 상대를 초살 실신 KO로 보내고 링위에 자신의 도장 관원들과 함께 서서 "최근 저에 관련된 소문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무도가로서 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폭풍간지 마이크웍까지 해서 타의 귀감이 되었다.
PRIDE의 남제나 K-1의 다이나마이트같은 대형 연말행사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자신의 모토가 "섣달 그믐날은 코타츠에서 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매우 솔직담백하다.
그런 이미지였는데 2008년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며 큰 곤욕을 겪었다. 꽤나 노골적인 행위가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었기에 당시 격투계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일단 여성팬이 엄청 떨어져나갔고, 일각에서는 "대인배인 척 하면서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다녔냐"는 투의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쏙 들어갔다[11] .
2010년에는 다시 노래방 비디오가 유출되면서 지독한 음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은 노래방에 간 것은 아니고 맷 브라운[12] 등과 함께 체험형 게임인 '밴드 히어로'를 플레이한 것인데, 일각에서는 '''섹스 비디오보다 이쪽이 더 심각하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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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의 안쓰러운 표정이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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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의 강아지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본명보다는 링네임인 "마하"로 더욱 친숙한 선수다. 뛰어난 기량과 대인배적인 인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일본 경량급의 강자. 현 류가사키시의원이다.
1. 전적
- 주요 승: 우노 카오루, 나카오 쥬타로, 마르셀로 아구아르, 가토 테츠지, 루이즈 아제레도(2), 프랭크 트리그, 데이브 메네, 타카세 다이쥬, 아오키 신야(2), 젠스 펄버, 요아킴 한센, 맥 댄지그, 하세가와 히데히코, 히로나카 쿠니요시, 시바타 카츠요리, 초난 료, 필 바로니, 사카타 와타루
- 주요 패: 앤더슨 실바, 맷 휴즈, 제이크 쉴즈, 초난 료, 호드리고 그레이시, 크로슬리 그레이시, 고미 타카노리, 데이비드 바론, 마리우스 자롬스키, 고노 아키히로, 닉 디아즈, 제이슨 하이, 임재석
- 무승부: 쿠와바라 타쿠야, 마르셀로 아구아르
1.1. Shooto
유도를 수련하던 그는 MMA를 동경하여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의 Shooto에서 선수로 뛰기 위해 슈토 도장을 찾았다. 하지만 슛복싱 도장으로 잘못 찾아간 탓에 슛복싱을 먼저 익히고 2년간 선수생활을 하게 된다.
MMA 데뷔는 1996년 10월 Shooto 대회를 통해서 였는데, 여기서 데뷔전 상대로 만난 선수가 바로 우노 카오루였다. 둘은 훗날 Shooto를 떠받칠 기둥으로 성장하지만 이때는 모두 갓 데뷔전을 치르는 풋내기들이었고, 시합은 시종 하위에 깔려있던 하야토의 삼각에서 이어지는 암바로 인한 서브미션승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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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Shooto에서 무패행진을 거듭하여 1998년 5월 나카오 쥬타로를 만장일치 판정으로 물리치고 Shooto 미들급 타이틀을 얻는다. 1999년 3월에는 GT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0년 3월에는 가토 테츠지를 상대로 스플릿 승리를 거두며 Shooto 타이틀 방어에도 성공한다.[2] 2000년 12월에는 UFC 웰터급의 강자인 프랭크 트리그와 Shooto에서 대결해 2라운드에만 3번의 다운을 빼앗으며 KO로 승리하는 등 연승의 행보를 이어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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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Shooto에서는 타격으로 다운을 당했을 경우 카운트를 셌다
데뷔 이래 20전 18승 2무 14연승을 찍은 마하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것은 훗날 UFC 미들급의 우주요새로 각성할 앤더슨 실바였다. 2라운드 스탠딩에서 난타당했고 그라운드에서도 백마운트를 내준채 컷이 생길 정도로 파운딩을 엊어맞은 후 RNC를 잡혀 패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공 덕에 살아났다. 3라운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며 반격에 나섰으나 결국 점수를 만회하지 못하고 만장일치로 패하고 말았다.
2002년 3월에는 UFC에 침공을 단행하여 웰터급 챔피언인 맷 휴즈와 맞붙었으나 휴즈의 레슬링과 근력에 밀려 4라운드 내내 하위에 깔려 파운딩만 얻어맞다가[4] 4라운드에 마운트를 잡혀 TKO로 패했다. 12월에는 다시 돌아온 Shooto 무대에서는 제이크 쉴즈의 끈덕진 그래플링에 말려 그라운드에서 완패하고 말았다.[5]
1.2. PRIDE
2003년부터는 Deep에서 경기를 가지다가, PRIDE의 경량급 리그인 무사도에 출전할 것을 발표한다. 2003년 9월 Deep 12에서 초난 료에게 광대뼈가 함몰당하는 부상을 입으며 시기가 늦춰지긴 했으나, 12월 PRIDE 2003 남제에 등장하여 타카세 다이쥬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PRIDE에서는 웰터급에서 주로 경기를 가졌는데, 원래 -76kg인 Shooto 미들급에서 뛰어온 그에게 -83kg의 PRIDE 웰터급은 버거운 듯 했다. 호드리고 그레이시, 크로슬리 그레이시 등에게 패하며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보였고 마하 본인도 웰터급은 자신의 체격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했다.[6]
2005년 5월 -73kg 라이트급으로 하향을 단행하여 밀튼 비에이라에게 판정승을 거두었고, 8월에는 잠시 Shooto로 내려가 아직 신인이던 아오키 신야를 잡아냈다.
2005년 9월에는 PRIDE 2005 라이트급 그랑프리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UFC 초대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젠스 펄버였다. 펄버와 난타전에서 수차례 정타를 엊어맞고 다운까지 허용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체급빨로 깔아뭉개며 1라운드 니킥으로 인한 KO승을 거둔다. 2차전에서는 경량급의 '일본인 킬러'였던 요아킴 한센과 격돌하여 치열한 접전 끝에 다운을 따내며 근소한 차로 승리를 거둔다. 판정에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정작 한센은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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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남제에서 드디어 고미 타카노리와 PRIDE 초대 라이트급 타이틀, 2005 그랑프리 타이틀을 두고 맞붙었다. 그러나 테이크다운에 실패하며 오히려 밑에 깔려 파운딩에 난타당한 끝에 스탠딩에서 원투를 엊어맞고 KO로 패하고 말었다.
타이틀전에서 패했으나 이후에도 무사도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2006년 6월에는 올라프 알폰소를 1라운드에 KO로 보내버렸고, 8월에도 다시 승수를 추가했다. 2007년 2월에는 PRIDE 33에서 맥 댄지그를 맞아 타격으로 제압하며 라이트훅으로 실신 KO승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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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DREAM
2007년 PRIDE가 도산하자 마하 역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UFC 등 여러 단체에서 오퍼가 왔으나 그가 선택한 것은 FEG 산하의 야렌노카였다.
2007년 12월의 야렌노카에서 전 Deep 챔피언인 하세가와 히데히코를 판정으로 쓰러뜨렸고[7] 2008년 3월 야렌노카의 후신으로 출범한 DREAM의 초대 대회에서는 몬마 히데타다에게 KO승을 거두었다. 5월 Shooto에서 데이비드 바론에게 길로틴으로 패했으나 DREAM 6에서 만만치 않은 선수인 히로나카 쿠니요시를 잡으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12월의 K-1 다이나마이트에서 만년 자버 시바타 카츠요리를 맛있게 시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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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DREAM의 웰터급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차전 상대는 과거 Shooto에서 싸웠던 적이 있는 아오키 신야였다. 초반 라이트를 휘두르다 테이크다운을 당해 밑에 깔리지만 곧바로 스윕에 이어 그라운드 니킥을 아오키의 안면에 꽂아넣으며 27초만에 실신 KO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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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강에서 만난,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마리우스 자롬스키에게 스탠딩에서 밀리더니 하이킥을 허용하며 1라운드 KO패를 당했다.
2009년 12월의 다이너마이트에서는 SRC의 고노 아키히로와 DREAM vs SRC 구도의 대결을 펼쳤으나 암바로 패하고 말았다. 2010년 5월에는 DREAM 14에서 닉 디아즈와 대결했으나 역시 잘 싸우다가 암바를 잡혀 패배. 2010년 12월 K-1 다이나마이트에서는 제이슨 하이를 상대로 판정패.
2011년 12월에는 겡끼데스까 오미소카에서[8] 초난 료를 맞아 레슬링에서 우세를 보이며 판정승을 거뒀다. 1,2 라운드를 레슬링과 그라운드에서 앞서며 가져갔고 3라운드에서는 초난의 타격에 밀리는 듯 했으나 종료를 1분 30초 남긴 상황에서 회심의 싱글렉을 성공시키며 굳히기에 성공. 지긋지긋한 4연패의 사슬을 끊으며 2년 만에 승수를 추가하게 되었다.
2012년 12월 31일 Dream 18에서 필 바로니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2013년 9월 29일 본인의 이름을 건 대회인 마하 마츠리에서 임재석을 상대로 은퇴 경기[9][10] 를 가졌는데, 초반 클린치에서 밀리며 TD를 당한뒤 풀 마운트를 뺏기고 암트라이앵글 초크를 잡히는 등 매우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라운드 탈출 이후 스탠딩에서 라이트 훅을 맞고 1라운드 TKO패를 당했다.관련기사.경기 영상
서로간에 모르는 상태라고는 하나 그래도 경기 준비는 했던 마하에 비해 임재석은 세컨으로 왔다가 갑자기 불려올라가는 바람에 바지를 빌리고 마우스피스를 사야했던 상태였으니 누가 봐도 마하의 대굴욕이라고 봐야 할 상황. 톡톡히 망신을 당한 마하는 은퇴까지 번복하는듯한 인터뷰를 남겼다.
2. 파이팅 스타일
유도와 슛복싱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스탠딩 타격이 매서우며 한번 흐름을 타면 폭발력이 대단하다. 그래플링 쪽도 약하지 않아서 1999년 아부다비 무제한급에서 리코 로드리게스를 누르고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나다. MMA에서는 TD 능력과 상위에서의 무서운 파운딩으로 이름을 떨쳤다. 링네임인 "마하"답게 박진감 넘치고 폭발적인 경기운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선수.
약점을 꼽자면 TD와 서브미션 방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확실히 레슬링이 최정상급에서도 통할 정도로 좋은가 하면 그건 아닌데, 여기에다 서브미션에 대한 대처능력이 확실히 떨어진다. 그라운드에서 잘 싸우다가도 한번의 서브미션에 역전패를 내주는 경기가 많다.
2002 ~ 2003년 사이 여러 단체를 돌면서 적정 체급을 찾지 못하고 -83kg에서 -73kg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패가 쌓였던 적이 있는데, 이때문에 기복이 심하다는 평도 있다.
일본 웰터급에서는 명실상부한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세계 무대에서는 이런 단점들을 드러내며 한계에 부딪혔고 이후 전성기가 지나면서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3. 기타
2019년 4월 14일, 류가사키시의회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162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엔센 이노우에, 사토 루미나, 아사히 노보루 등과 함께 90년대 Shooto 4대천왕의 일원이다. 뛰어난 기량과 화끈한 경기운영, 후덕한 인품 등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선수 중 하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젊은 시절에는 미남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여성팬도 엄청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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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Shooto 시절
2006년 봄에 잠시 공백기를 가졌다. 당시 웹상에선 길에서 하야토가 일반인에게 구타당해 부당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실은 하야토의 인내가 돋보였던 사건. 길을 건너다 자동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는데 운전자가 도리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 하야토를 가격, 왼쪽 눈에 안와골절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에 이바라키현 츠치우라 경찰서 조사결과 드러나 하야토는 대인배로 칭송 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상대를 이승에서 삭제시킬 만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도가로서의 자존심과 상대의 안전을 위해 엄청난 인내를 사용한 것. 바로 다음 경기인 올라프 알폰소 전에서 화가 덜 풀렸는지 상대를 초살 실신 KO로 보내고 링위에 자신의 도장 관원들과 함께 서서 "최근 저에 관련된 소문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무도가로서 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폭풍간지 마이크웍까지 해서 타의 귀감이 되었다.
PRIDE의 남제나 K-1의 다이나마이트같은 대형 연말행사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자신의 모토가 "섣달 그믐날은 코타츠에서 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매우 솔직담백하다.
그런 이미지였는데 2008년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며 큰 곤욕을 겪었다. 꽤나 노골적인 행위가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었기에 당시 격투계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일단 여성팬이 엄청 떨어져나갔고, 일각에서는 "대인배인 척 하면서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다녔냐"는 투의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지금은 쏙 들어갔다[11] .
2010년에는 다시 노래방 비디오가 유출되면서 지독한 음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은 노래방에 간 것은 아니고 맷 브라운[12] 등과 함께 체험형 게임인 '밴드 히어로'를 플레이한 것인데, 일각에서는 '''섹스 비디오보다 이쪽이 더 심각하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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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의 안쓰러운 표정이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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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의 강아지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1] 어린 시절 동경했던 프로레슬러의 링네임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2] 다만 박빙의 승부여서 판정에 논란이 있었고, 가토와는 꽤나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인지 별 의욕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 트리그는 여러가지로 Shooto룰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1라운드 그라운드에서 파운딩으로 여러 차례 유리한 상황을 잡았으나 스톱 앤 돈 무브 때문에 번번히 마하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2라운드에 다운을 당한 후에도 쉬지 않고 벌떡 일어나 마하에게 달려들었으며, 레프리가 카운트를 세며 이를 제지하자 TKO선언으로 착각하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룰 공부 안해온 걸까...[4] 2라운드 펀치로 한차례 다운을 빼앗았으나 휴즈는 금방 회복해버렸고, 또 다시 테이크다운.[5] 상당한 업셋이었는데 쉴즈가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된다.[6] 정타를 맞추어도 상대가 밀고 들어온다거나.[7] 히데히코가 엄청난 근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하야토의 승리는 맞다.[8] 이 경기가 있기 얼마 전에 자기 트위터에다가 ''''위안부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 동상따위 몇개라도 만들어라. 일본은 바쁘다''''며 망언을 했다. 더 어이없는건 '''재일교포'''가 이 말에 동조를 했다는 것. 또한 2013년 조르주 생 피에르의 욱일기 도복이 논란이 되자 '''"욱일기에 불만이 있는 놈들은 바보다. 역사 공부나 해라. 그래봤자 무리일 테지만 말이다"'''라는 발언을 하며 극우 인증을 하였다. 때문에 초난을 한 번 이겼던 경험이 있는 차정환 선수는 "녀석을 다시 한 번 박살내주고 싶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9] 원래 상대는 UFC 출신의 셰이머 베일리였는데 마하가 계체에서 체중을 맞추지 못하자 일방적으로 경기를 취소하고 돌아가는 바람에 현장에 세컨으로 와 있던 임재석이 대회 3시간 전에 대타로 들어갔다고 한다.[10] 상식적으론 말도 안되는 오퍼지만 전해지기론 이대로 메인이벤트가 취소된다면 대회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기에 시합에 나서는 후배를 생각해 허락했다고 한다.[11] 사실 엄연한 성인끼리 교제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그게 하필 몰카로 찍힌거였기 때문에 본인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12] UFC에서 김동현에게 박살이 난 그 선수.(2015년 6월 27일 기준 UFC웰터급 랭킹으로 김동현7위 맷 브라운5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