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카츠요리
1. 프로필
2. 개요
'''"
生 きてます。以上 ! "'''[10]'''(살아있습니다. 이상!)'''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프로레슬러이자 전(前) 종합격투기 선수.'''"
喧嘩 、売 りに来 ました。"'''[11]'''(싸움, 걸러 왔습니다.)'''
특유의 강한 하드히팅 스타일, 아무런 꾸밈 없는 검은 레슬링 팬츠, 굵고 짧은 강렬한 프로모 등으로 인해 201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얼마 남지 않은 이른바 스트롱 스타일을 철저하게 체현한 모습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런 레슬링 스타일에 못지 않게 파란만장하고 불꽃 같은 레슬링 커리어를 거둔 레슬러.
3. 커리어
아버지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 레슬러이자 레프리로 활동했던 시바타 카츠히사(柴田勝久). 학창 시절에는 아마추어 레슬링 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고등학교 때는 친구 고토 히로오키와 함께 쿠와나공고 레슬링부를 이끌었다.
3.1. 신일본 프로레슬링 신인 시절 (199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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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신일본에 입단해 1999년에 데뷔하였다. 스테이블 마계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특유의 거친 싸움 프로레슬링 스타일로 '미친 개'라는 별명과 함께 인기를 얻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타나하시 히로시, 나카무라 신스케와 함께 신(新) 투혼삼총사의 일원으로 불리며 신일본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런 회사와 팬들의 기대를 뒤로 하고 시바타는 2005년 1월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탈단한다.
3.2. 프리랜서 및 종합격투기 선수 시절 (2005-2011)
2005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떠나 빅 마우스로 이적했고, 프로레슬링 NOAH에서 KENTA와 함께 태그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종합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어 통산성적 16전 4승 1무 11패를 기록했다. 시바타 카츠요리의 격투기 활동은 '''흑역사'''였다. 당시 격투기를 보던 국내 격투기 팬들은 그저 지나가던 프로레슬러 자버 A 취급을 했고, 나무위키에서 시바타 카츠요리를 언급하는 격투기 관련 문서들도 그러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K-1 HERO'S 측에서 시바타를 처음부터 자버 취급하진 않았다. 시바타는 본래 후나키 마사카즈의 제자로 알려져 있어, 본인이 이쪽에 흥미를 느끼고 데뷔를 했다. 단체 측에서도 야마모토 요시히사와의 경기에서 9초만에 KO승을 거둔거에 고무적으로 느꼈고, 2연승을 하자마자 '제2의 그레이시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설레발로 그랑프리 토너먼트에 하렉 그레이시를 상대로 넣는 만행을 저지른다.사쿠라바와 시바타 둘 다 아마 레슬링을 배웠고, U계 스타일의 프로레슬러 출신에다가 초반 성적에 고무된 나머지 띠워준 것. 그 경기에서 그래플링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암바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걸 시작으로 자버로 전락하여 저런 통산성적이 나왔다. 심지어 제이슨 밀러의 상대였던 타무라 키요시가 부상으로 결장하자 시바타가 대타로 출전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본 무대 중(中)량급에서 최상위급 강자였던 추성훈에게 박살난 적이 있는데, 상대가 될 리 없는 떡밥 매치였다. 2011년 12월 31일에는 DREAM과 IGF의 합동 대회에서 5년 만에 태그 매치로 프로레슬링 시합을 했다.
3.3. 신일본 프로레슬링 커리어 (2012 - )
3.3.1.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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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에 사쿠라바 카즈시와 함께 등장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싸움을 걸러 왔습니다."라고 선전포고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신일본을 저버렸던 시바타에게 거부감을 보였던 팬들도 시바타 카츠요리의 파이트와 타협을 거부하는 도도함에 조금씩 매료되었고, 2013년에는 시바타도 "프로레슬링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면서 '더 레슬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싸움을 걸러 왔습니다."
특히 2013년부터 옛 고등학교 친구인 고토 히로오키와의 라이벌리 끝에 레슬킹덤 8에서 벌어진 뜨거운 명승부 후에 2014년부터 태그를 결성해 WORLD TAG LEAGUE 우승과 IWGP 태그 챔피언 획득 등의 성과를 남겼다.
3.3.2. 과거와의 싸움
'''"프로레슬링이 ... 재미있어졌습니다."'''
FREE 신분의 선수지만 신일본 프로레슬링 정규군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시바타를 거부하고 나선건 신일본의 에이스인 타나하시 히로시였다. 단체가 망해갈 땐 종합격투기로 뛰던 녀석이 자신이 단체를 도로 살려낸 다음에 나타나서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 G1 클라이막스 24에서 자신을 이긴 시바타 카츠요리에게 환호하는 관중들을 본 타나하시 히로시는 이때까지 자신이 단체를 살리기 위해 해 왔던게 다 헛수고였나고 분노할 정도였다. 2014년 9월 21일 고베에서 열린 디스트럭션 흥행에서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은 경기를 만든 후 서로 화해했다.
자신이 믿는 길이 아무리 가시밭길이고 인정받지 못하는 길이라해도 기어코 걸어가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인정한 사람과는 뜨거운 우정 스토리를 보여주는 시바타 카츠요리는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는 선수로, 종합 격투기 무대에서의 저조했던 모습마저도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매력으로 이어졌다. 함께 '신 투혼 삼총사'로 불렸던 나카무라 신스케는 2014년 인터뷰에서 시바타 카츠요리에 대해 "(신일본 선수라면) 누구나 검은 팬츠를 입고 그렇게 싸우는 건 경험해봤던 스타일이다. 하지만 메인급으로, 그것도 헤비급 전선에서 그렇게 싸워나갈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렇게 푹 빠져들게 하는 것에서 자신이 있을 장소가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평가했다.[12]
2016년엔 나가타 유지를 필두로 한 제3세대와의 대립각본과 본인의 기량상승에 힘입어 NEVER 오픈웨이트 챔피언십을 거머쥐고선 무지막지한 인기를 얻었다. 악역으로 전환하고 큰 인기를 얻은 나이토 테츠야와의 경기에서 시바타콜이 나이토콜에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2016년 11월에는 잭 세이버 주니어를 이기고 영국 단체 RPW의 최고 타이틀인 RPW 브리티시 헤비급 타이틀까지 차지한다. NEVER 오픈웨이트 타이틀은 레슬킹덤 11에서 고토 히로오키에게 뻿긴다. RPW 브리티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은 크리스 히어로, 맷 리들, 윌 오스프레이를 상대로 방어하다가 신일본 창단 45주년 기념 대회에서 스즈키군의 난입으로 인하여 잭 세이버 주니어에게 빼앗긴다. 스즈키 미노루를 뉴 재팬 컵 2017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꺾은 데 이어 계속된 상승세로 배드 럭 파레를 결승전에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3.3.3. 마지막 불꽃? 그리고 ....
3년 전인 2014년, 당시 이미 IWGP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오카다 카즈치카는 자신 앞에 나타난 시바타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뉴 재팬 컵에서 우승하고나 온 다음에야 챔피언 도전권을 줄지 고려해보겠다고 비웃음을 날렸다.[13]
그리고 2017년 뉴 재팬 컵 우승 직후, 시바타 카츠요리는 3년 전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사쿠라 제네시스에서 오카다 카즈치카의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에 도전할 의사를 밝혔다.
사쿠라 제네시스 2017에서 멋진 그라운드 공방과 타격전을 선보이면서 38분간의 초접전 끝에 아쉽게 패했다.[14]
그런데 경기 후 백스테이지에서 몸 오른쪽이 마비되는 증상과 함께 쓰러져 병원에서 경막하혈종 진단을 받고 수술했다고 한다. 프로레슬링이 현실과 스토리의 경계가 애매한 면이 있어서 이것이 스토리의 일부가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며칠 후 전달된 소식에 의하면 오카다 카즈치카에게 전력으로 박치기를 날린 후[15]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수술 이후 잠정 중단되었다가 다시 올라온, 유료 사이트에 본인이 작성하는 칼럼에 의하면 첫 수술 당시 두개골의 일부를 들어내, 회복 이후 다음 수술에 다시 넣는다고 하며, 오른쪽 시력과 청력에 문제가 있으며 마비 증세가 오기도 하고, 진통제를 하루에 세네번 처방받아도 고통이 온다고 한다. 2017년 4월 26일, 시바타 카츠요리가 올린 글에 따르면 두개골의 절반을 떼어냈다가 다시 붙이는 등 큰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간다.
G1 클라이맥스 27 마지막 날인 2017년 8월 13일, 양국국기관에 깜짝 등장했다. 테마곡이 나오자 관중들은 일제히 시바타 콜을 외쳤으며 시바타 카츠요리는 수술 이전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입장해서, 링에 들어오자마자 후방낙법을 시전하고 양반다리로 앉으며 자신의 건재함을 표현했다. 그리고 '''"살아있습니다! 이상!"'''이라는, 시바타 카츠요리다운 짧고 굵은 한마디로 마무리지었다.
2018년 3월달에 오랜만에 근황 소식이 전해졌는데, 신일본 LA 도장의 헤드 코치가 됐다. 이 곳에서 체류하며 현지에서 제자들을 육성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일본내에서 신일본의 주요 대회가 있으면 경기 직전 사인화나 촬영회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등 신일본 내부 활동도 활발히 하는 중. 키즈나 로드 2018에서 열린 슈퍼 스트롱 머신의 은퇴 세레머니에서는 링 위로 올라와 직접 꽃다발을 가져다주며 은퇴를 축하해주기도 했으며, G1 클라이맥스 28 결승전에서는 타나하시 히로시의 세컨드로 나서며 타나하시의 우승을 지켜보며 함께 축하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2019년 6월 9일 벌어진 도미니언 6.9 in 오사카-조 홀 2019에서 코바야시 켄타와 함께 등장했다. 또한 Road to G1CLIMAX29 고토 히로오키편 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부진에서 탈출하기 위해 훈련차 LA 도장으로 온 고토의 훈련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나왔다.
그런데 G1 클라이맥스 29 마지막 날 전초전 경기 도중 KENTA가 태그팀으로 뛰던 CHAOS 선수들을 배신하고 불릿 클럽에 가입하자 분노하며 등장해 KENTA를 공격하더니[16] PK까지 시도했으나 자도의 방해에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이 역으로 KENTA의 PK에 당한 다음 KENTA가 자신의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버리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4. 종합격투기 전적
- 주요 패: 라렉 그레이시, 사쿠라바 카즈시, 허민석, 제이슨 밀러, 추성훈, 사쿠라이 '마하' 하야토, 이즈미 히로시, 최영, 나카니시 요시유키, 이시이 사토시, 사쿠라이 류타
5. 프로레슬링 스타일
정석적인 U계 슛 레슬링을 구사한다. 경기를 풀어가는 센스도 범상치 않아, 신 투혼 삼총사 시절에는 셋 중 가장 프로레슬링을 잘하는 선수로 평가받기도 했다.[18] 그러나 홀연히 탈단한 이후 종합격투기에서 안습한 전적만 쌓다가 프로레슬러로 돌아왔다.
프로레슬링 스타일이 종합격투기를 경험한 이후 변한 것이 아니고, '''원래 차고 꺾는 U계 슈터 스타일이었다.''' 공격적이고 빠른 장저, 강력한 킥, 간결하고 위력적인 슬리퍼 홀드와 관절기 등의 서브미션은 시바타 카츠요리가 종합격투기로 외도하기 전부터 사용하던 무브셋이며 프로레슬러로 컴백한 이후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2010년대에 프로레슬러로 컴백한 이후 초창기엔 팬들이 시바타 카츠요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컴백 후에 데이브 멜처가 5성 만점을 주는 경기를 만드는 등 클래스는 여전했다. 만약 시바타 카츠요리가 탈단하지 않고 그대로 트로이카를 이루었으면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판도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하드히팅과 동시에 올드스쿨 스트롱 스타일을 제대로 체현한다. 엘보 한 방, 킥 한 방에 무지막지한 설득력이 있으며, 코너에 박아놓고 안면에 드롭킥을 날리는 무브와 슬리퍼 홀드는 살벌하다. 각종 기술을 구사하는데도 인위적인 소리(슈퍼킥 시전 때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때려 타격음을 만드는 등)를 내는 경우가 없고, 말 그대로 있는 힘껏 후려치기 때문에 사운드적 임팩트는 떨어질지라도 그 설득력이 배가 된다. 단적인 예로 헤드벗 싸움에서 머리와 머리가 충돌하는 둔탁한 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들이받는다. 헤드벗으로 출혈장면을 일으킨 것이 한두번이 아니며, 결국 이로 인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헤드벗 후 피를 흘리는 장면. 이 헤드벗이 결국 치명적인 부상을 가져왔다,)
프로레슬링은 기술을 '''거는 것'''보다 '''받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데, 시바타 카츠요리의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경기 스타일은 접수하는 상대방을 배려할 수 없는 스타일이 되므로 여기에 따른 비판도 자주 나온다. 2010년대에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내에서의 추세도 이런 하드히팅은 지양되고, 북미 프로레슬링처럼 범프(Bump) 짙은 액션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 입장에선 호쾌할 수 있지만 받아주는 선수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go 2 sleep은 이 기술의 개발자이자 실제로 친분이 있던 사이인 KENTA에게 배워서 사용했는데, '시바 KEN'이라고 불렸던 두 사람의 태그는 태그 챔피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프로레슬링 NOAH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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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쉬 무브는 로프반동 후 앉아서 상체를 일으킨 상대를 걷어차는 PK다. 주로 슬리퍼 홀드로 반쯤 그로기가 된 상대를 주저앉혀 놓고 사용한다. 슬리퍼 홀드에 이은 PK를 시전한 후 상대를 커버하지 않고 다시금 슬리퍼 홀드를 걸어서 상대를 실신시켜 승리하기도 한다.
커리어 말년에는 여러번의 해외 원정 및 잭 세이버 주니어와의 대결을 통해 그래플링 운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레슬킹덤 XI에서 치룬 고토 히로오키전에서 어쩌면 더욱 발전한 스타일로 진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오카다 카즈치카와의 사쿠라 제네시스 2017 경기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당하며, 이 점이 시바타의 커리어에 있어서는 선수와 팬 모두에게 정말 아쉬운 순간이 된다.
6. 논란?
2017년 초, 내연녀로 추정되는 인물이 홧김에 팬들의 뒷담화를 깐 시바타 카츠요리의 사례들을 죄다 트위터에 공개하면서 불륜 의혹과 인성 논란이 SNS상에서 잠시 언급되기도 했으나, 트위터 내에서 한정적으로 해당 논란이 구설에 오르는 수준에 머무르는 등 폭발력을 가지지 못했고, 기사화도 되지 않아 유야무야 넘어갔다. 심지어 이 의혹도 이후 한 사이트에서 시바타 카츠요리가 내연녀의 존재와 팬 비하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며 해명했고, 최초 유포자인 내연녀로 추정되는 인물 역시 침묵을 지켜 확실히 증명된 사실 없이 단순 해프닝 정도로 끝난다.
7. 둘러보기
[1] 별명은 ''''네무리 쿄시로''''. 스모 선수 출신으로 신일본 최초 멤버 중 한명이었으나 부상으로 선수생활은 일찍 접었고, 이후 신일본 심판으로 활동하다 99년에 은퇴했다. 2010년 심근경색으로 작고.[2] 레그 훅 STO.[3] 피니셔인 PK의 셋업 무브로 사용한다.[4] 주로 슬리퍼 홀드로 목을 졸라 반쯤 그로기 상태가 된 상대를 앉혀놓고 쓴다.[5] 시바타 카츠요리가 신일본을 탈단하고 종합격투기에 발을 들일 무렵에 신인 때부터 친분을 쌓아온 LOW IQ 01에게 등장곡을 만들어줄 수 있냐며 의뢰하여 LOW IQ 01가 새로 만들어준 곡. 여담으로 그 사실을 알고 원래 01의 팬이여서 01이 속해있었던 밴드 SUPER STUPID의 DO IT MYSELF를 등장곡으로 쓰기까지 했던 타나하시 히로시가 질투했다고 한다(...)[6] 1994년 밴드 SUPER STUPID를 결성하며 커리어를 시작하여 1999년부터 솔로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일본의 락 뮤지션. 이름은 '로우 아이큐 이치'라고 읽는다. [7] 같은 날에 같은 신 투혼삼총사의 타나하시 히로시도 데뷔전을 치뤘다.[8] 이노우에도 이 경기가 데뷔전이었다. 이후 주니어 전선에서 활약을 이어갔으나 헤비급 전향에 실패하고 부상 후유증으로 2014년에 은퇴. [9] 공식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으나 한 경기라도 더 뛰면 무조건 죽는다는 얘기조차 나오는 수준의 머리 상태를 봐선 이 경기가 그대로 은퇴전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10] 2017년 오카다 카즈치카와의 경기 이후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링 위에 돌아온 이후 한 말. 이후로도 시바타 특유의 마이크웤인 "이상!"은 시바타의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칼 프레드릭스가 영 라이온 졸업 이후 첫 인터뷰에서 쓰기도 했다.[11] 2012년 신일본 복귀 당시 한 발언. 당시에는 돌아온 탕아 취급이라 팬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본인의 실력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며 5년간 정규군 최고의 스타 중 한명으로 불꽃같은 커리어를 보냈다.[12] 2014년 파워 스트러글에서 나카무라 신스케와도 10년만에 강렬한 매치를 벌였다. 10년 전 스트롱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해 낸 시바타 카츠요리와 10년 사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나카무라 신스케 간의 대조가 포인트 레인메이커 일대기 - 24.[13] [데이터주의, 스압] 레인메이커 일대기 17화[14] 경기는 시바타 카츠요리 특유의 깡과 두 선수 모두의 훌륭한 경기력으로 현장에 있던 관중들과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레인메이커 공격을 목으로 버티는 부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데이브 멜처는 해당 경기에 별 다섯개를 부여하며 극찬했다.[15] 문제의 장면.[16] 이때 코너 러닝 빅 붓-코너에서 엘보 연타-코너 저공 드롭킥 같은 선수 시절 주력기들을 사용했는데, 전부 깔끔하게 사용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17] 신일본 소속이었던 프로레슬러. '악마 가면' 켄도 카신이라는 링네임으로 더욱 유명. 신일본을 대표하던 독보적인 또라이 캐릭터의 선구자로, 다른 가면 레슬러들과 다르게 가면을 쓰면 켄도 카신, 가면을 벗으면 이시자와 토키미츠(본명) 기믹이었다. 181cm 87kg라는 크지 않은 체구에도 후지타 카즈유키가 들어오기 전까지 신일본 내에서 이시자와의 하단 태클을 제대로 막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놀라운 아마레슬링 실력의 소유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합격투기계에 발을 들였으나 추성훈에게 개작살이 나면서 아마레슬링 실력만으로 종합격투기는 무리라는 당연한 사실만을 각인시켜주고 말았다.[18] 타나하시 히로시는 무토 케이지를 벤치마킹했지만 아직 무토만큼 경험을 쌓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자기 스타일이 확립된 것도 아니어서 경기력이 부족했던 때였다. 나카무라 신스케도 당시엔 시바타 카츠요리보다 훨씬 더 종합격투기스러움을 지향하는 스타일이었기에 아예 프로레슬링으로 보기도 힘든 수준이었으며, 프로레슬링 팬들의 반감도 심했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19] 2014년 유일한 5성 경기.[20] 사실상 시바타 커리어 마지막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