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군부
三軍府
1. 개요
조선 초기 군무 기능[1] 을 총괄하던 관서.
2. 명칭의 변화
조선 초기에는 각 관서의 업무 분장 및 조직 개편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군무 기능을 담당하는 관서의 명칭 또한 빈번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삼군부라는 이름 자체는 1400년 ~ 1401년에 잠깐동안 사용되었다.
하지만 군무 기능을 전담하는 기구는 여전히 조선 시대 내내 존속한다. 의흥삼군부에서 시작된 삼군부의 군무 기능 전담 기구는 승추부를 거쳐간 후 병조로 흡수된다.
하지만 군무 기능 중 군령권의 경우 병조에 온전히 흡수되지 못하고 오위진무소로 남아있게 되고 이후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된다. 군무 기능 중 군정권은 병조가, 군령권은 삼군부가 담당함에 따라 두 기구 사이의 알력이 존재하였으나 세종 시기 세종이 병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병조의 우위로 귀결된다.
을묘왜변 이후 비변사가 상설화되면서 군권을 대부분 흡수하였으며, 비변사가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 및 6조의 권한을 상당수 흡수하면서 삼군부와 의정부의 성격이 통합된 최고 군무 및 정무 기구로 기능한다.
2.1.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1391년 권신 이성계의 건의에 따라 공양왕이 이를 받아들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었다. 그리고 최고 군 지휘관인 판삼군부사·지삼군부사 등은 총제(摠制)라 하였다. 도총제사(都摠制使)는 이성계가 임명되었으며, 도총제사 아래 삼군총제사(三軍摠制使)에는 조준, 정도전이 임명되어 이성계 일파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1393년 9월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되었다. 개국 공신 정도전이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附事)[2] 에 임명되면서 삼군부가 최고 군무 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삼군부는 도평의사사 청사의 동쪽 맞은편에 청사를 마련하여 확장하였다. 이는 정무 기능과 군무 기능을 분리한다는 원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아직 사병이 혁파되지 않은 시점이라 삼군부의 위상은 한계가 있었다.
2.2. 삼군부(三軍府)
그리고 1400년 (정종 2년) 사병을 혁파한 이방원의 뜻에 따라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동시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중추원(中樞院)에서 관장하던 일부의 군무를 더하여 삼군부(三軍府)로 개칭하였다. 그 결과 삼군부는 최고 군무 기관의 역할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다만 삼군부의 관원은 의정부의 관원에 임명될 수 없다는 원칙을 두어 정무 기능과 군무 기능의 분리를 다시 한번 확고히 하였다.[3]
2.3. 승추부(承樞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
1401년(태종 1년) 7월 삼군부(三軍府)에 왕명 출납 기능을 더해 승추부(承樞府)로 개편되었다.[4] 이후 삼군부의 명칭은 다시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승추부(承樞府) 하에서도 군사력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서 삼군의 총제(摠制)는 존속하였다. 1403년 승추부(承樞府)는 다시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과 군령권을 행사하는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다시 분리되었으며,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는 1409년 다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명칭이 바뀌었다.
2.4.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1451년(문종 1년) 중앙군 체제를 12사(司)에서 5사(司)로 개편하면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역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467년(세조 12년) 5사가 다시 오위로 재편되면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명칭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위는 중앙군 뿐 아니라 지방군까지 어우르는 편제였길래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가 전군의 군령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군정권은 병조의 소관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오위가 해체되면서 중앙군이 오군영으로 재편되고 국정최고기구로 비변사가 부상하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관직은 종친을 위한 명예직으로 전락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군령권 역시 유명무실해진다.
2.5. 삼군부(三軍府)의 재설치
1865년(고종 2년) 새로이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국경과 해안에서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삼군부(三軍府)를 재설치한다. 그러나 삼군부(三軍府)가 기능을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비변사가 혁파된지 3년만인 1868년부터였다. 삼군부는 북병사[5] , 동래부사의 인사권을 확보하였으며 각 군영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조선 국방의 핵심 기관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삼군부는 폐지되었으며, 2년후인 1882년 6월 재설치되었다가 6개월만인 1882년 12월 영구히 폐지되고만다.
3. 다른 매체에서의 삼군부
3.1. 용의눈물
용의눈물의 경우 삼군부가 무인정사에 대한 사건을 다룬 제52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의흥삼군부가 정식명칭이지만, 극 중에서는 간단하게 삼군부라고 부르고 있다. 삼군부는 임금의 거처인 대전과 함께 정안대군(이방원)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장악해야 할 최중요관청으로 분류된다. 당시 최고의결기관인 도평의사사는 상대적으로 뒷전이었다는 것이 의외. 무인정사 초기에 삼군부는 정안대군을 역적이라 부르며 그들을 진입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당시 움직일 수 있는 군사는 이숙번 휘하의 병사 뿐이었기에 이숙번에게 군령을 하달하여 정안대군 진압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숙번은 이미 정안대군과 내통하고 있었고, 이숙번은 오히려 정안대군의 사병에 가세하여 역으로 삼군부를 장악하였다. 여기까지의 전개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보다는 오히려 12.12사태의 전개과정과 더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드라마 방영 당시 신문 기사에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가 12.12와의 비교를 언급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은 삼군부에서 살생부[6] 를 준비하였으며 그리고 삼군부의 직인이 찍히 군령서를 조정신료들에게 전달하여 모든 신료들을 소집한다. 다음날 아침 살생부에 따라 정도전측 신료들을 처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