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1. 개요
1.1. 로마-베네치아의 관계
2. 베네치아-동로마 1차전
2.1. 발단
2.2. 준비되지 않은 전쟁
3. 베네치아-동로마 2차전
3.1. 제국의 역습
3.2. 베네치아인들의 폭동
3.3. 베네치아인 소탕작전
4. 이후


1. 개요


12세기 경 에게 해동로마 제국의 무역 이권을 놓고 벌어진 동로마와 베네치아의 전쟁, 양측은 관세와 무역특구 제시를 놓고 서로 승패를 주고받으면서도, 상호 공생하는 특수한 외교관계를 영위하였다. 이런 관계는 1204년 베네치아의 주도 아래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제국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하고 주요 무역 조계지를 베네치아가 직접통치하게 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1.1. 로마-베네치아의 관계


일단 이 전쟁의 성격을 알기 위해선 베네치아와 로마의 특수한 관계를 알아야 한다. 카롤루스 대제가 동방 로마제국이 공위 상태라고[1] 판단하고 서방 정제의 대관을 치름으로써 프랑크 제국과 동로마는 열전 상태로 들어갔다. 이리니 여제는 당면한 성상 숭배 논쟁과 내전, 아바스 왕조의 침공으로 직접 대처하기 힘들었지만, 802년, 니키포로스 1세가 집권하고는 상황이 달라졌다. 국력을 추스린 로마인들은 감히 '''로마인들의 황제'''를 참칭하는 카롤루스를 용납할수 없었고, 805년부터 아드리아 해와 주변 동부, 북부 이탈리아를 무대로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전부터 레온 3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했고, 각지의 로마 유민들이 북이탈리아가 혼란스러웠던 시절 모여 건설된 아퀼레이아 근처의 베네치아가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곳 공동체들은 그해에 내분으로 잠시 프랑크 왕국에 점령당했고, 석호 대부분을 프랑크인들에게 빼앗기기도 했었지만, 로마인들은 빠르게 이들을 격파하고 베네치아를 되찾았다.
이곳에서의 분투 덕분에 베네치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큰 폭의 자치를 계속 인정받았다. 이 덕에 베네치아는 프랑크와 동로마 양측 사이에서 독립과 무역은ㆍ 보장받는 이익을 챙겼고 로마 제국에게는 9~10세기 사이에 서방 제국과의 무역, 외교 거점으로 각광받았다. 이에 더해 로마 제국이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에서 중흥을 누리는 동안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해안 지방의 제국 방위를 일임받으며 아드리아해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였고, 10%의 일괄관세율을 하향해주는 등 여러 특혜를 받으며 공존했다.

2. 베네치아-동로마 1차전



2.1. 발단


이미 상당한 자치를 누리던 베네치아는 만지케르트 전투노르만족의 로마령 남이탈리아 점령[2]으로 로마인들이 서방에 대한 통제권을 잃자 거의 완벽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1081년 집권한 알렉시오스 1세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노르만족의 당면한 침략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군의 힘이 필요했고, 그들을 끌어들이기위해 엄청난 무역 이권을 넘기는 '''금인칙서'''를 발부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1. 무역관세의 상당한 감세 혹은 '''면제'''

2. 기존에 금지되어 있던 금, 목재등을 비롯한 전략자원의 교역 허가

3. 주요 항구의 개항

4.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조계지 임대

5. 베네치아의 원수(Doge)를 비롯한 공훈자들에게 칭호 부여

이는 지금까지 어떤 도시국가도 가지지 못한 엄청난 권한이었는데, 바로 황도 콘스탄티노플에 조계지를 수여받고, 라케다이몬, 코린토스등의 주요 항구에 대한 개항을 허가받았으며, 목재, 금, 철 등의 전략자원에 대한 수입이 가능하게되는 것이었다. 특히 이중에서 관세 철회, 즉 FTA는 베네치아에 엄청난 특수를 가져다 주었다.
베네치아는 환영하며 바로 행동에 들어갔는데,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동로마와 동맹을 맺고는 800여명의 기사와 수백척의 함대를 지원했다. 육전이 패배로 점철되는 동안에도 베네치아 함대는 노르만 함대를 아드리아해 고깃밥으로 만들며 적을 끈질기게 괴롭혔고, 결국 보에몽의 전쟁수행력을 바닥내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때까지의 내용은 장기적으로는 문제의 소지를 남겼지만 그래도 양국에 윈윈에 가까웠다. 베네치아도 아드리아해 남부에 노르만 왕국이 생기면 무역이 힘들어질게 뻔했기 때문.
그러나 문제는 로마제국이 1차 십자군 이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이후에서부터 발생했다. 1110년대 계속된 히피르피론 통화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하자, 주요 수출품인 유리, 에나멜, 비단, 도기 등이 베네치아에 의해 독점거래되기 시작했고, 과도하게 낮춰진 관세율은 동로마 제국의 상공인들에게 경쟁의 부담을 지우게 되었으며, 제노아, 피사 등의 다른 상업 공화국들이 같은 특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으로 제위를 시작한 요안니스 2세는 상인들과 시전 상인들의 지속적인 시정 요구에 직면했고, 그 또한 베네치아가 에게 해의 무역을 장악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2.2. 준비되지 않은 전쟁


1118년, 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즉위한 그해 바로 베네치아의 원수 도미니코 미카엘에게 더이상 옛 통상 특권은 유지되지 않는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보호무역을 시작했다. 이에 베네치아측은 황제가 딜을 요구하는 줄 알고 협상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콘스탄티노플 조계지의 베네치아인들에 대한 추방이었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분노하며 1123년 말, 72척의 함대를 끌고 동로마의 코르푸 시를 공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르푸는 장장 6개월동안 수성에 성공하였다. 해가 지나 1124년이 되자, 베네치아에게 비보가 들어왔다. 상호 방위조약을 맺은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2세아르투크 왕조의 티무르타쉬에게 생포당해 조약이 발동된것이다. 결국 베네치아의 함대는 공성을 풀고 우르트메르로 향했고, 승리는 쉽게 요안니스 2세의 것이 되는듯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꿀무역로를 호락호락하게 포기할리가 없었다. 1125년 봄, 예루살렘의 상태가 정리되자 베네치아 함대는 에게해에 대한 무제한 통상파괴작전에 들어갔다. 레즈보스, 사모스, 히오스, 안드로스등의 주요 항만 거점 섬들이 베네치아 함대에게 점령당했으며, 크고작은 무역선들이 베네치아에게 나포당했다. 요안니스는 베네치아가 점령하지 못한 몇 안되는 해군 거점인 림노스에 함대를 결집시키고 북진하는 베네치아군에 해전을 걸었다. 결과는 확실히 명시되진 않았지만 제국의 참패였다.
요안니스는 그해 8월에 통상특권을 복구해주는 대신 점령지를 반환해달라는 조약을 맺었다. 조약이 더 심화된것은 아니었지만, 베네치아 조계지에 대한 재건 비용까지 제국이 물어야 하는것은 뼈아픈 치욕이었다. 황제는 해군력과 베네치아에 대한 견제력이 충분치 않음을 통감하고, 피사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과 조약을 체결해 무역 비중을 다변화했으며 [그러나] 해군 합동사령관인 '''메가스 둑스'''에 대한 지역 예산 관할권과 함대 재량권을 확대했다. 그러나 해군 재건에는 육군과 다르게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베네치아에 대한 복수는 다음 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3. 베네치아-동로마 2차전



3.1. 제국의 역습


티레, 트리폴리, 알렉산드리아, 바그다드. 모든 무역지에서 '''로마인''' 상인들이 득세한다. (12세기의 한 무슬림 역사가)

1170년경, 제국은 마지막 황혼의 중흥을 구가하고 있었다. 무역 관세가 하루에 2만 히페르피온을 찍었다는 기록과 세계 부의 2/3가 콘스탄티노플로 모인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였다. 제국의 강역은 북으로는 크림반도, 서쪽으론 헝가리 대부분을 속령으로하고 동으로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봉신으로 하여 국제 관계에서 초강대국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유리, 세공품, 도기, 비단등이 제국에서 생산되어 온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50만에 이르는 수도의 인구중 8만은 외국인으로 채워졌을 정도로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다. [3] 베네치아의 에게해 무역 또한 성행했지만, 로마인, 제노바인, 피사인, 앙코나인들이 조금씩 그 지분을 차지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국가의 지원을 받는 로마의 시전상인들과 흑해 무역에 막 발을 뻗기 시작한 제노바의 성장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을 위협했다. 이 분쟁은 조금씩 물리적인 싸움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3.2. 베네치아인들의 폭동


중흥을 이끈 마누일 1세에게는 아버지와 똑같은 걱정이 있었다. 제국 내의 베네치아인들이 너무나 많은 특혜를 받고 있었고, 이에 더해 그 문제가 내부 분란으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서방 문화에 우호적인 마누일 황제라고 할지라도 정치적 안정을 깰 수 있는 조계지와 상인들의 분란은 가만히 놔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치세 초반부터 베네치아는 마누엘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시칠리아가 잠시 점거했던 코르푸 공성전에서 동로마를 지원하러 온 베네치아 함대가 제국 중앙군과 말다툼이 벌어지자 무어인에게 동로마식 즉위식을 올리는 퍼포먼스를 하며 마누엘에게 패드립을 날린 것[4] 일단 마누엘은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 싸움을 말렸으나, 당연하지만 분노가 남았을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를 폭발시킨 계기는 1170년 8월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 조계를 공격해 불태우고 화물을 노략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흥정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실랑이가 황도에 패악을 끼치자 마누엘은 베네치아에게 제노바인들에게 사죄하고 자비로 조계를 수리할것을 명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에게 돌아온 답변은 '''니네 아빠 패전한 꼴 나고 싶냐?'''였다. 마누일은 격분하여 더이상 오만방자한 베네치아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1170년 말에 섬세하게 작전을 준비한 마누엘은 1171년 회심의 복수를 가한다.

3.3. 베네치아인 소탕작전


1171년 3월 제국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제국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모든 베네치아 국적의 사람들을 체포하고 배를 나포했다. 베네치아측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하기 위해 모두를 감옥에 집어넣느라 제국 주요 도시의 감방이 1만명이 넘는 베네치아 상인들로 폭발 직전이었다. 베네치아에게는 다행 히도 감방이 넘쳐 채 체포되지 않은 상인들이 몰래 빠져나와 베네치아행 배에 올랐고, 그 덕에 베네치아는 즉각 대항할 수 있었다. 돌아온 생존자들의 증언에 베네치아 민심은 격노했다. 수만의 군중들이 도제에게 복수할 것을 촉구했고, 1171년 9월, 응징 원정을 위한 100척의 군선과 20척의 갤리선이 준비되었다.
도제 비탈레 미카엘은 120척의 배를 이끌고 로마령 에브리포스 해협을 기습하여 반격했지만 에브리포스를 위시한 주요 항구들이 이미 철저하게 보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구에 대한 공성은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다. 도제는 협상을 위해 병력을 다른 제국령 섬인 히오스로 물리고 대사들을 보냈지만, 이미 베네치아를 굴복시키겠다고 단단히 벼른 황제는 바랑기안 친위대장을 보내 '''이미 로마 함대는 다르다넬스와 디라히온에서 출발해서 남북으로 너넬 포위할거니 알아서 하세요'''식으로 답했다. 히오스를 공격하던 베네치아군은 히오스 수비대의 맹렬한 반격과 마침 돌기 시작한 전염병으로 또 피해를 입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기 위해 다르다넬스로 향하던 함대는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이끄는 150척의 로마 함대에게 격파당했고 비탈레 도제의 함대는 남쪽을 향해 패주했다. 제국 군선은 패주하는 베네치아 함대를 300km 넘게 추격했다. 그러나 그 퇴각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아드리아해에서 출발해 퇴로를 차단하려했던 디라히온의 제국함대를 베네치아군이 추월해버리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할 지경이었다. 제국군은 펠로폰네소스의 말레아 해협까지 베네치아 함대를 추격하다가 복귀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폭풍까지 불어 베네치아의 석호로 돌아간 배는 몇 척 되지않았다.

4. 이후


베네치아로 돌아온 비탈레 미카엘 도제는 차라리 로마인들에게 사로잡히는게 나은 꼴이 되었다. 히오스 섬에서 옮아온 전염병이 베네치아 본토에 퍼져 수백명이 죽었고, 패전에 분노한 베네치아 시민들은 도제를 끌어내서 말 그대로 광장에서 찢어죽였다. 새로 선출한 도제는 제국에게 분노의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황제의 답변은 더더욱 무시무시했다.

너희들이 감히 로마인들과 동등할것이라 생각하였느냐, 너희는 고대에 일개 미천함에 지나지 않았고, 요즘에 가서야 로마인들의 후광에 말미암아 근방에 이름을 떨쳤다. 아직 너희는 우리의 실력에 비할바가 못된다. 모든 이들이 너희를 조롱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강대국도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여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이 친서에 크게 분노했고 이후 일체의 외교관계를 끊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기위해 신성로마제국과 연대했다. 1173년 독일 황제가 동로마령 앙코나[5] 를 공격하였을때도 베네치아는 함대를 보냈지만 앙코나와 베르티노로 여백작, 로마인들의 연합함대에 깨강정이 나고 나서는 아드리아해를 지나가는 로마인들에게 해적질을 하는것 말곤 큰 위협이 없었다.
비록 1180년 마누엘 말년에 친선조약이 체결되지만. 이 일련의 전쟁들은 베네치아가 동로마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게 되어 이후 4차 십자군을 주도하게되는 결말을 낳게 되었다.


[1] 이리니 여제가 제위에 있었지만 게르만 살리카법의 판례로는 공위로 여겨졌다.[2] 둘은 거의 비슷한 시점에 일어났다.[그러나] 베네치아와 맺은 조약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주요 품목 관세를 제외한 항목은 이전과 같은 10%였고, 주요 품목또한 4%내외의 관세를 유지시켰다.[3]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외국인 조계에는 최소 2개의 모스크와 가톨릭 교회가 있을 정도였다.[4] 그의 아버지 요안니스 2세는 까무잡잡하고 못생겨 무어인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를 빗대 놀렸으니 빡쳤기 마련.[5] 앙코나는 원래 독립적인 도시국가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남하를 견제할 방도로 큰 돈을 받고 동로마에 복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