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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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경 사진
이름
차민수(車敏洙)
영어명
Jimmy Cha
생년월일
1951년 1월 15일 (73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동국대학교
입단
1974년
단수
五단(2015년)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상세
3.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에 참가
4. 포커게이머로서의 실력


1. 개요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이자 프로포커플레이어. 2014년 기준 바둑은 五단이다.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1]. 학력은 동국대학교 경제학 학사이고, 한국관광공사 상무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 카지노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창립해서 회장으로 재직중.
미국식 이름은 지미 차(Jimmy Cha).
에디 차라는 아들을 두고 있으며, Fight Ready라는 MMA 팀에서 타격 코치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2]

2. 상세


아버지가 한국전쟁납북되어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에게 다양한 재주를 남겨주길 원해서 어린 시절 무술[3][4][5]이나 음악[6]에 이르기까지 안 배워본 게 없을 정도라고. 그 중에서도 바둑에 특히 재능을 보여, 대학 재학시절 아마추어 대회를 초토화시키다시피 하고 1974년 프로에 입단했다.
상당히 촉망받는 기재였지만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 [7] 애써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카지노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사업은 다 말아먹고 이혼까지 당한 후 빈털터리로 귀국했는데, 어머니에 의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가서 아예 본격적으로 포커에 뛰어든 것이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무일푼에서 내기바둑으로 밑천을 간신히 확보하여 다시 카지노행, 카지노 딜러와 재혼하였고 부인의 격려에 힘입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이후 프로 갬블러로 부와 명성을 얻었으며, 이민 이후 바둑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며 지냈다. 하지만 틈틈이 미국인들에게 바둑을 보급하는 일에 힘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기원에서는 계속 '''初단'''에 머물러 있던 그를 四단으로 특별히 승단시켜줬다. 여담으로 그가 포커에 뛰어든 것은 바둑 애호가이던 아마추어 포커선수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는 반대급부로 포커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그렇게 갬블러로 성장하던 1989년 뜬금없이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에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일본기원에서 현역으로 활약하던 미국인 프로기사인 마이클 레드먼드를 누르고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 본선진출도 이변으로 여겨지던 와중에 그는 일본의 유명기사 두 명을 연파하여 8강에 진출하더니 8강전에서는 천하의 조훈현 九단을 이길 '''뻔'''했다. 막판까지 이기고 있다가 10집 이상을 깎아먹는 실수를 하며 역전당한 것(...)
그래서 당시 대국을 검토하던 몇몇 프로기사들은 그가 친구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니냐고도 했다. 차민수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져준 건 당연히 아니라고 즉각 반발했는데, 다만 자신이 한국 최강자를 이길 경우 벌어질 후폭풍이 신경쓰이긴 했다고 한다.
어쨌든 8강까지 진출해서 다음 대회 시드를 확보, 이번에는 첫 경기에서 당대 일본 최강자인 '''조치훈 九단'''을 이겼다. 초반 실수로 불리해진 바둑을, 좌상쪽 빈 공간을 모두 집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멋지게 성공하며 역전승한 것. 세계 바둑계가 경악하기에 충분했지만 8강에서 녜웨이핑 九단에게 패하면서 파란은 멈췄다. 이후로는 바둑으로 큰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조훈현 九단과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다. 차민수 五단이 공군본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장교들을 바둑으로 때려잡고 다니자, 그에게 번번이 진 간부들이 당시 공군본부에 현역 복무중이던 조훈현을 데려와서 대리전을 붙인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둘은 군복무 기간에만 100여 판이 넘는 대국을 두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조훈현과 대결하며 '세상에는 넘사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차민수는 곧장 미국 이민을 택했다나 뭐라나.
조훈현 九단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바둑에서도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바둑이 보급되던 시절 거의 대부분의 게임을 이겼는데 그러다가 자신을 어떻게 플레이해도 반집차로 이기는 상대를 만났다고 한다. 수십판을 내리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조훈현이었다는 일화가 월간 바둑에 소개된 적이 있다.
서봉수 九단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데, 그가 고3 때 고1이었던 서봉수와 기원에서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가 3점을 접어줄 정도였는데 단기간에 따라잡히더니, 서봉수 九단이 먼저 프로에 입단[8]한 이후로는 자신이 흑을 잡고도 거의 이기기 힘들 정도가 됐다고(...).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수배에 쫓기고 있던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주주 九단 부부한국기원으로 데려온 사람이다. 홍콩을 거쳐 대만, 미국 등에 머물며 일본으로 망명을 신청했지만 일본기원에서 활동을 거부당한 루이-장 부부를 차민수 五단이 보고 조훈현 九단과 상의하여 한국기원에 데려온 것.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차민수는 '중국 시장이 커져야 바둑 시장이 성장한다'며 80년대 후반~90년대 중후반까지 한중 바둑 교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95년부터 시작해 3회 개최된 '우정배'다. 차민수는 천주더 등을 설득해 1만, 5천위안 수준이던 당시 중국의 기전 상금 10배를 넘는 수준을 상금으로 약속하며 사비로 우정배를 개최하여 바둑 시장을 키운 것이다. 또 당시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껄끄럽던 시절이라, 미국 국적자인 차민수가 녜웨이핑 등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조훈현 등과 친선 대국전을 많이 열어주기도 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결과로 중국 바둑 시장이 커지고 한국 기사들 또한 진출하여 실력을 겨루고 있으니 그의 공헌이 작지 않다 하겠다.
몇 년 전부터는 카지노 관련 사업들과 함께 다시 바둑 쪽에도 신경을 쓰는 듯하다. 한국바둑리그에서 감독 겸 선수를 맡아 활약하기도 했고[9], 국내기전에도 간간이 출전하는 중. 그리 눈에 띄는 승률이나 성적은 아니지만 신예 기사들을 상대로는 나름 선전하고 있다.
2014년 4월 14일, 五단으로 승단했다. 19기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 참가하였는데, 예선전에서 승리하면서 五단으로 승단하기 위해 필요한 점수를 채웠다.
2020년 2월 12일에 한국기원 프로기사회장으로 선출됐다.

3.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에 참가


2013년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에 참가했는데, 예상과 달리 3회 만에 탈락하며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탈락 당시 진행했던 데스매치의 상대는 인피니트김성규였는데, 차민수의 입장에서는 아들뻘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 상대였다. 게다가 진행했던 게임 자체도 완벽한 심리전 게임인 '''전략 윷놀이'''였다. 오랜기간 포커플레이어에, 바둑기사로까지 활동했던 그가 이런 게임에서 성규에게, 그것도 갑작스럽게 역전패로 진다는 것 자체가 쉽게 납득할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탈락한 데 대해 '각본이 아니냐'는 의문이 많았고 제작진이 직접 해명하기도 했다. 일단 당사자의 입장은 인터뷰를 참조. 일단 기본적으로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압도적으로 쳐바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것.
하지만 존재감 없이 있다가 광탈했느냐? 라고 물으면 절대 그렇지는 않다. 초반부 다수 연합 세력의 수장으로 활동하며 김구라와 게임의 양대산맥을 이뤘으며,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빠르게 게임을 이해한 다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필승전략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히 게임에 대한 설명이 끝날때마다 말버릇으로 "심플?" 이라고 말하는데, 이 발음이 아주 찰지다.(...)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참가자, 제작진, 시청자들 모두 쉽게 예상할수 있을 정도의 넘사벽 우승후보였고, 실제 게임 내에서도 우승후보다운 우수한 게임 이해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플레이어들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켜왔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게임의 탈락 원인이 된 듯 하다.[10] 더 지니어스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차민수/더 지니어스 참조.


4. 포커게이머로서의 실력


차민수의 경력에 대한 여러 말들이 오고간적이 있는데 일단 '''기록상으로는''' 세간에 알려진 정도로 엄청난 프로갬블러는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실력도 없이 아는 척을 한 것도 아니다. 간단하게 PorkerDB[11] 사이트만 참고해도 Amarillo Slim's Superbowl of Poker, Los Angeles 리미트 홀덤 대회[12]를 우승하여 4만 달러, 한화로 3천2백만 원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당시 96년이었으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몇배는 커졌다) 월드 포커 클래식에서도 5만 달러를 획득하여 3등을 차지했지만 WSOP나 WPT같은 대회에서는 뚜렷한 활약을 펼친 적은 없다. 게다가 이 후엔 그렇다할 성적은 없고 어디까지나 차민수도 프로 갬블러로 활약했다는 거지 알려진 것처럼 잘나간 건 아니다. 당장 상금 액수들을 환산해보고 경력들을 알아 보면 알 것이다.
WSOP의 성적은 좋지만은 않다만 나쁜 성적도 아니다. 여러번 출전해서 33회(13위), 34회(8위-5위-7위-27위), 37회(24위-38위)를 하였다. 참고로 대회 참가자는 평균적으로 200명와 비교하면 상당한 상위권이다. 하지만 세계랭커라고 하긴 뭐한 것이, 일반적으로 WSOP라 하면 메인이벤트, 즉 입장금 $10,000에 상금만 $8M 이상 하는 메인이벤트를 일컫는데, 메인이벤트서 '''입상한 경력은 없다.''' 그리고, PokerDB에 따르면 미국 내 랭킹이 '''2천위 밖'''이며, 세계로 따지면 '''4천위'''에 육박한다. 토너먼트 상금이 $320K, 대략 3억2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하면 그리 독보적인 플레이어라 할 순 없다. 참고로 한국의 상금순위는 전체 53위다. 이마저도 점점 내려가는중.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차민수의 편을 들어주자면. 첫 번째로는 당시 포커씬의 경우 토너먼트 상금풀이 지금처럼 크지 않아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던 무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포커 자체가 2003년 wsop에서 아마추어 플레이어인 Chris Moneymaker이 우승하기 전 까지는 아마추어는 별로 없고 프로 선수들 위주로 돌아가는 크지도, 대중적이지도 않은 마이너한 종목이였다.
당시에도 WSOP main event의 우승자에 한해 그 해의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하나의 명예에 가까웠고 이 타이틀 만으로 플레이어의 실력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이 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자였으며 현재 살아있는 레전드, 포커의 대부라 불리는 도일 브런슨의 경우 가장 위대한 플레이어로 데이비드 칩 리스를 항상 1순위로 꼽으나 리스의 경우에는 WSOP내 3개의 이벤트를 우승했으나 main event에서는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론스외의 다른 수많은 최고의 플레이어, 심지어는 차민수조차 칩 리즈를 세계 포커 게임 지존이며 역대 최고의 실력으로 평가한다. 현존하는 최강의 포커 플레이어라 여겨지는 필 아이비 역시 칩 리즈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은 바 있는데, 재밌는 것은 필 아이비 자신 역시 월드 포커 메인 이벤트 우승은 단 한번도 없지만 수많은 포커 토너먼트 우승자들은 필 아이비를 현존 세계최강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추가적으로 절대 다수의 포커 플레이어들은 토너먼트 포커와 캐시 포커를 전혀 다른 게임이라 여기고 접근하고 있으며 당장에 유튜브 동영상 몇 개만 보더라도 최고의 토너 플레이어들이 캐쉬 게임에서 죽을 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WSOP내에서 12개의 이벤트에서, 역대 최다, 우승한 필 헬무스가 있다) 두 번째로는 지금은 가장 권위있는 대회가 WSOP, WPT, EPT등이 있지만 당시에는 WSOP 다음의 권위를 가지는 투어는 앞서 이야기한 SBOP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토너먼트 플레이어로 여겨지며 WSOP main event에서 3번 우승한 스튜어트 에럴 엉거(Stuart Errol Ungar)의 경우에도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들 중 하나가 SBOP main event 3회 우승이다. 물론 차민수의 경우 main event가 아니었고 관련 기록도 없기에 때문에 의미가 없다.
그리고 차민수 본인도 자신이 캐쉬게임을 훨씬 많이 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무엇보다 포커에 손을 대게 된 계기가 돈을 벌기 위함이었기에 당시 크지 않은 상금을 위한 대회도전보다는 캐쉬게임을 선택했다고.[13]
그러므로 대회기록을 통해 차민수의 포커 경력이나 실력을 따진다는 것은 어느정도의 한계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들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으니 저평가당하는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
하지만 2017년 2월 https://twitter.com/phil_hellmuth/status/830741857088860160 위에서 언급된 현존하는 포커레전드 필 헬뮤트가 자신의 트위터에 차민수와 찍은 사진과 함께 그를 케쉬게임 레전드라 부르고 별명 Mr. Twice의 본래 뜻인 Jimmy Jimmy를 언급하고 있다.(With cash game legend "Jimmy Jimmy!" Jimmy Cha was one of the best cash game players in the world in 1980's/1990's)
단순히 이런 문구하나가 절대적 큰 의미를 가지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차민수가 정말 실력도 없으면서 거짓말을 치던 것이 아니라 현역이던 80년대의 위대한 선수가 인지하고 인정할만큼 유명한 포커선수였단 것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도박성이 많은 게임바닥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포커게임바닥도 경력을 부풀려서 애기해서 경력들을 프로모션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력이 검증된 프로들은 그런 경우들을 대단히 싫어하고 또 실력검증하려고 노력한다. 즉, 진정한 꾼은 다른 진정한 꾼을 알아본다 말이다. 현존하는 토너먼트 포커 레전드중 10손가락에 꼽히는 필 헬무트, WSOP main event 도 우승해보고 또 WSOP 내 토너먼트들을 가장 많이 우승해본 경력의 소유자인 선수가 괜히 실력도 없는 사람을 우대해줄려구 one of the best라는 표현까지 써주면서 우대해줄리는 없다. 또한 세계에서 인정하는 토너먼트들을 여러번 우승하고 세계랭킹 6위까지 올라가 보고 1999년도에는 월드 포커상금랭킹 2위까지 올라본 한국계 선수 중 가장 유명한 토너먼트 포커 게임 선수 케빈 송도 차민수의 대한 포커 실력 질문이 나올때마다 실력을 높게 쳐주고 차민수를 존경한다고 표현했다.
결론은 차민수는 거의 완전한 캐쉬게임 플레이어였으며 캐쉬게임 특성상 기록은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현재 차민수의 커리어가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플레이어였다는건 사실이며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정상급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토너먼트로는 그러지 못(혹은 토너먼트가 본인이 하는 캐시게임보다 상금이 작아서 굳이 많이 참여를 안)했고,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캐쉬게임 레전드라고 하면 대중들이 이해를 못하니 포커 챔피언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다보니 막상 기록만 봤을때는 토너먼트 기록은 별로 대단한게 없어서 저평가된 편이 강하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노리밋 홀덤이 아닌 베팅에 몇몇 제한이 있는 리밋 홀덤이 큰 게임으로 돌고는 하던 시절이라 2020년대 홀덤하면 노리밋인 현재와 달리 그는 리밋 홀덤 위주로 활동했을 가망이 클 뿐만 아니라 그가 홀덤 플레이어로써 활동이 줄은 2천년대부터 온라인 포커의 공급이 늘면서 선수들의 실력이 급속도로 늘었기에[14] 현재도 그가 한국 내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포커플레이어중 하나로 그리고 한국 포커의 개척자로 널리 인정받는다.
과거 신정환의 도박 관련 논란이 있었을 때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인터뷰

[1] 물론 대부분은 각색된거다.[2] 정찬성프랭키 에드가전에서 에디 차와 훈련하면서 한국 팬들에게는 유명하다.[3] 미국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당시 마피아 밑에서 보디가드를 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근거없는 낭설. 전혀 증거나 연계성이 없는 발언이다. '''믿지는말자'''. 애초에 미국내 마피아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채용하지를 않는다. 영화를 많이 본 듯. 그리고 주먹보다 무서운 이게 있다[4] 메이웨더는 어마어마한 떡대의 보디가드를 여럿 채용해 함께 다니는데, 메이웨더가 어디 가서 맞을까봐 그럴리가 없다. 보디가드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덩치인 건 쉽게 말해 총을 대신 맞아달라는 소리랑 똑같다.[5] 다만 야매로 무술을 배우거나 한것은 아닌듯. 그의 아들인 에디 차는 벤슨 핸더슨이나 정찬성을 비롯한 많은 MMA선수들의 타격 코치로 명성이 높은데, 격투기를 수련하는데 있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6] 바이올린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라고.[7] 프로자격까지 얻어놓고 미국으로 이민가며 기사생활을 내던진다는게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이는 당시 한국 바둑계의 열악한 상황속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전 우승상금으로 받은 돈이 우승턱으로 다 나가는게 일반적이었던 때니 말 다했다. 이는 훗날 조훈현과 서봉수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점차 한국바둑이 프로의식을 갖게 됨으로서, 또 인기를 끌며 기사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면서 개선되었다.[8] 서봉수 九단은 1970년, 차민수 五단은 1974년.[9] 한게임 팀의 감독을 맡아서 2012년에는 통합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10] 첫회에서 이준석이 탈락한 원인과 비슷한 셈. 김구라도 '차민수를 떨어트려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게임에 참여했다고.[11] 공교롭게도 아래 서술해 놓았지만 반대로 이 곳 랭크에선 순위밖으로 밀려나있다.[12] 다만 이 대회가 네임드 있는 대회는 아니다. 게다가 SBOP 메인대회에서 입상한 적은 없으며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다만 과거 wsop 다음 권위가는 큰 대회기는 했다.[13] 특히 토너먼트는 대회 열리는 곳까지 일일이 찾아가서 정해진 시간에 게임을 해야되는데다 운이 없어서 이기고 있는 상황을 한번만 넘어가도 탈락하고 그대로 끝날 수 있는 것과 달리 캐쉬게임은 넘어가서 올인되어도 리바인하면 그만이라 특히 그렇다[14] 어느정도냐면 10년전 정상급 프로들의 영상을 보면 현재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하거나 나쁜 플레이가 꽤나 보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