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씨)

 



1. 石 ( 석)
2. 昔 (옛날 석)


1. 石 ( 석)


본관으로는 경주, 성주, 성산, 밀양, 대구, 해주, 광주, 전주 등 23본이 있으며 이 중 연원을 전하는 본관은 충주, 해주, 조주 3본이다. 인구수는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49,203명이며 충주 석씨가 42,811명으로 가장 많다. 찾아봐야 한두 명 정도 나오는 엄청난 희귀도.[1] 해주 석씨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 군권을 쥔 명나라의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킨 인물인 석성의 장남 석담이 조선에 망명해서 세운 귀화 본관이다. 참고로 차남 석천도 1597년에 성주로 내려와서 성주 석씨의 원류가 되었다.

유명인으로는 나비 박사 석주명, 복식 연구가 석주선(석주명의 여동생), 축구선수 석현준, 전 농구선수 석주일, 전 배구선수 석진욱, 선장 석해균, 법조인 석동현, 배우 석광렬, 의무사령관 석웅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군권을 쥔 명나라의 병부상서였던 석성과 중화민국의 군벌이었던 석우삼(스여우싼)이 석씨였다.

2. 昔 (옛날 석)


시조는 신라 4대 왕인 탈해 이사금. 본관은 월성(경주시) 단본이며 인구수는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11,355명이다. 1번 문단의 石씨보다 훨씬 적다.
경주 김씨, 밀양 박씨와 함께 신라의 왕위 계승권이 있었던 3대 국성 중 하나였으나, 흘해 이사금을 마지막으로 권력을 잃어 몰락했다.[2] 이후에도 왕비를 배출하기도 하는 등 신라의 하위 귀족 위치에 있었지만[3] 현대에도 경주 김씨박씨에 비해 석씨는 그 수가 적은 편이다.
석항의 직계장손인 28세 안성공(安成公) 석양호(昔良浩)의 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명인으로는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짧게 활약했고, 현재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는 석수철이 있다.
[1] 충주 石씨 문중 일각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월성 昔씨의 일파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한자는 石를 쓰면서 본관은 월성으로 기록한다.[2] 경주 김씨는 왕위를 거의 독점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박씨 역시 외척으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고 신라 말기에는 다시 박씨 세습왕조가 부활하기도 했다.[3] 일본 기록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 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이다. 석씨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 물론 한때 왕 자리까지 했던 집안임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비참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