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해 이사금
'''우리 가문을 부흥시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興吾家者, 必此兒也.
용모, 재능 모든 것이 출중한 자식을 본 아버지 우로의 말이다.
1. 개요
신라의 제16대 국왕.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사금 칭호를 쓴 마지막 왕이다. 신라 역사상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는 석우로이고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의 장녀 명원부인(命元夫人)이라 하고 있다.[1]
삼국사기 기년으로만 보면 의문은 생긴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서는 석우로가 죽을 때 흘해 이사금은 어려서 걷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석우로는 249년 혹은 253년경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석우로가 죽은 그 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흘해 이사금이 죽을 때의 나이는 103세가 된다.
석우로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고 쳐도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는 해로 기록된 310년에는 60세에 가까운 나이였을텐데 신라본기에서는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많은 사람의 덕이 있다며 왕위에 올렸다'는 말이 나오니 더욱 말이 안 된다. 다만 이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초기 기년 문제며 흘해의 할아버지 내해 이사금과 조분 이사금 모두 삼국사기와는 달리 4세기 중후반에 재위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니 실제로 석우로 아들일 확률이 높다.
2. 석씨 왕실의 몰락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으로 이후 석씨 왕실은 석씨 어머니를 둔 실성 마립간을 제외하고는 신라 왕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며 주로 고위 귀족 위주로 남은 역사 기록에서도 석씨 인물과 관련 기록이 급감한다.[2] 먼저 왕위 계승에서 빠져버린 박씨 왕실은 이후에도 왕비를 배출하고 오랜 후에는 잠깐이나마 다시 왕위에도 오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볼 수 있겠다. 석씨 왕실의 몰락에 관해서는 각종 설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참조.
3. 재위
재위 기간 내내 왜와의 전쟁에 시달렸다. 왜의 침입을 줄여보고자 즉위 3년(312년) 왜왕[3] 의 아들과 아찬 급리의 딸을 결혼시킨다. 왜는 30여 년 뒤인 344년 왜왕이 다시 공주와 혼례를 요청[4] 해오나 공주가 이미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사실 아버지 석우로가 왜인들에 의해 끔찍하게 화형당해 죽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흘해 이사금은 일본이 싫었을 것이다. 혼인 거부로 인해 왜는 345년 외교를 단절했고 346년에 군사를 보내 경주를 포위하였으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한 후 퇴각하려 하자 기병으로 공격해 격퇴하였다.
즉위 21년(330년)에 벽골제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벽골지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는 당시 어떻게 봐도 백제의 영토다. 남의 나라, 그것도 적국에 방둑이 1800보나 되는 저수지를 쌓았다는 기사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당시 신라 내에 벽골지라는 지명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흘해 이사금이 벽골제를 건설했다는 언급은 삼국유사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백제의 서술이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당시 백제가 직접 지배하던 영역은 현재의 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뻗어있기는 하였으나 엄연히 당시 전라북도 김제시는 마한 연합의 일원으로서 백제의 간접적 영향권에는 들어있는 나라였다. 그런데 신라가 괜히 간접적으로라도 대립 관계에 있는 백제한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벽골제가 있는 전라북도 김제 지역은 어떻게 봐도 신라 땅일 수 없으므로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는 벽골제가 4세기 초 마지막으로 번성했던 마한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즉위 41년인 350년엔 큰 홍수가 나서 관청과 가옥들이 다 떠내려가고 산이 13개(30군데라고도 함)나 무너졌다고 한다.
356년 승하했고 아들이 없었기에[5] 김씨인 내물 마립간이 다음 왕위를 잇는다. 이때까지는 석씨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로 결국 석흘해가 석씨 마지막 왕으로 남게 됐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흘해 이사금 본기'''
一年夏六月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급리를 아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왜국 왕이 혼인을 청해 와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다
四年秋七月 백성들이 굶주려 사신을 보내 구휼하다
五年春一月 아찬 급리를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二月 궁궐을 중수하다가 비가 오지 않아서 그만두다
八年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九年春二月 농사에 방해되는 일을 금지시키다
二十一年 벽골지를 만들다
二十八年春二月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三十五年夏四月 폭풍이 불다
三十六年春一月 강세를 이벌찬으로 삼다
三十六年春二月 왜왕이 문서를 보내 국교를 끊다
三十七年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자 이벌찬 강세가 물리치다
三十九年 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다
四十一年春三月 황새가 월성 귀퉁이에 집을 짓다
四十一年夏四月 수해로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산이 무너지다
四十七年夏四月 왕이 죽다
4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 비하면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특히 벽골제 운운하는 21년조 기사를 빼고 보면 즉위 9년~28년 사이의 기록이 전무한 것이 인상적이다. 흘해 이사금을 끝으로 아달라 이사금부터 시작한 2권이 마무리된다.
[1]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과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아들과 함께 신라에 파견나와 있던 왜의 대사를 죽이고 석우로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흘해 이사금과 동일인인지는 불명. 한편 이 사실을 들은 왜의 천황이 대노하자 신라에서 그를 달래기 위해 석우로의 아내를 처형했다고 하는데 일본서기 기록이 꾸준히 자신들과 삼국의 위치를 바꿔놓는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석우로의 아내를 처형시켰다는 부분은 허황된 기록이거나 신라에서 외교 마찰을 피하려고 거짓으로 그녀를 처리했다고 둘러댔을 가능성이 있다.[2] 신라 중기 이후로 석씨 세력이 신라에서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측 사서 속일본기에 기록된 723년 8월 8일 일본에 갔다온 사신단 중 부사가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이다. 석씨가 통일신라 시기에도 최소 5두품 이상의 귀족이었던 것.[3] 왜왕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필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으로 뭉개진 시점에 해당하기 때문. 다만 신찬성씨록에서 진무 덴노의 형인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가 신라 왕가와 조상이 같다고 서술되어 있으므로 왜왕은 우가야후키아에즈일 가능성이 높다.[4] 왜국 측은 왕자인데 신라 측은 신하의 딸이라 급이 안 맞아서 재혼을 요구한 듯 하다.[5] 삼국유사에 따르면 공한(功漢)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공한의 아들이 길승(吉升)이고 길승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이차돈이라고 한다. 훗날의 소지 마립간에게 분명히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