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철

 

'''석수철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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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6번(1996~1997)'''
한혁수(1993~1995)

'''석수철(1996~1997)'''

박계원(1998~1999)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No.72'''
'''석수철 (昔守澈 / SUK Soo Chul[1])'''
<colbgcolor=#a0a037>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73년 4월 25일 (50세)
'''본관'''
경주 석씨
'''출신지'''
전라북도 옥구군 옥구면 옥봉리[2]
'''학력'''
군산중앙초[3]-군산중-군산상고-성균관대[4]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1차 지명 (쌍방울)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 (1996~1997)
'''지도자'''
성균관대학교 코치 (1999~2011)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 (2011~)'''[5]
1. 소개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시절
3.1. 1996 시즌
3.2. 1997 시즌
4. 지도자 경력
5. 여담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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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image]
쌍방울 레이더스의 3루수이자 현재 군산상고 야구부의 감독.

2. 아마추어 시절


군산공항 근처 옥봉초를 다니다가 야구에 빠지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권유[6]로 당시 시내에 있는 군산중앙초로 전학을 가게 되어 본격적인 야구를 시작했다. 포지션은 3루수와 유격수를 번갈아 보면서 시작.
군산중학교 진학 이후에도 계속 3루수와 유격수를 번갈아서 보다가, 군산상고로 진학 후 고등학교 2학년부터 본격적인 3루수로 포지션 정착을 하게 된다. 3학년 때 열린 전국체전에서 군산상고가 3위를 거두고, 성균관대로 진학한다.
성균관대학교 시절에는 팀 내에서 강타자로 이름을 많이 알렸다. 하지만,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성균관대는 대학야구 약체팀이라서 팀은 항상 하위권 성적을 맴돌았다. 팀 성적은 부진했지만 결국 대학교 3학년 시절인 1994년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되어 당시 고려대 내야수 김종국과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를 이루게 된다. 1995년 4학년 시절에는 일찌감치 쌍방울 레이더스 지명이 확실시 되는 분위기였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예선 무대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활약하여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내기도 했다.
결국 대학시절의 활약으로,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계약금 1억 5천만 원, 연봉 2천만 원에 쌍방울 1차 지명 입단이 확정되었다.

3. 프로 시절



3.1. 1996 시즌


데뷔 첫 해인 1996년 114경기에 출장, 289타수 77안타(0.266)에 2루타 16개, 3루타 1개, 홈런 3개, 32타점을 기록했다. 당시 6월까지는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의 지략과 선수들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데뷔 첫 해부터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한다.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은 전주구장에서 열린 홈 1, 2차전을 전부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두게 된다.[7]
3차전부터 4차전까지는 현대 유니콘스의 홈인 도원구장에서 진행되었는데, 3차전은 0-3으로 무기력하게 쌍방울이 패하였다.
4차전에서는 8회말까지 2-2로 동점이던 상황에 김경기가 친 '''3루 쪽으로 굴러오는 평범한 땅볼을 1루 악송구로 실책'''을 범하고 이어진 김상국의 2타점 3루타로 2-4로 패배하여 결국 5차전까지 가게 되었다. '''또한 이 결정적인 실책 하나로 인해 시리즈의 분위기는 급격히 현대 쪽으로 넘어갔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이 실책이 아니었다면 쌍방울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5차전에서는 0-2로 팀이 지고 있던 상황에, 5회말 선두타자로 등장해 좌전 안타를 치며 출루했으나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무득점에 그쳤다. 7회말에는 1사 만루 상황의 찬스를 얻었지만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8회말에는 2사 1,3루 기회에서 1루 주자로 출루했다가 정민태의 견제로 아웃당하고 결국 KBO 역사상 최초로 리버스 스윕으로 패배하며 쌍방울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좌절되었다.
플레이오프 최종성적은 13타수 3안타(2루타 1) 1사구 .231/.286/.308을 기록한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신인왕 투표에서 3위를 기록했다.[8]

3.2. 1997 시즌


데뷔 첫 해의 좋은 활약에 힘입어 3,600만 원으로 연봉이 인상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닥쳐온 고관절 부상으로 결국 개막 엔트리에도 빠지게 된다. 그의 부상으로 쌍방울의 3루수는 노장이었던 김성래, 한대화가 돌아가면서 맡게 되었지만, 노장들의 노쇠화로 인하여 핫코너가 구멍이 되어버려 팀 수비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997 시즌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게 되며 시즌을 마감지었다.
복귀를 위해 재활을 계속 하다가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입단 제안도 받았으나, 당시 대만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모든 일이 없던 것으로 되어 입단 취소.[9]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정하였고, 프로 최종 경력은 데뷔 첫 해인 1996 시즌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비운의 선수'''라고 많이 불리게 된다. 프로 입단 후에 아예 뛰지 못한 것도 아니고, 발전 가능성이 엿보일 때 부상으로 아쉽게 은퇴를 했기 때문.
은퇴 후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1999년부터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했던 성균관대학교에 야구부 코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4. 지도자 경력


성균관대에서 코치로 새롭게 야구 인생을 시작하며 성균관대를 강팀으로 바꿔놓으며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10] 대표적인 선수로는 김태완, 모창민[11], 이상훈[12], 정재훈[13]이 있다. 국가대표 코치로도 선발되어 야구 월드컵, 세계대학야구선수권대회 등 여러 국가대표 대회에서 코치로 차출되기도 했다.
그러던 2011년, 모교인 군산상고의 요청으로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가 부임하기 전까지 군산상고는 8년 동안 감독이 7번이나 바뀌며 팀 분위기가 많이 안좋았는데 그가 부임하고 나서 2년 만에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과 전국체전 우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야구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전학을 가면서 인재 유출이 심해졌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2016년에 다시 봉황대기 결승에 진출했으나 휘문고에게 끝내 패하였다. 하지만 그 해 열린 전국체전에서 세광고를 물리치며 2013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전국체전 우승을 일궈냈다.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한 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등 굵직한 대회에서 국가대표 코치를 맡고 있다.
그러나 2018년 7월 4일, 고창영선고와의 전국체전 예선전에서 '''승부조작이 의심되는 졸전 끝에 0-4 참패'''했고, 이로 인해 본선 직행이 불투명해진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측이 대한체육회,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등 유관단체에 조사를 의뢰하면서 코치 생활 20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5. 여담


  • 역대 KBO에 등록 된 선수 중 유일한 석씨이다.[14]
  • 프로 구단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한다.
  • 박명환야구TV오상민이 출연했을 당시 어느 네티즌이 고등학교-대학교 선배인 석수철과의 관계를 물었는데 별다른 친분은 없다고 한다. 오상민 왈, 석수철이 오상민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6.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쌍방울
114
289
.266
77
16
1
3
32
32
4
8
.360
.310
1997
1군 기록 없음
<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114
289
.266
77
16
1
3
32
32
4
8
.360
.310

7. 관련 문서


[1] WBSC 공식 등록명.[2] 현 군산시 옥서면. 옥구군은 1995년에 군산시로 통합되었고 옥구면은 옥구읍으로 승격되었고, 그 뒤에 현재의 옥서면이 옥구읍에서 분리되었다.[3] 옥봉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야구를 하기 위해 군산중앙초로 전학을 갔다.[4] 유학과 92학번이다.[5] 2011년 군산상고의 부름을 받고 첫 해에 감독대행으로 부임하여 다음 해부터 공식 감독이 되었다.[6] 아버지도 중학생 때까지 야구부에서 활동한 선출이라고 한다.[7] 만약 쌍방울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왔으면 해태 타이거즈와 맞붙게 되어 호남더비가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8] 당시 신인왕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이자 신인으로 30-30을 기록한 동갑내기 친구 박재홍.[9] 당시 2억 원에 계약을 체결한 상태에서 취소가 됐다고 한다.[10] 성균관대 감독은 쌍방울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이연수. 쌍방울이 해체하고 은퇴를 선언하여 모교인 성균관대 감독을 2001년부터 현재까지도 맡고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이연수 감독 밑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다고 전해진다.[11] 대학교 시절 활약으로 단국대 나지완과 함께 대졸 최대어였다.[12] 프로에서는 그저 그런 성적이었지만, 드래프트 당시에 대졸 타자 최대어였다.[13] 휘문고 시절까지 유격수로 활약하여 OB 베어스의 지명을 받게 되었으나, 정재훈 본인은 대학교 진학을 희망했다. 다른 대학교에서는 유격수로 키우겠다고 했는데 성균관대에서는 투수로 기르겠다고 선언하여 결국 정재훈 본인의 선택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한 후 두산 베어스에서 중간계투와 마무리로 큰 활약을 하게 된다.[14] 그것도 다수를 차지하는 石씨가 아닌 昔씨이다. 昔씨는 신라 석탈해의 후손으로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11,355명 밖에 없는 희귀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