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원
1. 개요
선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1] 에 있던 섬으로 방조제를 지을 때 대부도와 연결되었다. '''선감원'''은 이 섬에 있던 수용소로, 일제 시대 말기부터 1982년까지 약 40년 동안 존재했다. '''선감학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창작센터로 바뀌었다. 인근에는 당 시설의 비극적인 역사를 엿볼수있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세워져있다.
2. 역사
2.1. 일제강점기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2] 의 지시에 의해 세워졌다. 농사 지을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섬주민들을 섬 밖으로 강제 이주 시킨 후, 전국에서 부랑아로 지목된 소년 수백 명을 섬으로 잡아 들이고 선감원에 가두었다. 거리의 불량아들을 감화하는 이른바 감화원이라는 미명하에 지어진 이 곳에 끌려오게 되는 명목상 이유는 절도, 폭행 등의 경범죄부터 항일 독립운동 행위, 그 외 정치범이나 사회주의자, 또는 이유 없이 잡혀오는 청년들 또한 많았다.
피상적으로는 일반 학교와 동일한 학제를 이수하게 되어있으나 선감원에 온 소년들은 공부는커녕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잘못을 하면 처벌의 일환으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손톱 밑에 끼워 넣는 고문을 하였다. 신념으로 가득한 독립운동가들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문을 어린애들을 상대로 자행한 것이다. 게다가 섬이어서 소년들은 달리 나갈 방법도 없었다.
탈출을 시도한 소년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거나 갯벌 쪽으로 나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이렇게 죽은 소년들의 시신은 같이 생활하던 동료 소년들이 가마니에 싸서 원생 공동묘지에 매장을 했었다고 한다.[3] 하지만, 살아남은 소년들도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제징용이 그렇듯 군사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내몰렸다.
2.2. 광복 이후
선감도의 도립학원도 부활시키기로 하고 준비중이며 소년 감화원으로 쓰일 예정
- 1946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시 교화 위원회에서는 금번, 도 당국으로부터 시에 전달된 지시에 의하여 거리에서 떨고 있는 고아 30명을 선감도 고아원에 수용하기로 하였다
- 1946년 11월 29일자 대중일보
광복 이후, 선감원은 관리권이 경기도로 이관됐고, 선감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부랑아 수용시설'로 다시 문을 열고 20세 미만의 소년들만 수용하는 부랑아 강제 수용소로 자리잡으며, 이후에 일어난 한국 전쟁으로 선감도 전체가 미군들의 손에 넘어갔다가 전쟁 후 다시 경기도가 직접 운영하는 부랑아 선도 수용 시설로 그 악명 높았다.1963년 어느 날, 8살 쌍둥이 형제는 시장에서 그만 할머니의 손을 놓치고 만다. 형제는 경찰에 의해 아동보호시설로 옮겨졌고, 그 길로 영문도 모른 채 경기도의 한 섬으로 끌려가 부랑아 수용 시설에 수용된다. 도착한 그 곳에는 이미 쌍둥이 형제 또래의 소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시작된 지옥 같은 생활. 쥐나 뱀까지 잡아먹으며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던 것은 물론, 무자비한 폭력과 강제 노역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결국 쌍둥이 형은 수용 시설에서 1년이 채 못 되어, 숨지고 말았다.
- 2016년 7월 28일자 서울신문 지옥의 섬 선감도, ‘소년판 삼청교육대’…공포의 수용시설 충격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다 수용하였다.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같은 케이스처럼 무고한 어린이나 청년 또한 다수 포함되었으며[4] , 일제 시대의 잔혹한 고문과 강제 노역 또한 그대로 행해졌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선감원에서 폭력과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섬을 탈출했던 임용남 목사의 증언을 토대로 실화 소설 '뭉치'가 만들어졌다. 더 우스운 것은 당시 정부에서는 5.16 쿠데타 이후 일명 혁명 정부의 이미지 홍보를 위해 이 시설을 모범적 복지 시설이라고 국정홍보 기록영화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당시부터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5] , 선감도 안에서 선감원장이 가진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름 없었고, 지금처럼 정보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이 사실을 알리려다 잘못되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 있던 만큼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장 큰 비극은 대한민국의 1세대 사회복지 지도층이라 할수있는 인물들도 오랜 과거부터 선감원에 근무한 이력이 밝혀져있다는것이다.[6] 그러나 이들이 선감원에서 어떠했는지 자세한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해당 지도층들을 소개하는 웹페이지의 약력에서도 선감원 관련 약력은 '''고의적으로 누락되어있었다.'''
3. 조명
제대로 된 자료 없이 잊힐 뻔한 소외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인 선감원 사건이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선감원 부원장의 아들인 이하라 히로미츠가 사죄의 심정으로 쓴 〈아!선감도〉라는 소설을 1989년 발표하고 선감원 위령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와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극우 단체 회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일본 전국에서 연설을 했다. 이하라는 1998년 당시 3천만 원을 모금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안산시를 방문하여 모금약정서를 작성했다. 1999년 안산시에서 위령비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 일본인의 도움은 받지 않고 안산시의 예산으로 세우겠다고 하며 지나친 반일감정을 내세워 이하라의 모금을 거절했는데, 갑자기 백지화되었다.
이후 2000년 8월 15일 MBC에서 광복절 특집극으로 선감원을 다룬 '선감도'를 방영했는데 여전히 위령비는 감감무소식이었다가 2014년, 위령비 건립 추진 16년 만에야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79세가 된 이하라 히로미츠도 참석했다.
소설 중에는 김영권 작가가 쓴 지옥극장이 선감원을 소재로 한다. 주간지 사건인에서 연재했었다. 연재 링크
한겨레에서 기사화하기도 했다.
운동권 장애인인권 언론인 비마이너에서도 '강제수용의 역사'등의 여러 특집으로 다루거나 언급한 바가 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15년 11월 13일 방송에서 선감학원 사건을 다뤘다.
다음 스토리펀딩에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일어난 만행을 알리는 내용이 연재되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2015년 11월 28일 방송 말미에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음을 예고하며 당시 피해자 및 관계자들의 제보를 부탁했다. 차후 방영 예정. 2020년 07월 기준 다시 제보를 부탁했다.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됐다.
2016년 7월 27일 추적 60분에서 먼저 방송했다.
2017년 6월 30일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이곳에 끌려갔다가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게된 한 스님의 이야기가 방송됐다.
2017년 10월 28일 SBS 뉴스토리에서 <선감학원, 그곳은 지옥이었다> 를 제목으로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방송했다.
2018년 9월 16일 KBS 도시전설에서 우주소녀가 VR 공포체험을 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2020년 과거사법 통과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가동됨에 따라 경기도에서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를 통해 진상조사에 필요한 피해사례를 최대한 수집할 방침이다. 관련기사
[1] 설립부터 1973년까지는 부천군 대부면,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옹진군 대부면 소속이었다.[2] 당시 총독은 미나미 지로였다.[3] 하지만 사실상 제대로 된 봉분 하나 조차 없는,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넋을 봉양하고 시신이 짐승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을 매장한 땅 위에 돌이나 바위를 쌓아 만든 소위 '애장터'와 같은 형식의 묘지보다도 못한 무덤.[4] 2020년 8월 15일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에 의하면, 가족이나 살고 있는 집이 있음에도 혼자 길에서 놀고 있다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식으로 아이들이 납치된 것이 태반이라고 한다.[5] 갯벌을 통해 탈출하려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한 주민도 여럿 있었다.[6] 이들은 당시 경기도청에서 선감원을 관리하던 부서의 관료와 선감학원의 운영을 맡았던 인사들이다. 이들 3인은 1958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한 단체를 만든다. 그 단체가 바로 서울대학교 사회사업학과(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