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장수

 


偰長壽
(1341~1399)
1. 개요
2. 활동방면과 업적
3. 가족관계
4.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고려조선 초의 문관이다. 위구르 출신 향화(向化)인이다. 아버지는 백료손(伯遼遜)으로 본래 원나라 색목인 관료였다.
1359년[1] 19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이주했다. 이후 원나라 볼모 시절 아버지와 친구였던 공민왕의 후원으로[2] 1362년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시작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등 밀직사문하부의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경력을 쌓았다.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 과정에서 재신(宰臣)인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이성계와 함께 흥국사 9공신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고 유배되면서 정치 주류에서 이탈하게 된다. 하지만 태조가 반드시 구제해야 하는 인물로 이색 · 우현보와 함께 지명하면서 그 외 30여 명과 함께 유배에서 해제되고 명예직인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받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복귀 후에 실제로는 역관 담당 부서인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로 근무하다 1396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다시 재신이 되었다.
성인 설씨는 고려로 이주 후 가문의 선조가 설련하(偰輦河)[3]에 살았다고 하여 얻었다. 이후 태조가 계림관향(貫鄕)으로 내려주었다. 사성(賜姓) 경주 설(偰)씨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2. 활동방면과 업적


위구르인으로서 원나라에 살다 고려로 이주해 온 독특한 경력 때문에 중국어, 몽골어, 한국어3개 언어에 능통하였고 조선 초기 외국어 교육과 역관 제도화에 기여했다. 19세에 고려로 이주할 때부터 이미 우리말을 대략 구사했고, 문장과 언변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탁월한 외국어 능력과 원나라 시절부터 집안 전체가 문장능력으로 관료생활을 해온 덕택에 주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 방면에서 활약했다.
저서로는 《직해소학》이 있다. 외교 수준에서 사용되는 문어체 중국어를 다룬 고급 역관 교육서이며 그동안 사용되어 온 평민의 일상 언어를 기반으로 한 중국어 교재의 대체재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3. 가족관계


5형제 중 장남이며 아버지는 설손(偰遜)으로 원래 이름은 백료손이었으나 고려로 이주하고 나서 개명했다. 어머니는 조씨이다.
동생으로는 태종 대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며 육조직계제 개편안 실무를 담당한 설미수(偰眉壽)가 유명하다.
조카로는 세종 대에 집현전 학사를 역임하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까지 오른 설순(偰循)이 있다. 설순은 설경수(偰慶壽)의 아들이다.

4. 대중 매체에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배우 이신재가 맡았다. 외견상 혼혈인이라는 특징은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비중이 높은 배역이 아니므로 용납이 되는 수준. 무인정사에서 조준, 성석린 등과 살아남아 이방원의 밑에서 관직 생활을 이어가다가 개경 환도 직후 병사한다.

[1] 이 해 12월에 고려는 1차 홍건적의 난을 겪었다.[2] 공민왕은 설장수의 아버지 백료손과 친분이 깊어 백료손이 고려로 이주했을때 땅과 집을 하사하며 부원군으로 삼았을 정도였다.[3] 지금의 몽골 북서부와 러시아 부랴티야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흐르는 세렝게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