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랑

 

스마랑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어: Kota Semarang, Semarang
네덜란드어: Samarang(역사적 표기), Semarang
자바어: Kutha Semarang
영어: Semarang
중국어: 三寶壟[1]
1. 개요
2. 역사


1. 개요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의 주도로 시 인구 1,815,729명(2018년 기준), 도시권 약 730만 명(2018년 기준)이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의 대도시이다. 도시 인구 기준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여덟 번째[2], 자바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지만, 도시권(스마랑 남쪽의 스마랑현, 서쪽의 큰달Kendal현, 동쪽의 드막Demak현과 그로보간Grobogan현, 그리고 스마랑현이 감싸는 살라티가시Kota Salatiga를 포함)으로 보면 스마랑 도시권은 자카르타 도시권, 수라바야 도시권, 반둥 도시권에 이어 인도네시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특히 메단은 도시 인구는 스마랑보다 많지만 도시권 인구로는 밀린다.
이곳 방식으로 만드는 인도네시아식[3] 춘권인 '룸피아'(Lumpia)라는 음식이 특히 유명하여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스마랑식 룸피아[4]를 맛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스마랑은 '룸피아의 도시'(Kota Lumpia)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역사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에서 정화 함대의 분함대가 현재의 스마랑 인근에 도착한 기록이 있으며 이 지역은 그 이전에도 자바 중부의 항구로서 기능하였지만, 현재와 같은 대도시는 아니었다. 스마랑이 본격적으로 항구로서 개발된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의 드막 술탄국 시대로, 스마랑과 인근이 현(kabupaten)의 지위를 획득한 시점은 공식적으로 1547년 5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스마랑은 마타람 술탄국의 항구로 번영하였는데, 1678년 1월 15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 아망쿠랏 2세의 채무 지불 과정에서 스마랑과 인근의 영토를 마타람으로부터 조차해 갔다. 1705년,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1708) 과정에서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1세(푸그르 공Pangeran Puger)는 자신의 편에서 싸운 대가로 동인도 회사에 스마랑을 영구히 양도하였다. 이 시점부터 스마랑은 공식적으로 동인도 회사령에 편입된다.
이슬람 시대와 식민 시대에는 자바 중북부의 물류 요충지이자 주요 무역항으로서 개발되어 자바 중동부의 농산물이 스마랑을 거쳐 동인도 타 지역 및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를 감안하여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자바에 철도와 도로 등 근대적 물류 시설을 도입할 때 스마랑은 최우선 순위에 놓였다. 1867년 8월 10일 자바 최초로 개통된 철도 노선은 스마랑과 탕궁(Tanggung)을 잇는 25km의 노선이었다.
20세기 초에는 공업도시로도 개발됨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특히 노동조합, 노동운동이 발달하였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주요 거점으로서 '적색 도시'(Kota Merah)로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이 자바를 점령하고 통치하던 1944년 2월, 일본군 장교 등이 이곳에 설치한 '위안소'로 네덜란드계 여성 35명을 강제 연행하여 감금하고 강간하거나 성매매를 시킨 사건이 있었다(스마랑 강간 사건 또는 스마랑 위안소 사건). 이 사건으로 전후인 1948년의 바타비아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일본군 장교 7명과 군속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일본 정부 역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를 추인하였다. 1994년의 네덜란드 정부 후속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 하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의 위안소에서 일하던 200–300명의 네덜란드계 여성 가운데 최소한 65명은 확실한 성매매 강요의 피해자였다고 한다.

[1] 정화의 아명인 馬三寶에서 유래했다.[2] 자카르타의 위성도시 데폭, 탕으랑, 브카시 셋 모두에 단순 인구로는 밀린다.[3] 필리핀에서도 춘권을 '룸피아'로 부르는데 어원은 모두 민남어 '룬피아'(潤餅仔 lūn-piáⁿ-á)이다.[4] 스마랑식보다 담백하고 덜 단 수라바야식 룸피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스마랑식이 더 인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