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페리

 


1. 소개
2. 운임
3. MTR과의 비교
4. 매체에서
5. 이야깃거리

天星小輪, Star Ferry

1. 소개


[image]
홍콩 빅토리아 만을 넘나드는 페리 운행체계를 이르는 말.
한강 유람선처럼 보이지만 강물이 아닌 바다를 건너는 바다용 배다. 바다 폭이 좁아 한국인의 눈에 강처럼 보일 뿐이다.[1] 홍콩인들은 선박 이용에 거리낌이 없어 대체 육상 교통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탑승률이 아주 높은 편이다.
사진과 같이 모든 배가 2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홍콩역 근처 센트럴 선착장 및 침사추이역 인근 선착장에서 출발 및 도착한다. 그 외에 완차이역과 홍콩컨벤션센터 쪽 부두와 침사추이 선착장을 왕복하는 노선도 있다. 메인은 센트럴과 침사추이를 잇는 노선으로 패키지 관광 프로그램에서도 주로 이 노선을 이용한다.
스타페리와 함께 퍼스트 페리가 홍함 왐포아 선착장과 노스 포인트, 그리고 토콰완 카우룬시티 선착장과 노스 포인트를 잇는다. 홍함 왐포아는 섬 쪽 부럽지 않은 부촌이며 원래 한국 교민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고 현재도 집값이 비싼 곳이다. 하지만 카우룬시티는 서민 동네에 중국 이주민들이 많아 분위기가 관광지들과는 좀 다르게 약간 우중충하다. 하지만 물가는 훨씬 싼 편이다. 노스 포인트는 섬 쪽의 서민 주거지로 옛날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왐포아에는 스타페리도 들어왔는데 왐포아로 가는 스타페리 노선은 2011년 모두 폐지되었다. 센트럴에 있는 왐포아행 부두는 해사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중이었다. 그러다가 2020년을 기해 센트럴-왐포아 간 페리가 부활했다.
홍콩섬에서 구룡반도를 운행하는 해상수단 중, 스타페리의 인지도나 탑승률이 가장 높다. 타 해상수단은 요금이 비싸고 자주 운행하지 않는데다가, 웜포아로 가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완차이에서 침사추이를 오가는 스타페리의 이용 비율이 낮은 이유도, 완차이 페리터미널의 접근성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운임


[image]
사진 가운데의 토큰이 스타페리 토큰이다. 상부용 토큰(녹색)과 하부용 토큰(파란색)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왼쪽은 광저우 지하철,오른쪽은 선전 지하철 토큰.
이하 전부 홍콩달러 기준이다.
구간
층수
월~금
토일공
월정기권
센트럴-침사추이
2
2.5
3.4
125
1
2.0
2.8
센트럴-컨벤션센터(완차이)
-
2.5
3.4
옥토퍼스 카드로도 결제가 가능하다.

3. MTR과의 비교


해저터널로 다니는 MTR과 이 페리 노선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 안 맞기는 하지만, 스타페리를 이용할 때의 장점은 생각 외로 많다.
  • 야경 구경 가능
그래서 이 배의 경우 야간에 사람이 더 몰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빅토리아 피크에 날이 흐려서 야경을 제대로 못 보는 경우 피크 수요가 여기로 몰린다. 갑작스럽게 가축수송을 하는 셈이 되는데, 사실 날씨가 맑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매일 오후 8시에 Symphony of Lights라 해서 빅토리아 만 일대 센트럴 빌딩(+ 침사추이 일부 건물들)이 레이저를 쏘며 빛의 향연을 보여주므로 그 때에는 날씨에 상관없이 몰린다.
  • MTR보다 싼 값에 이동할 수 있다.
센트럴에서 침사추이를 가는 경우, MTR 췬완선을 타면 고작 두 역 가는 주제에 HK$6~7이 나온다. 해저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산운임을 매기기 때문이다. 홍콩의 물가를 감안하면 비싸다. 저 돈이면 똑같은 센트럴역에서 홍콩섬선을 타고 코즈웨이 베이까지 갈 수 있는 돈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물가가 싼 동네다 보니[2] 이렇게까지 하는 관광객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의외로 MTR 거르고 스타페리 타는 사람도 제법 있는 편. 특히 숙소가 침사추이 일대면 스타페리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 덜 걷고 싶은 사람에게는 연계교통에 따라 오히려 MTR이 유리할 수도 있다.
센트럴 선착장 기준으로 버스교통편 연계는 꽤나 좋은편이다. 빅토리아 피크로 가는 방법중 하나인 시티버스 15번도 이용가능하며, 시간대에 따라 오션파크 입구까지 가는 버스가 간혹 이곳을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다만 스타페리에서 도보를 통해 MTR로 간다면... 좀 힘들다. 그나마 가까운 홍콩역(+IFC 홍콩)만 해도 500m 가까이 걸어가야 하며 MTR 센트럴역으로 가려면 1km 가까이 걸어야 한다. 그래도 육교를 타면 크게 헤메지 않고 센트럴 쪽으로 갈 만 하다.
완차이 선착장의 경우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인데, 완차이역이나 트램 정거장에서 한참 걸어가야 되는 위치에 있으며 횡단보도가 없고 주변 빌딩에 연결된 육교를 지나야 도착한다.
구룡반도 침사추이 선착장의 경우는 관광지 및 쇼핑센터 등이 모두 걸어가기에 부담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발지 및 목적지에 따라 MTR이냐 스타페리냐를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좋다. 홍콩의 경치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면 스타페리가 좋고, 빠른 이동이 목적이라면 MTR이 낫다.

4. 매체에서


보통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홍콩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 최가박당 1에서 특별출연한 석천이 크레인에 매달린 채로 주인공에게 단서를 알려주고 떨어지는데, 하필이면 떨어진 곳이 스타페리의 굴뚝이다(...).
  • 영웅본색 3편에서 주인공인 마크(주윤발)가 일하는 곳이 스타페리로, 남베트남에서 홍콩으로 숙부를 데려온 뒤 스타페리에 天星이란 한자를 페인트칠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5. 이야깃거리


1966년에 MTR도 없고 크로스하버 터널도 없어서 홍콩 섬-구룡반도 간 연락을 스타페리가 독점하던 시절, 페리 요금이 인상되자 이에 대항해 비폭력 시위가 일어났다. 총독부 정부가 이 항의시위를 탄압하자 어렵게 살던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주로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등 구룡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구룡반도의 버스회사인 KMB도 공격당했다. 홍콩 총독부는 당황해서 경찰을 투입해 얼른 진압해 버린다.
결과적으로 이 시위가 홍콩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홍콩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섬 쪽이다. 부유한 홍콩 섬에 대부분의 역량이 모여있어 그 당시에도 홍콩은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잘 사는 동네의 대명사로서 평균적으로 부유했다. 그러나 1960년대 홍콩은 분배가 잘 안 되어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홍콩 사회는 현재보다 더 계층 격차가 심각하고 하층 계급의 생활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홍콩 섬롤스로이스가 택시 노릇을 하고, 고급 유럽식 사교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며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아시아 최고로 부유한 곳인 반면 중일전쟁국공내전,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겪으며 피난민들이 중국 및 베트남에서 몰려든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생활 수준이 처참하게 어려웠었다.
더불어 MTR이나 자동차용 해저터널이 개통하기 이전에는 구룡반도와 홍콩 섬을 오가는 건너는 교통수단이 배뿐이었다. 그래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의 교류가 극히 적어 다른 나라처럼 따로 국밥으로 놀았다. 여기에 홍콩 섬에 비해 상당히 낮은 구룡반도 주민들의 경제력이 더해져 몇몇 홍콩 섬 주민들은 아예 구룡반도 주민들을 홍콩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홍콩 섬에 사는 사람들은 구룡반도에 절대 발도 들이밀기 싫다는 식으로 구룡반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불어 부정부패도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심각했었다. 소위 차값을 주고 받는다는 은어로 통하던 뇌물은 기본이라서 뇌물을 안 주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도 하지 않거나[3]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차 값을 안 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거나, 취업에서 면접관에게 차값을 줘야 합격하는 식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돈 세탁도 기승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개판이었다. 이 때는 조세 피난처로도 아주 선호받았다.
이 폭동은 이후 1967년 마오주의자들이 문화대혁명을 보고 영감을 얻어 일으킨 67폭동과 함께 염정공서 설립, MTR과 크로스 하버 해저터널의 개통 등 홍콩의 사회와 제도를 바꾼 도화선이 되었다. 1974년 염정공서가 세워지고 계좌 개설을 어렵게 해 놓는 한편 신설 염정공서가 검은 돈을 전부 적발해내 돈세탁을 더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조세피난처 노릇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1979년 MTR 쿤통선[4] 개통, 소방훈련학교 및 경찰훈련학교 설립,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와 구속수사 및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영국 본토의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말 그대로 홍콩의 질적 선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빈부격차도 많이 해소된다.

이러한 사회 및 제도의 개혁으로 1979년 홍콩은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오늘날에도 홍콩은 빈부격차가 큰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의 빈부격차의 원인은 대륙에서 밀려들어 오는 사람이 많은 것이 크다. 중국의 13억 인구를 감안할 때, 홍콩과 붙어 있는 광동 성의 빈농들의 숫자만 해도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빈부격차는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다. 구룡반도도 싹 다 재개발되고 생활 수준이 더욱 올라갔기 때문이다.
[1] 홍콩에는 민물이 없다. 강에도 바닷물이 들어와서 순수 담수는 저수지 뿐이다. 홍콩에서는 해산물이 아주 흔하고 동네 하천에서도 바닷고기가 잘 잡히는데, 이 때문이다.[2] 홍콩에서도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동네다. 특히 신구룡에 속하는 카우룬 시티 등은 더 그렇다.[3]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며 소위 물세를 걷었다. 구급대는 유류비를 받았다.[4] 그땐 쿤통에서 침사추이, 몽콕을 거쳐 센트럴로 연결되는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