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 개요
1988년 4월 26일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치른, 즉 1987년 제도적 민주화 이후[1] 최초로 치러진 총선이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조기 실시했다. 투표율은 75.8%를 기록했다.
2. 배경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2대 총선때보다 23명이 늘어났다. 지역구 의원수는 40명이 늘어났고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7명이 줄어들었다.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민중의당, 제3세대당 등이 참여하였다.
다수당에 의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든 기존의 선거법은 다소 완화되어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이 전국구의 1/2를 가져갔다.''' 이전까지 2/3에서 1/2로 감소된 것이다. 참고로 다음 총선부터 이러한 규정은 삭제된다.
3. 과정
민주정의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의 분열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득표율은 36.6%에 그쳤다. 게다가 대선을 통해 선호하는 당에 대한 지지가 뚜렷한 지역구도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조금만 뒤틀리면 다시 독재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노태우 정권은 지지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비록 분열로 인해 졌다지만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한겨레민주당이 단일화를 한다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권이 대선에 이어 총선 단일화에도 실패하며[2] 결국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후보를 따로 내면서 분열하자 이에 대한 실망감이 더더욱 커지고 노태우 대통령도 5.18 민주화운동 강제진압 사과 등 상당히 유화적인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공천에서 제5공화국 인사 상당수를 배제하면서[3] 일부 민주세력의 호감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뀌던 것도 (당시로써는) 호재로 여겨졌다.[4]
하지만 총선 선거운동 기간 도중 예전과 같은 관권, 혼탁 선거가[5] 펼쳐지면서 "이번에 민정당에게 몰아주면 다시 의원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게 되었고, 설상가상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총재로 재직하면서 저지른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면서 민정당에게 악재로 작용하였고 민주당과 평민당, 공화당 지지층이 결집하며 선거 양상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선거 전 각 당의 목표 의석수는 민주정의당 과반수 의석(150석 이상) 확보,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은 제1야당 확보, 신민주공화당 및 기타 정당은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확보였다.
선거 결과, 여소야대로 민정당은 지역구 87석(득표 34.0%)을 확보하는데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민주당과 평민당의 단일화 실패로 선전할 것이라 여겨졌던[6] 수도권에서도 민정당은 총 77석 가운데 32석에 그쳤는데, 여당 지지세가 상당한 편인 인천 석권 등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10석으로 공동 2당의 참패를 보였으며 공화당으로 득표율이 분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득표율이 12대 총선보다도 낮았다. 그럼에도 TK의 절대지지와 호남을 제외한 각지에서의 고른 의석 획득으로 지역구 1당을 차지했고, 득표율 비례가 아닌 지역구 1당이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절반을 배정받는다는 당시 선거규정으로 전국구 75석 중 38석을 챙기면서 총 125석을 획득한다.[7]
한편, 통일민주당은 부산 지역을 석권하고,[8] 그 외 전국에서 고른 득표를 얻어 득표율에서 2위(23.8%)를 기록했지만 소선거구제도로 인해 후보도 2위로 아쉽게 낙선되는 지역구가 많아서 원내 3당에 그쳤다. 특히 경남에서 일부 서부농촌지역과 당시 경남소속이던 울산시를 민정당에 내준게 뼈아팠다. 다만 서울 강남지역에서의 선전은 눈에 띄였는데, 총 의석 8석 중 무려 4석을 차지했다. 특히 서초구의 경우 야권 성향 무소속 박찬종 의원과 함께 여당 후보를 모두 몰아냈다.
반대로 평화민주당은 득표율 3위(19.3%)에 동부지역에서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권 석권과[9] 호남권 원적 유권자가 많은 서울에서의 선전(1당, 17석)만으로 원내 2당을 차지했다. 서울, 호남을 제외하고는 경기 성남시 을(현재의 성남시 중원구)에서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원내2당이 된거니 어찌보면 흠좀무하면서도 당시 견고한 지역주의의 씁쓸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충남 13석, 충북 2석)과 경기도 지역(2당, 6석)[10] 에서 선전해 총 35석을 확보했지만, 충북 의석을 민정당에게 대거 내주며 충남맹주로만 자리잡게 된다.[11] 사실 충남맹주라기도 머한게 총 18석(대전 포함) 중 5석을 자당이 아닌 후보에게 뺏기며 확실히 다른 지역주의 정당에 비해선 비교적 충성도가 낮다는걸 보여줬다.
제3야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은 군소정당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1석 확보에 그쳤다. 그나마 당선된 한 명은 전남 신안 지역구의 박형오 후보인데, 같은 지역구에 후보등록한 평화민주당 한화갑의 후보등록이 무효 처리되면서[12] 후보가 민주정의당 김복수 후보와 박형오 둘만 남게 되자 평화민주당이 박형오를 전면적으로 밀어준 탓이라 자력당선이라 하기 힘들다. 그렇게 당선된 박형오마저 선거 직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한겨레민주당은 망했어요(...).
민주한국당(평택시-송탄시), 신한민주당(전주시 을), 한국국민당(대구 달서구) 등은 아예 당선자조차 내지 못하고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이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 이런 여소야대 정국은 민주화 열풍과 맞물려 광주특위 구성 등으로 5공 비리가 대대적으로 까발려지고 사회각지에서의 각종 부조리한 문제점 제기가 활발히 이루워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여소야대 정국은 1989년 공안정국과 제2당인 평화민주당의 여당 협조모드로 상당히 기세가 수그러들게 되었고, 특히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압도적 여대야소로 아예 판세가 뒤바뀌어버린다.'''
지역주의 정서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특히 충청권 원적 유권자들의 신민주공화당 지지(15.8% 득표)가 대선에 비해 두드러진 반면, 민주화의 열망으로 양김에게 갔던 표는 많이 떨어졌다.
한편, 이 선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나와 부산직할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청문회 스타가 되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또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한 이후 정치인생에서 상기한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하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지역분권 및 지방정부 자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집권 민주정의당의 참패 충격 때문인지 총선 치른 다음 날 증시가 대폭락했다. 당시 코스피 지수는 25.97포인트 폭락한 618.73포인트로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증시 사상 최대 당일 하락폭이었다. 그 당시 하한가 종목은 322개로 역시 당시 사상 최다 하한가였고, 전 업종이 하락세로 마감했다.
4. 결과
4.1. 당선인
5. 선거를 뒤엎은 리허설 해프닝
당시 방송사고 경위를 보도한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 내용"먼저 제주시 지역에서는 이 시간 현재 개표가 완료돼 민정당의 현경대 후보가 3만 8천 245표를 얻어 득표율 39.9%로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무소속의 고세진 후보는 2만 8천 739표로 30%, 민주당의 김성범 후보 1만 4천 367표로 15%, 평민당의 강종호 후보 9천 573표로 10%, 공화당의 신두완 후보 4천 764표로 5%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선거를 하루 앞두고 제주MBC에서 리허설했는데 그 장면이 송출되는 방송사고가 나서 제주도 일대가 완전 난리가 난 적이 있다. 그나마 새벽정파 시간이라면 여파가 덜 했겠지만 오후 방송 시작 직전에 일어난 사고라 후폭풍이 더 거셌다. 이에 MBC에서 사과방송을 하고 문책조치를 내렸고, 수사결과도 단순실수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방송사고로 인해 제13대 대통령 선거부터 이어진 컴퓨터 여론조작 설이 설득력을 얻어 민주정의당은 제주도에서 전멸했고, 선거운동 중반부터 민정당의 예상의석수가 점차 줄어들던 상황이었는데[15] 이를 완전히 굳혀지게 만들었다.
결국 MBC 본사에서는 당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했고 전국 50분 + 지역 10분 단위체계로 진행할 예정이었던 개표방송을 제주 지역에서만은 본사 개표방송을 그대로 방송했다. 또 당시 제주MBC 사장과 상무가 이에 책임지고 사표를 냈으며, 보도국장 등 일부 인사는 대기발령 조치가 내려졌다. #
실제 제주시 결과는 현경대 31,720표(33.5%), 고세진 후보 39,329표(41.45%)로 현경대 의원의 3선이 좌절되었다.[16][17] 제주도 전체 결과는 통일민주당 1석, 무소속 2석. 참고로 그 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고세진, 이기빈 의원은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1] 실질적 민주화는 YS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부터로 본다. 사실 후술되어있듯 비례대표 선출과정 등에서 불공정성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제도적으로도 미흡한 점은 있는 선거였다.[2] 다만 단일화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 1번지"로 상징적 선거구인 종로구에선 평화민주당의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이 사퇴하면서(불출마 후 전국구 당선) 통일민주당 김명윤 총재권한대행으로 사실상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으나 김명윤 후보가 패배했다.[3] 물론 민정당 내 신주류들의 5공 세력 견제 또는 노태우 대통령의 박철언 정책보좌관 등 자기 사람 심기 의도도 있었다.[4] 사실 민정당은 민주화 이후 선거제 개정 논의 당시에도 야권이 단일화하면 민정당이 과반은커녕 개헌저지선 이하로 밀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중선거구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중선거제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에도 전국구 1당 독식 규정 완화 때문에 국회에서 과반에 미달할 가능성이 컸던데다가, 민주당과 평민당이 갈등하며 분열상이 지속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할 경우에는 어부지리격으로 수도권 의석을 대거 싹쓸이 하여 의회 과반을 여유있게 차지할 것으로 판단하면서 소선거구제 전환을 당론으로 변경했고 결국 3월 8일에 소선거구제로 변경시키는 안이 통과되었다. 선거운동기간 초반까지만 해도 야권이 분열로 지리멸렬할 것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그 예상이 맞아들어가는듯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꽤나 큰 판단착오가 되었던 것이다.[5] 대놓고 민정당 후보 선거유세장에 가면 국밥 같은 식사와 몇만원씩 든 돈봉투를 나눠줬고, 현역군인들의 부재자투표는 선거공보물만 받은 채 정작 표는 간부들이 모두 민정당 후보를 찍어서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6] 실제 이때 민주당과 평민당간의 단일화가 성공했으면 단순계산만으로는(민주 득표+평민 득표) 민정당이 수도권에서 꼴랑 15석을 얻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민주당과 평민당의 핵심 지지층이 서로 이질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일화했더라도 단순 계산만큼의 득표는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단일화 실패에 실망해 투표를 하지 않거나 기권한 표도 있겠지만.[7] 이러한 규정이 없이 전국구 방식으로 선거가 만약 치러졌다면, 민정당 의석은 전국구에서 12석이 줄어 총 113석(총 의원수의 37.8%에 불과한 값이다)이 되고,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은 각각 5, 4, 3석이 전국구에서 늘어 각각 75석, 63석, 38석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제1당 1/2 전국구 부여 규정이 사라진 14대 총선의 방식과 같다.[8] 다만, 금정구 1석을 민정당 후보에게 1% 차이로 아깝게 내줬다. 그 이유는 민정당 후보로 나선 김진재가 지역 유지였던 점이 컸는데, 그는 이 지역 최대 향토기업인 동일고무벨트의 사장이었다. 여담으로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이 지역구는 그의 아들인 김세연이 명맥을 이었다. 다만 21대는 불출마.[9] 총 37석 가운데 36석을 차지. 신안군에서 한겨레민주당이 의석을 얻었으나 이는 한화갑이 출마하지 못한 결과였다.[10] 수원시 을, 성남시 갑, 의정부시, 광명시, 파주군, 고양군 등 경기 대도시와 북서부에서 승리를 거뒀다.[11] 충북은 지리적 특성상 그 이후에도 신민주공화당의 후신격인 자유민주연합이 큰 힘을 쓰지 못했다.[12] 당시 한화갑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인해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는데 아직까지도 사면 복권되지 않은 상태였다.[13] 군소정당의 당선자는 전무하다.[14] 전술했듯 당시 총선 규정상 지역구 제1당에게 전국구 의석 수의 '''절반'''을 부여하고 나머지 당들이 지역구 의석 수에 따라 전국구 의석이 배분되는 방식이었다.[15] 선거운동 초반 당시에는 수도권에서 민정당이 야권분열로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선거운동 중반부터 민주당과 평민당의 지지율이 오르고 지지층 일부가 공화당으로 쏠리면서 경합지역이 크게 늘어나던 상황이었다.[16] 현경대 후보는 이후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모두 당선되어 5선 고지에 오르니 리허설 승리 오보로 되려 물을 먹은 뼈아픈 패배라고 할 만하다. 여담으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대까지는 줄곳 3연 낙선 중. 이후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17] 여담으로 통일민주당의 김성범 후보는 13,621표로 14.38%, 평화민주당의 강종호 후보는 7,913표로 8.35%, 신민주공화당의 신두완 후보는 2,172표 (2.29%)를 얻는 등 실제 선거 결과에서는 리허설보다 적은 득표를 얻었다. 애초에 40:30:15:10:5로 5단위로 떨어지게 리허설을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