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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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언준(申彦俊)

은암(隱岩)
생몰
1904년 11월 8일 ~ 1938년 1월 20일
출생지
평안남도 숙천군 우상면 미남리[1]
(현 평안남도 숙천군 장흥리)[2]#
본관
평산 신씨[3]
사망지
평안남도 평원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
2.3. 이른 죽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기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신언준은 1904년 11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미남리에서 부친 신정균(申貞均)과 모친 송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언준의 부친 신정균은 동학도였으며, 신언준은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한 후에 입교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입교 경로와 교단 내 직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0세까지 한문을 수학했고, 14세가 된 1918년에는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오산학교는 한말 상공업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한 이승훈이 설립한 신민회계열의 민족학교로 평양의 대성학교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의 근거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학하면서 민족의식을 익혔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평원군에서도 3월 6일 첫 시위가 발생했다. 평원군에서의 시위운동은 3월 18일 장날에 절정으로 치달았는데, 이날 신언준도 시위에 참가해 김억만, 박인송, 한준겸과 함께 오산학교 천도교인 학생대표로서 시위 행진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군 숙천 헌병분견대 군경의 제지를 받아 시위가 중단되었고 주동자들은 일제히 체포되었다. 이후 신언준과 김억만은 태형을 받은 뒤 석방되었지만 박인송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3.1 운동 이후, 신언준은 오산학교에 복학했지만, 오산학교가 일제에 의해 교사가 소실되었고 재학생들이 흩어져서 학교 운영이 어려웠으며, 일제 순경들의 감시가 심해 학교에서 마음놓고 다닐 수 없었다. 그러던 1921년,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혁명공보>를 발행해 선전활동을 했다. 이에 학교가 <혁명공보>를 발행한 학생들에게 징계처분을 내리자, 그들은 동맹휴업을 감행했고 600명의 학생들이 학교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제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이때 신언준도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고 이후로 오산학교를 더이상 다니지 않고 고향에 머물렀다.

2.2. 독립운동


1923년, 신언준은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천도교 신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국내에서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느니 중국에 가서 배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언준은 상하이에 도착한 후 곧바로 항저우로 가서 영문전수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오송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신언준은 대학에 재학하던 중인 1924년 3월 10일 상하이에서 윤자영, 조덕진, 최충신 등과 함께 진보적 청년 독립운동단체로서 '청년동맹회'를 발기 조직했다. 청년동맹회는 ‘민족적 확고한 단결과 조직 위에서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자’는 목표 아래, ‘독립운동의 기치 하에서 민족적으로 일치 단결하자’, ‘민족적 독립의 완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분투하자’는 실천 강령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천도교는 종파상의 갈등으로 인해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 신언준은 신파에 가담했고 그해 4월 신파 중심의 신문화운동 전개에 참가해 <신인보>의 주필을 맡았다. 신언준은 과거 문명, 특히 외래종교 풍습의 답습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형성되지 못했음을 비판했다. 그는 인도의 미신적 숭배 사상과 중국의 지나친 윤리적 발달에 따른 가족제, 그리고 서구 물질 문명의 개인주의적 사상을 예를 들어 지적하면서, 인간 본연의 주체를 상실한 현시점에서 미래 인류가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제시한 '신인간관'의 사상적 요소는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에 입각했고 '성경신(誠敬信)'을 현대철학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먼저 '성(誠)'은 개체적 훈련의 요건, '경(敬)'은 사회생활의 요건, '신(信)'은 개체와 사회의 합일화로 풀이했다. 또한 성은 지적 명확함과 정의적 열정의 합성으로 인격체 형성의 근본이며, 경은 평등사상으로 겸양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회화의 기본이며, 성은 반드시 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내 안의 한울님을 통해 한 개인의 자유 확립으로 독립적 삶을 영유하는 동시에 사회, 즉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단결해 나아가야 하며, 진정한 자유는 개인과 국가, 민족 사이에 '실천성'이 궁극적으로 발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신'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즉, 신은 독립적 자유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이면서도 사회실천을 전개해가는 중요한 가치철학이었다. 신언준은 성경신의 사회실천적 요소를 '지(知)', '정(情)', '의(意)'로 다시 개념화하여 '학문과 종교, 그리고 실행적 윤리 도덕'으로 정의했다. 그는 서구물질 문명발달의 폐해에 대한 해법이 실행적 윤리 도덕이라면서 이것이 곧 정신문명의 진보라고 봤다. 다시 말해, 그는 정신문명의 진보는 인간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각하여 삶을 창조하는 실천성에서 발현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신언준의 주장은 독립운동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현재 조선이 서구의 제국주의와 물질 만능주의에 맞서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가 지닌 공상적 안위와 의지적 평화에 심취해 있어서 독립을 위한 자유의지의 투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 개개인이 일제의 침탈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각자가 투쟁으로 결의를 통해 투쟁철학을 세울 때 진정한 독립정신이 발현된다고 봤다.
또한 한 민족의 흥망이나 한 사회의 성쇠와 한 개인의 인격은 백절불굴의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용기가 없다면 그 민족은 무가치한 것으로 소멸되어버린다면서, 무저항주의는 열패한 자 또는 쇠망한 자의 비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천도교인 청년들뿐만 아니라 조선 청년들에게도 용맹과 기백을 진작시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조선인이 될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신언준의 신인간관은 인격의 자유를 통한 자립정신, 민족과 국가를 위해 혁명을 도모하려는 창조정신, 그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계급에 대항하는 평등정신에 기초했다.
1926년 7월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이 전민족대당체를 건립하자고 하면서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을 촉발하자, 신언준은 이에 부응하여 상해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주요섭 등과 함께 그 해 10월 23일 청년동맹회와 화동한국유학생회 등 상해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대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한인학우회를 결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927년 3월 10일, 일부 한인유학생들은 청년동맹회의 마르크스주의 신봉에 반감을 품고 상해한인청년회를 결성했다. 이때 신언준도 여기에 가담해 후보집행위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상해한인청년회원들도 사회주의의 열풍에 휩쓸렸고, 1927년 11월 재중국본도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신언준은 상해한인청년회 역시 사회주의로 물들었다고 판단하고 안창호의 흥사단에 희망을 품고 1927년 10월 27일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제220단으로 정식 입단했다. 이후 그는 안창호를 도와 독립운동 문건 작성, 통역, 강연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독립운동의 저변을 넓혔다.
한편, 신언준은 1924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에서 설립, 운영하던 상해 인성학교의 굣가로 초빙되어 독립운동가 및 교민 자녀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교장 조상섭과 여운형, 학감 윤기섭, 교사 김두봉 등과 교류하면서 열성으로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그 결과 그는 같은 해 6월 7일에 개최된 상해 대한교민단 의사회에서 윤기섭의 후임으로 인성학교 학감에 당선되었다.
신언준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상해 <중앙일보> 논설위원, <세계신문> 아주(亞洲)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열강들의 동향과 동아시아 정책을 분석 및 보도했다. 그리고 1929년부터 <동아일보>의 상하이와 난징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정세 및 열강들의 동향을 분석 보도하고, 임시정부와 그 밖의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전파, 홍보했다. 그는 중국의 각 신문, 잡지에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논설들을 게재하여 한중 양민의 친선을 도모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여론을 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長春縣)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수로 문제로 한중 양국 농민들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국내언론에 국민회의 동북대표단들이 일제에 항의한 사실을 보도하고, 동시에 일제가 조선인을 이용해 만주침략을 기도한다고 전하여 배일열기가 한인들 사이에 높아졌음을 알렸다. 그리고 동북외교협회가 국제연맹에 정당한 해결을 촉구하는 호소를 도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언준은 또 <상해거주 조선인의 각 단체의견>을 <동아일보>에 게재해 조선내의 동포들이 은인자중하고 중국인들에게 보복적 행동을 피할 것을 권고했으며, 장학량으로부터 만보산 사건을 확대해석하지 않을 것이며 이번 사건이 조선 농민 사이의 분규가 아니라 상조권 문제이며 일본의 요구를 절대거절하겠다고 밝힌 전보내용을 국내 신문에 기고했다. 또한 국내 조선인들에게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라는 장문의 사설을 기고해,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고 알렸다.
1931년 7월 10일, 신언준은 중국인들에게 직접성명서를 발표하고 선전활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의 긴급 회의에 난징 정부 대표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국민당 외교부장 왕정연과 만나 일제의 한중 민족 이간책동에 말려들지 말 것을 호소하고, 중국 정부가 이주 한인들의 보호에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친분이 있는 중국 언론계 인사들과 신문 기자들을 초청해 만보상 사건의 내막을 폭로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김구는 중국 정부와 손을 잡고 일제에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일제 고위급 인사에 대한 암살 및 거점 파괴 활동을 벌였다. 한인애국단에 의해 최초의 거사는 이봉창의 천황 암살 시도였다. 신언준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거사 직전 기념 촬영한 이봉창의 사진을 중국 신문에 배포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때도 윤봉길의 기념 촬영 사진을 배포했다. 이에 중국인들의 여론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데 모아졌다. 그 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지원과 군사 협조를 받게 된 임시정부는 그간의 침체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2.3. 이른 죽음


이후 신언준은 중앙군관학교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청년들을 만나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1935년 말에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이듬해 1월 부득이 귀국해야 했고, 이후 고향에 지내며 병마와 싸우다가 1938년 1월 20일 사망했다. 향년 3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신언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구한 말 평안도 숙천군 우상방 미남리 → 1896년 숙천군 우상면 미남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원군 숙천면 미남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숙천군 장흥리[2] 인근의 통덕리·백로리·도덕리와 함께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영일도 이 마을 출신이다.[3] 33세손 '''언(彦)''' 현(鉉) 윤(允) 종(鍾) 항렬, 아들은 철학자 신일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