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3왕가
1. 개요
몽골 제국 서방의 주치 울루스, 차가다이 울루스. 우구데이 울루스와 비교해 동쪽에 위치한 세 왕가(울루스)를 가리킨다. 칭기즈 칸은 동복동생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에게 동북지역의 영토를 분봉했다.
2. 왕가
2.1. 카사르 왕가
칭기즈 칸의 동복동생인 카사르의 후손. 제왕(齊王) 작위를 받았다. 청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아내이자 순치제의 생모이며 강희제의 조모인 효장문황후가 이 가문의 후예이다.
2.2. 카치운 왕가
칭기즈 칸의 동복동생인 카치운의 후손.
2.3. 옷치긴 왕가
예수게이와 호엘룬 소생이며 막내인 테무게 옷치긴은 몽골이 기원한 만주의 흥안령 일대를 분봉받는다. 만주 일대는 목축 뿐 아니라 농경과 수렵도 가능한 풍부한 생산력을 갖춘 지역이기에, 옷치긴 왕가는 다른 왕가보다 눈에 띄게 발전한다. 옷치긴의 이후의 군주들은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해 1316년에는 옷치긴의 후손 토크타가 요왕(遼王)의 일자왕호를 얻었으며, 만주 일대를 장악해 14세기 동아시아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중앙의 원나라 조정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세력을 키워 중앙정부에 대해 스스로 대칸이 되려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원나라 멸망 후에도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가 주원장과 타협 끝에 만주를 지배한다.[1] 명나라 아래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올량합 3위를 가리킨다.
한국과도 관계가 깊은데, 이성계의 조상인 이안사가 항복한 산지(散吉) 대왕(大王)은 옷치긴 왕가의 군주 타가차르와 가까운 제후왕이다. 이안사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옷치긴 왕가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를 세습하며 함주, 길주 등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한다.[2]
윤은숙 교수(강원대)가 저술한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고려왕이 심왕에 임명된 데에도 이 옷치긴 왕가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스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막대 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에 국정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 그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는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이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릭부케(阿里孛哥)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항상 쿠릴타이(일종의 화백 제도)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제국은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양왕을 두어서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후에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은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하였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충렬왕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왜 고려 왕실이 원나라 중앙 정부에 의해 심왕에 임명되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원나라의 대칸들은 개경(원간섭기 고려)과 심양(심왕)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의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중앙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