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토크토아부카

 



'''작위'''
심왕(瀋王)
'''성씨'''
왕(王)
'''휘'''
한국식 한자 독음
독타불화(篤朶不花)
탈탈불화(脫脫不花)
몽골어
ᠲᠣᠭᠲᠣᠭᠠᠪᠦᠺᠠ(Toγtoγa Buqa)
영어
Toqtoa Bukha
'''부친'''
강릉대군 왕덕수
'''생몰년도'''
? ~ 1376년
'''재위기간'''
1354년 ~ 1376년
1. 개요
2. 생애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왕족이자 심왕. 고려사에는 篤朶不花(독타불화), 원사에는 脫脫不花(탈탈불화)로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왕고의 손자이고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덕수(王德壽)의 아들이다. 충렬왕의 4대손으로 증조부는 충렬왕의 적장자 강양공 왕자이며, 할아버지는 심왕 왕고다. 34대 공양왕의 어머니 국대비 왕씨는 왕토크토아부카에게 종고모[1]가 된다.
1350년 원나라의 동궁(東宮) 케식(怯薛官, 겁설관)이 되었으며, 1354년 심왕에 봉해진다. 기철공민왕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으로 왕토크토아부카를 고려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한다. 그러나 왕토크토아부카는 숙부(공민왕)에게는 허물이 없으니 그 자리를 뺏을 수는 없다고 하며 사양했고, 덕흥군 왕혜가 왕토크토아부카를 대신해 추대된다. 공민왕은 1364년 왕토크토아부카의 선택에 기뻐하며 후한 선물을 보내고, 1366년에는 왕토크토아부카가 답례로 공민왕에게 사신을 보내기도 한다.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지 1년째인 1375년 1월, 북원에서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다고 해서 왕토크토아부카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한다. 왕토크토아부카는 군대를 모아 모친과 함께 고려 국경 근처로 진격했고, 요동의 군벌이었던 나하추는 사실 확인을 위해 고려에 사신을 보낸다. 고려에서는 4월에 심왕의 고려왕위 계승을 금지해달라는 글을 북원에 보냈으나 왕토크토아부카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8월에 왕토크토아부카의 군대는 요동 신주를 지났고, 고려에서는 원수들을 각 도에 보내 군사를 징발했다. 끝내 무력 충돌은 없었고, 국경 인근에 주둔했던 왕토크토아부카는 1376년 2월 죽었다.
왕토크토아부카의 무력시위에 가담했던 김의(金義) 또는 김에르케(야열가) 등은 북원에 남았기에 고려에서는 이들을 압송해줄 것을 청했으며, 심왕과 내통했던 승려 소영(小英)은 벽란도에 빠뜨려 죽였다.

3. 친원 세력 자극


토크토아부카는 공민왕 시기 억눌렸던 권문세족을 자극해 고려를 다시 친원 국가로 돌렸다. 심왕이 무력 시위를 벌이자 부원 세력들은 다시 북원에 유화적 입장을 보였고, 공민왕이 등용한 신진사대부는 이에 반대하며 고려 조정에 혼란이 생긴다.
고려에서는 1375년 4월에 이인임 등이 심왕의 고려 왕위 계승을 금지해달라는 글을 고려 관료들이 서명해 북원 중서성에 보내기로 하는데,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는 선왕 공민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끊기로 했다며 굳이 글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서명에 반대한다. 같은 해 6월에 이첨, 전백영 등이 이인임을 탄핵하나 우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두 사람을 숙청해 관직을 떨어뜨린다. 서명에 반대했던 임박은 역적으로 몰려 장을 맞고 길에서 죽기도 했다.
1376년 10월 북원의 중서우승상 코코테무르는 고려가 명을 섬기지 말고 북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민심의 이반을 막을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보냈으며, 실제로 우왕은 즉위 3년째인 1377년 북원의 책봉을 받는다. 권문세족 이인임 등 세력은 1388년 무진피화 전까지 권세를 누리게 된다.


[1] 아버지 강릉대군의 사촌누이. 강릉대군과 국대비 왕씨는 모두 강양공의 손자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