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 포스투무스
Agrippa Postumus/Marcus Julius Caesar Agrippa Postumus/Agrippa Julius Caesar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 대(大) 율리아(Julia the Elder)와 로마 제국의 장군, 정치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막내아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두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태어날 당시부터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적돼 친양자로 낙점됐다. 반면, 이 사람은 친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간의 약속에 따라 입양되지 않기로 정해진 탓에 정식 입양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형이 요절한 이후,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외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약속은 파기됐고, 서기 4년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 티베리우스와 함께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러 공문서와 기록들에서 나오는 표현, 즉 "ferocia(잔인함, 야만성)" 문제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양자 입적 직후부터 제왕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3년 뒤인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요청과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제도의 작은 섬 피아노사로 추방됐다. 이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파양되면서 완전히 제위계승권이 박탈되고 모든 상속권도 빼앗겼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해인 서기 14년 일찌감치 숙청이 결정되고,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단독황제가 된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휘하 친위대 병사들에게 추방된 섬에서 처형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 남자 황족인 만큼,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모든 황족들과 혈통적, 법적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진 다섯 명의 황제 뿐만 아니라 이 왕조의 아우구스타들과 제위계승자(황태자)들까지 모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이어진다.
형으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있고 누나로는 대(大)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가 있다. 입양형제로는 어머니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있으며, 큰 누나 아그리피나의 남편인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이 된다. 따라서 3대 황제 칼리굴라와 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외조카가 된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기원전 1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오른팔인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의 세번째 아내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였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아그리파가 급사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두 형과 달리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지 않았고, 애당초 아우구스투스의 결정과 아그리파, 율리아 결혼 전 약속에 따라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됐다.
이후 어머니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티베리우스와 재혼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의붓아들이 됐다. 하지만 이 결혼은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 문제로 완전히 파탄났고, 기원전 2년 외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직접 간통죄로 고소해 처벌하는 일이 터진다. 따라서 포스투무스는 자연스레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 율리아가 추방된 이 해, 포스투무스는 친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2년 8월 1일 주최한 마르스 신전 봉헌 행사에 참가한 뒤 형 가이우스와 함께 트로이 경기를 이끌고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역대 규모로 열린 검투사 경기와 맹수 사냥, 모의 해전을 성공리에 이끌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살아생전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자녀 중 두 아들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입양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서기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하면서 없는 약속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혈육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2년 리비아의 친아들이자 자신이 6살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공식 입양하고, 죽은 대 드루수스의 장남이자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때 그는 친혈육 포스투무스도 함께 입양했는데, 포스투무스 입양은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 사후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와 함께 로마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낙점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양자입적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세 사람에게 제왕교육을 시작했고, 2살 차이의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각각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게르마니아와 로마에서 나눠 시작했다[5] .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포스투무스와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형제에게 나란히 죽은 가이우스, 루키우스가 갖고 있던 특권과 명예가 보장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또 포스투무스에게는 19살이 되면 자동으로 그의 죽은 친형들이 가진 모든 권리를 보장받도록 해줬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계획은 포스투무스의 "ferocia(잔인함, 야만성)" 문제 때문에 미뤄지더니 결국 추방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나고 만다.
포스투무스는 어린 시절부터 덩치가 크고 힘이 굉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집이 세고, 폭력적인데다 학습 능력까지 지나치게 떨어졌다. 이는 그보다 어리지만 일찍부터 신체적 장애 문제로 군복무를 할 수 없게 된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훗날의 클라우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고민을 안겨줬다고 한다[6] .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가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그가 가진 선천적 능력을 잘 다듬길 바라며 함께 여행도 다니고 수영, 책읽기 등 취미활동도 즐겼는데, 이런 그의 계속된 노력에도 포스투무스의 행동거지와 잔인성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그 결과, 포스투무스는 황궁 안에서 가장 숨기고 싶어한 비밀이 됐고, 늘 그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경비대가 호위하면서 포스투무스의 난폭한 행동을 제지했다[7] .
이런 단점들로 인해 양자 입적 직후로 예정된 성년식은 19살이 될 때까지 늦춰지게 됐고, 어떤 후계교육도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포스투무스는 낚시 외에는 모든 학문에 관심도 없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만하고 무례한 언행을 내뱉고, 행동은 잔인하고 포악해져 광기 수준으로 통제 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궁 안은 포스투무스의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황족들까지 노력하게 되는데, 수에토니우스 등에 따르면 이 문제는 포스투무스가 군복무를 위해 준비가 될 무렵 더 심해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황궁 안의 관리, 황실 노예, 근위대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다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남성 황족들과 그의 누이들까지 더 이상 포스투무스를 제어하기 힘들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측근들과 포스투무스 문제를 상의한 뒤, 서기 7년 원로원에 포스투무스 처벌 문제를 직접 상정하면서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 그리고 국가 수장으로서 포스투무스를 영구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혈육을 이탈리아와 코르시카 사이의 험준한 바위섬 플라나시아{오늘날의 피아노사 섬(Pianosa Island)으로 유배보냈다. 동시에 그는 포스투무스와 양자관계, 모든 특권을 파양했고, 후계자 티베리우스와의 모든 관계까지 완전히 파기시켰다. 따라서 포스투무스의 모든 유산상속권은 영구 박탈됐는데,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8] 를 대비해 섬에 초소를 짓고 24시간 감시를 지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를 영구추방시킨 뒤, 호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단 한번도 자신의 친혈육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다. 이는 서기 14년까지 계속됐는데,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측근인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수도 로마를 떠나면서 포스투무스가 있는 플라나시아로 은밀히 찾아갔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가 악녀로 주장된 근거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비아는 아들 티베리우스의 경쟁자 복귀를 막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따곤 했던 무화과나무 열매들에 독약을 발라 아우구스투스를 독살하고 포스투무스 석방을 추진한 막시무스까지 제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별로 신빙성도 없다고 오늘날 로빈 레인 폭스 등 로마사 권위자들은 일관되게 부정한다.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프린켑스가 된 서기 14년 8월, 로마에서 파견된 근위대 소속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그런데 이때 이를 지시한 최종결정권자는 티베리우스였다고 해도, 포스투무스 처형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티베리우스의 권력 안정을 위해 내린 결과였고, 그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파견된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를 호위하던 부대였는데, 이때 파견된 백인대장을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은 포스투무스를 죽이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포스투무스가 맨 손임에도 덩치가 상당히 크고 힘도 황소를 때려 잡을 정도로 장사였기 때문이다.
포스투무스는 추방되기 전부터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외조부 사망 직후 살해된 까닭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연대기>에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고 이 사건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평가처럼 당시 원로원은 역시 티베리우스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그가 살해된 직후,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걱정대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해 티베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콤모두스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레멘스의 반란은 포스투무스 사후 2년이 지난 뒤 일어났고 클레멘스가 포스투무스를 사칭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 개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 대(大) 율리아(Julia the Elder)와 로마 제국의 장군, 정치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막내아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두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태어날 당시부터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적돼 친양자로 낙점됐다. 반면, 이 사람은 친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간의 약속에 따라 입양되지 않기로 정해진 탓에 정식 입양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형이 요절한 이후,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외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약속은 파기됐고, 서기 4년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 티베리우스와 함께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러 공문서와 기록들에서 나오는 표현, 즉 "ferocia(잔인함, 야만성)" 문제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양자 입적 직후부터 제왕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3년 뒤인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요청과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제도의 작은 섬 피아노사로 추방됐다. 이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파양되면서 완전히 제위계승권이 박탈되고 모든 상속권도 빼앗겼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해인 서기 14년 일찌감치 숙청이 결정되고,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단독황제가 된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휘하 친위대 병사들에게 추방된 섬에서 처형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 남자 황족인 만큼,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모든 황족들과 혈통적, 법적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진 다섯 명의 황제 뿐만 아니라 이 왕조의 아우구스타들과 제위계승자(황태자)들까지 모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이어진다.
형으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있고 누나로는 대(大)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가 있다. 입양형제로는 어머니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있으며, 큰 누나 아그리피나의 남편인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이 된다. 따라서 3대 황제 칼리굴라와 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외조카가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기원전 1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오른팔인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의 세번째 아내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였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아그리파가 급사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두 형과 달리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지 않았고, 애당초 아우구스투스의 결정과 아그리파, 율리아 결혼 전 약속에 따라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됐다.
이후 어머니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티베리우스와 재혼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의붓아들이 됐다. 하지만 이 결혼은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 문제로 완전히 파탄났고, 기원전 2년 외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직접 간통죄로 고소해 처벌하는 일이 터진다. 따라서 포스투무스는 자연스레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 율리아가 추방된 이 해, 포스투무스는 친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2년 8월 1일 주최한 마르스 신전 봉헌 행사에 참가한 뒤 형 가이우스와 함께 트로이 경기를 이끌고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역대 규모로 열린 검투사 경기와 맹수 사냥, 모의 해전을 성공리에 이끌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2.2. 양자 입적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살아생전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자녀 중 두 아들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입양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서기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하면서 없는 약속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혈육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2년 리비아의 친아들이자 자신이 6살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공식 입양하고, 죽은 대 드루수스의 장남이자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때 그는 친혈육 포스투무스도 함께 입양했는데, 포스투무스 입양은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 사후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와 함께 로마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낙점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2.3. 추방
양자입적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세 사람에게 제왕교육을 시작했고, 2살 차이의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각각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게르마니아와 로마에서 나눠 시작했다[5] .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포스투무스와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형제에게 나란히 죽은 가이우스, 루키우스가 갖고 있던 특권과 명예가 보장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또 포스투무스에게는 19살이 되면 자동으로 그의 죽은 친형들이 가진 모든 권리를 보장받도록 해줬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계획은 포스투무스의 "ferocia(잔인함, 야만성)" 문제 때문에 미뤄지더니 결국 추방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나고 만다.
포스투무스는 어린 시절부터 덩치가 크고 힘이 굉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집이 세고, 폭력적인데다 학습 능력까지 지나치게 떨어졌다. 이는 그보다 어리지만 일찍부터 신체적 장애 문제로 군복무를 할 수 없게 된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훗날의 클라우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고민을 안겨줬다고 한다[6] .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가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그가 가진 선천적 능력을 잘 다듬길 바라며 함께 여행도 다니고 수영, 책읽기 등 취미활동도 즐겼는데, 이런 그의 계속된 노력에도 포스투무스의 행동거지와 잔인성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그 결과, 포스투무스는 황궁 안에서 가장 숨기고 싶어한 비밀이 됐고, 늘 그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경비대가 호위하면서 포스투무스의 난폭한 행동을 제지했다[7] .
이런 단점들로 인해 양자 입적 직후로 예정된 성년식은 19살이 될 때까지 늦춰지게 됐고, 어떤 후계교육도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포스투무스는 낚시 외에는 모든 학문에 관심도 없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만하고 무례한 언행을 내뱉고, 행동은 잔인하고 포악해져 광기 수준으로 통제 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궁 안은 포스투무스의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황족들까지 노력하게 되는데, 수에토니우스 등에 따르면 이 문제는 포스투무스가 군복무를 위해 준비가 될 무렵 더 심해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황궁 안의 관리, 황실 노예, 근위대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다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남성 황족들과 그의 누이들까지 더 이상 포스투무스를 제어하기 힘들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측근들과 포스투무스 문제를 상의한 뒤, 서기 7년 원로원에 포스투무스 처벌 문제를 직접 상정하면서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 그리고 국가 수장으로서 포스투무스를 영구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혈육을 이탈리아와 코르시카 사이의 험준한 바위섬 플라나시아{오늘날의 피아노사 섬(Pianosa Island)으로 유배보냈다. 동시에 그는 포스투무스와 양자관계, 모든 특권을 파양했고, 후계자 티베리우스와의 모든 관계까지 완전히 파기시켰다. 따라서 포스투무스의 모든 유산상속권은 영구 박탈됐는데,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8] 를 대비해 섬에 초소를 짓고 24시간 감시를 지시했다.
2.4. 사망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를 영구추방시킨 뒤, 호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단 한번도 자신의 친혈육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다. 이는 서기 14년까지 계속됐는데,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측근인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수도 로마를 떠나면서 포스투무스가 있는 플라나시아로 은밀히 찾아갔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가 악녀로 주장된 근거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비아는 아들 티베리우스의 경쟁자 복귀를 막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따곤 했던 무화과나무 열매들에 독약을 발라 아우구스투스를 독살하고 포스투무스 석방을 추진한 막시무스까지 제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별로 신빙성도 없다고 오늘날 로빈 레인 폭스 등 로마사 권위자들은 일관되게 부정한다.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프린켑스가 된 서기 14년 8월, 로마에서 파견된 근위대 소속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그런데 이때 이를 지시한 최종결정권자는 티베리우스였다고 해도, 포스투무스 처형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티베리우스의 권력 안정을 위해 내린 결과였고, 그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파견된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를 호위하던 부대였는데, 이때 파견된 백인대장을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은 포스투무스를 죽이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포스투무스가 맨 손임에도 덩치가 상당히 크고 힘도 황소를 때려 잡을 정도로 장사였기 때문이다.
3. 평가 및 여담
포스투무스는 추방되기 전부터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외조부 사망 직후 살해된 까닭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연대기>에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고 이 사건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평가처럼 당시 원로원은 역시 티베리우스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그가 살해된 직후,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걱정대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해 티베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콤모두스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레멘스의 반란은 포스투무스 사후 2년이 지난 뒤 일어났고 클레멘스가 포스투무스를 사칭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 출생 당시 이름[2]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 입적 된 이후 개명한 이름[3] 양자 입적 후 사용된 또 다른 이름[4] 양자 입적 후 사용된 또 다른 이름. 로마식 이름 표기에 의해 사용되기도 함.[5]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를 따라 게르마니아 전쟁이 벌어진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일대로 이동해 야전총사령관 티베리우스 전속부관 겸 사령관이 됐다. 동시에 소 드루수스는 로마에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사무실을 개소하고, 황궁 안의 아우구스투스 집무실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지도 아래 행정을 배우고, 원로원 상임위원에 임명돼 아우구스투스 곁에서 모든 발언권을 보장받고 원로원을 상대하는 정치술을 배웠다고 한다.[6] 물론 두 왕자는 황실의 고민거리였음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포스투무스는 몸은 멀쩡하지만 집안 골칫거리 또는 망나니였던 반면,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불편해 방치되듯 친할머니, 어머니, 누나에게 미움을 받아도 아우구스투스의 여러 편지 내용과 발언처럼 가끔 자신에게 엉뚱한 말을 해도, 정신은 훌륭하고 명석함과 치밀함은 먼치킨 아우구스투스조차 놀랄 정도였다.[7] 반면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황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말을 할때 더듬는 습관도 거의 고쳐 아우구스투스 생전 열린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대형행사에서 참석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서신을 통해 “손자가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을 줬다”고 칭찬을 받았다.[8] 포스투무스를 탈출시켜 반란에 이용하는 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