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1. 소개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자 장군, 정치가. 보통은 '''대(大) 드루수스(Drusus the Elder)''',[3] 라고 하며, '''네로 드루수스, 드루수스 2세''',[4]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고도 불린다.
본래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자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고, 양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어머니의 가계 역시 본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기에 이중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속해 있었다. 친형은 로마 제국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였다. 친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뒤 3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의 결혼식 당시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친부모의 이혼 전 약속에 따라 태어난 이후, 친권을 갖게 된 친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친부가 병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리비아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성장했다.
친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존칭을 얻어 가문의 별칭으로 삼았다. 아내는 안토니우스와 대 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 소 안토니아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만이 유년기 이후에도 생존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세습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갖는 위치가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드루수스의 혈통들이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연이어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3대 황제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였으며,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였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양자인 네로는 그의 양손자이면서 혈연적으로는 외증손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장군 중 최초로 북해를 항해한 인물이었으며, 최초로 라인 강을 건너 로마 주요 요새들을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하면서 베저(Weser) 강[5] 과 엘베 강[6] 까지 최초로 도달한 로마 장군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했으며, 갈리아 일대의 행정 및 방어 시스템을 정비하고 라인 강 방어선을 건설한 장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까닭에 대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라인 강 일대 로마군은 3세기 후반까지도 드루수스 부자를 위해 이들 부자를 기리는 탑을 만들어 매년 탑 주위를 돈 뒤, 두 사람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38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리비아가 그를 임신했을 때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할 것을 요청했기에 부모는 곧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1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전남편 티베리우스 네로가 옥타비아누스와 전 부인의 결혼식에 참석해 ‘리비아의 아버지가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아울러 이때 드루수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는 옥타비아누스-리비아 드루실라 부부로부터 장남 티베리우스(당시 3세)와 곧 태어날 아이의 친권을 약속받았다. 드루수스는 리비아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태어났는데 역사가들은 그의 출생일을 대략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태어난 이후 유년기때 이름을 데키무스에서 친부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된 이름 '네로(Nero)'로 개명했다.
어머니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결혼식을 올린 지 3개월 후, 이들 부부의 로마 시내 저택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태어날 당시, 많은 로마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계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라고 의심했고, 실제로 이를 사실로 믿는 로마인들은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이런 풍자시까지 나돌았다.
이 소문과 풍자시는 루머의 당사자 대 드루수스가 태어났을 당시에도 화제를 모았지만, 당사자인 드루수스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이후 세간의 주목을 더 받았다. 때는 그의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드루수스의 막내아들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사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자이고, 자신이 양친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어했던 목적으로 이를 더 부추겼다고 말한다.[7]이들 부모는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아이가 자궁에 겨우 3개월만 있다가 태어났으니.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이름 중 '''드루수스'''는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는데, 그의 조상 중 처음으로 이 이름을 얻은 ‘첫번째 드루수스”가 BC 283년, 1대1 싸움에서 적군 족장 드라우수스를 죽인 후 얻은 영예로운 이름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드루실라의 남성형 이름이기도 했으며 그의 외할아버지(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8] 의 이름이기도 했다. 또 '드루수스'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의 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도 계속 전해졌다. 또 다른 이름인 '''네로''' 역시 대대로 세습된 이름이었다. 이 유서 깊은 이름은 그의 직계 조상이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며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메타우루스 전투의 승자였던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서 따왔으며, 그 뜻은 ‘용감한 자’였다.
드루수스는 결혼식 전의 약속대로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와 같이 살지 않고,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부 티베리우스 네로의 집에서 자라야 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과 달리 드루수스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집에서 태어난 이후, 어머니 리비아와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걸음마를 할 때까지 직접 키웠다. 그래서 풍자시와 원로원 내 소문이 로마인들에게 사실로 확정됐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 부부는 드루수스를 자신들의 집에서 키웠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더 확산되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드루수스를 친부의 집으로 보냈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젖을 떼고 난 이후 걸음마를 할 때부터 친부의 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이때 친부 밑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드루수스가 불과 6살에 불과했을 때 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가 BC 33년 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9세였던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친권을 가지게 된 어머니가 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집에 들어가 성장했다. 이때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거처를 옮기도록 한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이는 친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한다는 이유와 내전이 갈수록 심해진 탓에 두 사람의 신변까지 위협을 겪고 있던 당시 로마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어릴 때부터 워낙 우애가 좋아 서로를 사랑했다고 하며 실제로 성년이 된 이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그의 친형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첫 아이이자 장남에게 동생의 이름인 드루수스를 붙여줬고, 드루수스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인 티베리우스를 붙여줬다.[9]
2.2. 결혼
드루수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둘째 딸이었던 소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판단에 따른 정략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드루수스는 아내 소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정 생활도 화목했다.[10][11] 또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모두 서로에게 충실하고 아낀다는 세간의 평판을 얻었다.
그는 이 결혼 생활을 통해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는 총 5명의 자녀를 얻었고 이 중 첫째 아들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리비아), 막내이자 둘째 아들인 클라우디우스는 성년 이후에도 생존했다. 훗날 대 드루수스가 요절한 뒤, 그의 아내 소 안토니아는 재혼하지 않았고 50여 년 동안 더 살았다.
2.3. 게르마니아 전쟁과 요절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친아들인 두 의붓아들들을 일찍부터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이들에게 일찍이 많은 경험과 각종 공적을 쌓도록 기회를 줬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형 티베리우스와 함께 일찌감치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로 대중들에게 소개됐는데, 티베리우스는 친척 마르켈루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기념하는 양부의 개선식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전차에 나란히 타는 영예를 얻었다.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에게 최소 나이 기준보다 5년 먼저 모든 공직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줬다. 드루수스의 어머니 리비아는 남편이 두 아들을 친양자로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입적시키길 원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아들들이 수장으로 있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힘을 온전히 얻고자 자신의 가문에 입적시키길 망설였다.
드루수스는 특권을 선사받은지 3년 뒤인 기원전 16년, 친형 티베리우스가 법무관(프라이토르) 자격을 얻고 이탈리아를 잠시 떠났을 때 부재 중인 형을 대신해 법을 제정했다. 이듬해(BC 15) 알프스 산맥 일대의 부족들과 전투를 벌여 공적을 쌓으면서, 양부와 원로원에게 형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다.[12]
드루수스는 이후에도 군대를 이끌고 라이티아족, 게르만족들과 싸우면서 여러 전공을 쌓았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재무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지냈고, 전쟁 수행 기간 동안 로마 장군들 중 '''북해 일대를 항해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때 라인 강과 이셀 호수를 연결해주는 '''드루수스 운하'''를 파기도 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는데, 상당히 과감한 정공법과 기습 작전 등을 활용해 게르만족들을 격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족장들의 자제들을 로마로 보내 친로마파 인사로 육성케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질들로는 세기메루스의 두 아들이었던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13] , 티베리우스 시대 때 마르코만니족을 이끈 친로마파 족장 마로보두스 등이었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공화국[14] 의 영광’을 위해서,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장 고귀한 전리품’[15] 을 얻으려는 야망에 불타올랐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드루수스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용맹하게 적진을 가로질러 게르만 족장들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드루수스의 진격은 “그에게 거대한 야만족 여인의 유령이 나타나 라틴어로 더이상 모험을 할 생각을 말라고 경고를 했을 때” 비로소 멈췄다.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에게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영토로 편입된 갈리아 전역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겼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총독으로서 전쟁 수행 기간 내내 이 일대의 행정 사무 등도 도맡아서 처리했다. 이때 드루수스 가족은 루그두눔에 있는 총독 사저에서 다같이 살았는데, 그의 아내 소 안토니아는 황족 신분임에도 로마에 남지 않고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총독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소 안토니아는 4명의 아이들을 낳은 뒤 과거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자녀들을 손수 키웠다.[16] 갈리아에서 1년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와 그 가족들은 원로원과 아우구스투스에게 전쟁 결과와 갈리아 일대의 보고를 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해야 할 경우에만 이탈리아로 잠시 돌아왔다고 한다.
갈리아에서의 훌륭한 노력과 게르마니아 땅에서의 공적들은 드루수스에게 개선 훈장과 약식 개선식의 영광을 수여받게 해줬다. 따라서 그는 법무관 임기가 끝난 뒤,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곧바로 BC 10년 이듬해 집정관(콘술)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곧 전쟁이 재개된 까닭에 집정관 신분임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게르마니아 땅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가 BC 9년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개선 군단을 이끌고 행군 중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얼마 안 가 여름철 주둔 사령부 숙영지에서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17] 이때 그는 친형 티베리우스 품 안에서 숨을 거뒀으며 그가 사망한 숙영지는 로마인들에게 ‘저주받은 숙영지’라고 불리게 됐다.[18]
2.4. 사후 영예
드루수스가 낙마 사고로 요절하고 난 뒤,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한 형 티베리우스는 말을 타지도 않은 채 동생의 관 옆에서 이탈리아까지 묵묵히 걸었다. 이때 유해가 지나가는 경로에 위치한 수많은 식민지와 자치 도시의 유력자들은 드루수스의 관을 교대로 옮겼다. 그리고 로마군이 드루수스의 장례 절차를 벌이는 날, 갈리아 일대의 도시들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도를 지내고 제물을 바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고 하며, 그를 기리는 기도를 드렸다.
티베리우스로부터 이탈리아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아끼던 양아들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잘 타지 않는 말을 급히 몰고 그 유해 옆으로 가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19] 로마 도착 후 로마 행정관들의 서기들이 그 시신을 받아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장작 더미 위에서 엄숙하게 화장했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했다. 그를 기리는 추도사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읽었다.
장례식 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위한 시를 직접 짓고 손수 그의 일대기를 적은 책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또 그는 원로원에 공식 입안을 통해 법령으로 매년 자신의 양아들 드루수스의 생일과 사망을 기리는 축제를 그가 정복한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 모곤티아쿰(Mogontiacum,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에서 열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 리비아와 함께 수많은 드루수스 흉상과 입상을 만들어 이를 황궁 안의 자신의 집무실과 방에 놓고 죽은 드루수스를 그리워 했다.
드루수스의 친어머니 리비아 역시 아끼던 차남의 사망 이후,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20] 의 조언에 따라 드루수스 조각상을 놓고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원로원 역시 '''게르마니쿠스(게르만 땅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수여하고 그 이름을 그의 후손들이 물려받게끔 했다.[21] 또한 전리품이 장식된 아피아 가도 위의 대리석 아치 등을 그에게 수여하고 수많은 영예를 안겼다.
한편 로마 군대는 죽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나서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기렸다. 그래서 드루수스는 그가 이끈 라인강 일대 로마 군단병들에게 죽어서도 인기가 대단했고 그의 일대기를 담은 책도 많이 읽혀졌다고 한다. 드루수스 사망 후, 로마군과 퇴역병 재향 군인회는 모곤티아쿰에 손수 기념물을 세웠고, 이는 오늘날 독일 마인츠에 여전히 남아있다. 또 로마군 병사들은 최소 3세기 이후까지도 매년 정해진 날에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드루수스를 기리는 기념물을 한 바퀴 도는 의식을 거행했다.
둘째 아들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돌아가신 부모님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를 기리는 행사를 매년 로마 키르쿠스 경기장에서 벌였다. 이 행사를 통해 클라우디우스는 부친 생전의 업적과 인물됨을 찬양하고 추모했다. 또 그는 브리타니아 정복 당시에도 아버지 드루수스를 위한 축제를 열었고,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승리를 쟁취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3.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
드루수스가 사망했을 때 로마에서 일부 공화정 회귀론자들과 호사가들은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를 독을 이용해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런 주장은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세상에 떠돌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대략 ‘드루수스가 종종 “자신이 황제가 되면 예전 정치 체제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공언했다고 주장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아우구스투스도 양아들이 군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고 다시 체제 전복을 시도할 거라 의심해 결국 양아들을 독살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나도는 풍문들을 기록한 수에토니우스조차도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관계를 따져봐도 이런 음모론은 사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적어 놓았다. 또한 당대에도 이런 주장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괴담으로 받아들여졌다.[22]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들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꼈고, 두 사람이 친아버지와 친아들일거라는 풍자시 내용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 시절로 불릴 때, 그는 드루수스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자 친아들로 여겨 키우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드루수스는 걸음마를 할 때까지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가 직접 키웠는데,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풍자시나 원로원 내 소문처럼 드루수스가 진짜 옥타비아누스의 아들로 인식됐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당연히 친아들로 인식됐고, 길거리까지 "불륜해서 낳은 자식"라는 소문이 번졌다[23] . 이런 까닭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전 약속에 따라 친부의 집으로 보냈는데,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는 아내 리비아와 함께 시간을 내 드루수스를 자주 만났고 친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냉철하고 과묵한 성격에 다소 거만해보이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개방적이고 유쾌한 성격을 지닌 드루수스에게 굉장히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딸 율리아, 양아들 티베리우스 등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평소 집무 시간이 끝난 이후 그는 양아들 드루수스와 주사위 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직접 적고 이 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편지들에서 늘 드루수스 형제를 지칭할때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아들” 등의 표현을 사용했으며,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성년이 된 이후에도 둘을 아들이라고 부르고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정다감했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 못지 않게 친누나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를 굉장히 예뻐했다. 그런데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여러 여조카 중 진심으로 아낀 소 안토니아의 남편이었고 부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24] 여기에 더해서 드루수스는 정략혼임에도 아내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소 안토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다른 상류층 부인들과 달리 남편의 험한 임지까지 함께 따라간 뒤 전통적인 로마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낳고 키워서 아우구스투스를 기쁘게 했다.[25] 또 개인적인 능력 역시 탁월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철학을 잘 이해하면서도 원로원과의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두 아들들(외손자들)[26] 못지 않게 양아들 드루수스를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실토했다.[27] 이런 까닭에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낙마 사고 및 죽음이 전해지던 당시,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낼 정도로 격한 반응을 내보이면서 슬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술했듯 양아들의 시신을 이탈리아 국경에서 로마까지 직접 호송해 온 이후, 드루수스의 장례식을 총괄하고 가족대표로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직접 읽었다. 이때 그는 드루수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언급하면서 일찍 죽은 양아들의 생전 업적과 인간됨 등을 찬양한 뒤, 나중에 어른이 될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드루수스 같은 인물로 성장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어린 소망을 말했다. 이어서 자신에게도 양아들 드루수스와 같은 영예로운 죽음을 달라고 신들에게 기원했다. 장례식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그리워해 자신이 양아들을 위해 지은 시를 드루수스 무덤 비문에 새기게 하고 칭송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본인이 직접 산문 형태로 드루수스의 전기를 쓴 뒤 다시 헌정했다. 또 죽은 양아들 드루수스가 완전 군복 차림으로 새겨진 모습을 담은 가족 카메오 등을 남겼다.
[1] 또는 겨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에토니우스는 <12인의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1>에서 여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2] 본명은 클라우디아 리비아 율리아. 황실 가족들에게 '작은 리비아'라는 뜻의 리빌라라고 불렸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당대 사람들에게 상당한 미녀로도 유명했다. 첫 번째 남편은 아우구스투스의 차기 후계자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 두번째 남편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 후에 세야누스와 공모해 남편 소 드루수스를 독살했고, 이후에 그 죄가 드러날 때 자신의 주치의 등과도 불륜을 저질렀던 죄가 밝혀졌다. 유죄가 확정된 뒤, 딸에게 며느리, 장성한 두 손자와 손주 며느리를 잃은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명으로 감금돼 굶어 죽었다.[3] 친조카이자 사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이렇게 부른다. 반대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소(小) 드루수스'''라고 부른다.[4] 친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른다.[5] 독일 북서 지역을 흐르는 강이며 총 길이는 452km이다.[6] 폴란드, 체코의 국경지대에 있는 리젠 산맥을 그 수원으로 하는 강으로 체코 북부, 독일 동부를 흘러 함부르크 부근에서 북해에 이른다.[7] 아예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위해 모계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확실한 '''자신의 조카'''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자신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는 놔두고 소 아그리피나가 재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 즉 자신의 양자와 친딸을 결혼시켜서 후계자로 삼기에 이른다. 이 후계자가 바로 그 유명한 폭군 '''네로'''이다.[8] 그의 본가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었다.[9] 이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들이 로마의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이다.[10] 로마 상류층들의 결혼은 전적으로 양가 어른들의 이해득실과 정략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실제로 로마 상류 사회에서 결혼식 이후 별거 생활을 하면서 서로 정부를 두고 살거나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원수같이 지내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 생활이나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며느리 대 아그리피나의 결혼처럼 화목하고 가정적인 결혼 생활은 가족을 중시 여기는 로마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11]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대 드루수스를 후계자로 좀 더 앞 순위로 놓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드루수스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일 거라는 말들이 나왔고, 성년식 후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와 결혼하면서 아그리파의 사위인 형과 달리 일찍이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반면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빕사니아와 처음 결혼했고, 아그리파와 동생 대 드루수스가 모두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 의해 자신의 ‘법적인 장모’이자 의붓남매인 율리아와 강제로 재혼했다.[12] 당시 드루수스는 승기를 잡았지만 완벽하게 이들을 제압할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형 티베리우스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다. 이후 형제는 힘을 합쳐 승리를 거뒀다.[13] 아르미니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로 유학간 뒤, 로마 시민권을 얻고 기사계급에 편입된 게르만계 로마군 장교이다. 그는 형과 달리 로마군에 계속 남았고, 게르마니쿠스의 휘하 부장으로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14]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로마를 제정 체제로 만든 뒤에도 여전히 로마를 공화국이라고 부르고 본인 스스로를 '''프린켑스'''라고 했다.[15] 로마 장군이 적군 지도자와 일대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뒤 획득한 갑옷.[16]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간 어머니를 따라 루그두눔에서 성장했다.[17] 또는 같은 해 겨울에 낙마 사고가 벌어져서 사망했다고도 한다.[18] ‘저주받은 숙영지’라는 명칭은 수에토니우스가 살고 있던 시절인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가마를 타고 다니기 좋아했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20] 아우구스투스의 개인교사였고, 스토아 철학자이다.[21]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6살, 차남 클라우디우스는 1살에 불과했다.[22] 현대 소설 나, 클라우디우스에서는 형 티베리우스가 드루수스의 공화정 복귀 의지를 누설하자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드루수스를 독살한 것으로 묘사했다.[23] 실제로 드루수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아들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이후까지도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로 믿고 알고 있는 로마인들은 진짜 많았다.[24] 드루수스가 생존했을 당시, 그의 형 티베리우스는 동생과 달리 ‘아우구스투스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와 결혼생활 중이었다.[25]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율리아는 사촌 여동생 소 안토니아와 달리 문란한 사생활과 남성편력 등으로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최악이었다.[26]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결혼에서 얻은 외손자 두 명을 친양자로 공식입적해 후계자로 키웠다. 이들이 바로 그의 양자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이다.[27]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누나의 딸 소 안토니아를 드루수스와 결혼시켜 자신의 조카 사위로 삼았다. 더해서 훗날 자신의 외손자들이 모두 죽고 하나 남은 뒤, 아내 리비아의 아들이자 드루수스의 친형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으로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을 당시에도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는 자신의 혈육을 후계자로 집착했던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 보면, 게르마니쿠스가 누나의 외손자인 데다 무엇보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가 자신의 외손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신의 외손녀를 드루수스의 장남과 결혼시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드루수스를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