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미 고레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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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南惟幾 (あなみ これちか)
1887년 2월 21일 ~ 1945년 8월 15일, 향년 58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본 제국육군 대장. 일본 제국 제54대 육군대신

2. 생애


1887년 일본 오이타현 타케타시에서 태어나 1905년 육군사관학교, 191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군생활을 시작하였다.이후 야전에 종사하다가 1925년 주재무관의 자격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929년 황궁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때 훗날 총리가 되는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의 아래에서 시종무관을 지냈다.
1938년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제11군을 지휘하였고, 패전 직전이었던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출범하자 육군대신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는데, 유럽의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왕국나치 독일이 차례로 연합국에 항복하였고, 일본은 미국소련, 영국 등 막강한 연합국을 상대로 홀로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7월 26일 미국과 영국, 중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내각과 군의 수뇌부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이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역설하였지만, 군을 대변하던 아나미는 무조건 항복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이들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얼마 뒤 미군에 의해 화려했던 두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나미는 원폭의 위력을 보고도 항복을 반대하며, 오히려 조금이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본토결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주장은 허울만 좋은 낭설에 불과하였다. 결국 쇼와 덴노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결정하자, 아나미를 비롯한 강경파 군인들도 이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옥음방송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14일, 그는 쇼와 덴노의 서명이 담긴 종전 조서에 다른 각료들과 함께 서명하였고, 다음날인 8월 15일 새벽 5시경 '나는 천황 폐하께 죽음으로써 사죄한다.'라는 유언을 남긴 뒤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그의 시신은 도쿄 다마 공동묘지(多磨霊園)[1]에 안장되었다.
여담으로, 아나미가 할복할 때 입었던 제복과 유언장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유명한 군인과 각료들이 묻혀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