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음방송
1. 개요
'''옥음방송'''(玉音放送)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 방송된 일본 제국의 종전 선언이다. 천황의 조서(詔書) 낭독 녹음본을 재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쇼와 덴노가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는 것으로, 이 방송을 기점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말을 맞이하고, 한반도는 8.15 광복을 맞이한다. 또한 이후 일본은 미국이 점령하여 태평양 최고사령부(SCAP)와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통치를 받게 된다.
옥음방송의 '옥음'이라는 단어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뜻이다. 한국 사극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옥체(임금의 몸)처럼 똑같이 임금을 높이는 표현인 것이다. 해석하자면 '임금이 친히 목소리를 내어 하시는 방송'이라는 뜻이다.
2. 상세
'옥음방송'이라는 단어 자체는 임금이 국민에게 하는 방송이라는 일반명사지만, 일본에서 천황이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한 전례가 없었던 데다[1] , 이 선언의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옥음방송 하면 대개 이것을 일컫는다.
이전에도 천황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 사례가 전무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어느 스포츠 행사의 NHK 실황중계 중에 히로히토의 육성이 마이크에 잡혀서 송출된 적이 있다. 히로히토가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만, 당시 NHK의 기술진부터 총재까지 모두 궁내청에서 불경죄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후문.
전제군주국 또는 군주의 권위를 크게 내세우는 국가에서는 다양한 관례 때문에 서민이 제왕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평민-신하-신하-신하-시종-군주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천황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으로 취급된 것인데, 이처럼 평상시에 국민에게도 말씀을 아끼던 높으신 분이 '''입을 처음으로 연 것이 하필 항복선언'''이었다는 셈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드러나듯 영국의 조지 6세가 연설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여러 번 한 것과 대조된다.[2]
이후에도 일본 황실의 공식 발언은 직접 송신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각료나 아나운서의 말을 거쳐 전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위 옥음방송에 해당하는 사례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당시로부터 66년이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뒤인 3월 16일 오후 4시 35분에 아키히토가 위로 메세지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다만 앞서 말했듯이 옥음방송이라는 용어 자체가 지극히 일본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기에, 타국에서는 '임금의 목소리'라는 '옥음'이라는 용어 자체에 불쾌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항복선언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옥음방송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반어법이다.
당시의 공문서는 헌법과 법령을 비롯한 대부분이 문어체였고 옥음방송의 원고(原稿)인 '종전의 조서(終戰ノ詔書)' 역시 문어체 공문서였으므로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낡은 표현이 떡칠되어 있는 건 예사였기에, 얼핏 들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거기에 다음 문단에서 나오겠지만, 천황의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이리저리 꼬는 바람에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왔다.
이에 심지어 당대의 일본인들조차도 이 연설이 무슨 내용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당시 증언들이 엇갈린다. 하여튼 나중에 방송국에서 해설방송이 나갔다고 한다. 자세한 건 후술.
3. 종전? 항복?
이 방송 이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무장 해제되었는데도 항복이라는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이 특징.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4개국의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라는 문구에서 이 조서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쇼와 덴노는 이 조서에서 자신의 신민들과 제국 정부를 분리하면서, (제국정부가 아닌) 일반 신민들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을 알린 것이다. 항복 사실 자체는 제국 정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쇼와 덴노의 결정 자체가 정부회의에서 나온 것.) 제국 정부에게 알리는 목적은 아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 내각과 천황, 그리고 메이지 헌법과 일본 국내 상황을 생각해봐야 한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 내에서 본토결전을 운운하는 육군 중심의 강경파와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화평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립 속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사이, 연합군은 폭격과 핵 폭탄 공격을 퍼부었고 소련도 참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사실상 일본의 컨트롤 타워였던 최고전쟁지도회의(긴급 비상 어전회의)에서는 항복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지만,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일본도 조건을 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럼 그 조건을 뭘로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대립하기에 이른다. '''핵심은 '국체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절대적 선결조건으로 함'''을 뜻한다. 이에 사태를 현실적으로 보고자 했던 외무성 측에서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빨리 수락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육군의 수장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그것을 위한 추가 조건[3] 을 더 내세우며 뻗대고 있었다. 외무성은 이후에도 아나미 육군대신이 다시 어깃장을 놓을까봐 상당히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뻗대고 있던 중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마저 핵이 투하되었고, 보다 못한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당일 심야에 곧바로 임시 각의까지 열며 결론을 내고자 했으나 도무지 대립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와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 기도 고이치 궁내부대신이[4] 포츠담 선언(무조건적인 항복 조건) 수락에 찬성했고 아나미 육군대신을 중심으로 우메즈(육군) 참모총장, 토요다 (해군)군령부총장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는 히로히토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그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내 생각은 외무대신 생각이랑 같음'이라고 말했다. 즉,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는 큰 틀 자체는 8월 9일 23시경에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
8월 10일, 스즈키 간타로는 연합군 측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연합군은 8월 12일에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의 내용을 가지고 다시금 육군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천황과 일본 정부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subject to' 한다는 구절이었다. 외무성은 연합군 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고 번역했지만, 육군성은 연합군 사령관에 예속된다고 번역, '그렇게 되면 국체 유지(천황제 보존) 불가능함'을 외치며 최종결재를 하지 않고 뻗댄 것이다.[5]
이에 8월 14일 오전 11시, 합동 긴급 어전회의가 열렸다. 역시나 위의 3명은 옥쇄(=결사항전)를 주장했지만, 쇼와 덴노는 다시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조 히데키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고관이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6] 포츠담 선언에 반대했던 군부 인사들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8월 14일 오후 선언의 초안이 작성되고 녹음 준비를 위해 NHK의 기술진들과 총재가 국민복 차림을 한 채[7] 궁내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초안이 정서되지 않아[8] 밤 9시경 까지 초안이 완성되지 않았고, 기껏 정서를 끝냈더니 또 '전세가 불리하여'란 구절을 '유리하지 않아'[9] 로 바꾸는 등[10] 이런저런 병크로 인해 녹음기술진들과 쇼와 덴노는 7시간 가까이 대기하게 된다. 이윽고 3번에 걸친 녹음 끝에 오후 11시 30분 조서 낭독 녹음이 종료되었고, 이를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15일 정오에 방송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평양 전쟁의 종결에 이른바 천황의 '''결정'''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대공황으로 허우적대던 일본 내에서 군부가 대두하여 전쟁을 일으키더니 그 전비의 지출로 다시 허우적대다가 일으키게 된 것이 태평양 전쟁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은 군부와 그들이 점거한 정부내각에 책임이 있고 쇼와 덴노는 죄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전후에 만들어진 오늘날의 상징 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제 시절의 천황은 상징 천황도 아니었으며, 무가 정권기의 허수아비도 아니었다. 특히 전후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이미 당시의 각료들은 '전범'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메이지 헌법에 따르면 선전포고는 국무대신의 보필 사항에 속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고 그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했다. 즉, 천황의 '군주무책임론'이 성립 가능한 것은 천황의 결정에 국무대신들이 보필하고, 그 책임도 대신들이 지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개전[11] 이 내각이 아니라 보필 책임이 없는 참모총장, 군령부총장, 육해군 차장 등이 참석하는 대본영-정부 연락회의(, 연락간담회)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이라는 데 있다. 결국, 국무 대신의 보필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쇼와 덴노는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 맞다.
천황의 결정이 있음으로써 종전이 가능했다면, 반대로 천황에게는 개전 책임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개전 조서에서는 다른 신민들과 분리되어 서술되지 않았던 '제국정부'가 분리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21세기에 와서는 상징천황제를 과거에 투영하여 히로히토도 재가만 하는 기계라는 인식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내려져서는 안 될 결정이 내려졌으니, 그럼 왜 이제 와서 천황이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온갖 구실을 붙여야만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조서였던 것이다. 때문에 조서에서는 덴노 자신이 바라왔던 것은 만방공영과 같은 좋은 것이지, 전쟁을 벌여 타국을 침략하는 등의 나쁜 행위는 바라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전국이 호전되지 않았고, 세계의 대세 역시 유리하지 않으며[12]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했기 때문에, 결국 '''인류 문명의 보호자인 천황'''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에 응하도록 지시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또한, 중일전쟁에 대한 서술을 생략하여 태평양 전쟁 4년만을 전쟁으로 상정한다.
즉, 이러한 조서 내용은 '국체 보전'(=천황제 유지)을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인 것이다.
4. 방송 과정
4.1. 예고
8월 14일 오후 9시 뉴스, 그리고 15일 7시 21분 뉴스로 2번에 걸쳐 방송을 예고하였다. 15일 오전 중 천황이 직접 조서를 발하여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빠짐없이 잘 들으라는 안내가 그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 전력부족으로 인하여 주간 송전을 중단하던 지방의 임시방송소 14곳 모두에도 15일 오전에는 특별송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4.2. 영상
위의 동영상은 '''1945년 8월 15일 당일 정오, 79년 전 실제로 라디오로 방송된 자료다.''' [13]
2015년 8월 1일, 일본 궁내청에서는 종전 70주년을 맞아 위 방송 녹음 원판 사진과, 이 원본에서 디지털로 녹음한 고음질 음성을 일반에 공개했다. #(일본어) 디지털 녹음본(mp3)
미국 데일리뉴스에서 2015년 8월 1일 공개된 음성에 영어 자막을 달아 방영한 내용. 태평양전쟁 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자료화면으로 사용하였다.
4.3. 구성
멘트 출처는 이곳(자막 없음)
조서 재낭독 부분과 내각고유 부분까지 포함된 영상[14]
1. 정오 시보.
2. 와다 노부카타[15] 아나운서의 멘트
「只今より、重大なる放送があります。」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습니다."
「全國の聽取者の皆樣、御起立願います。」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3. 정보국[16]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全國民に對し、畏くも御自ら大詔を宣らせ給う事に成りました。」
"천황 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친히 전 국민에 대하여 조서를 발표하시게 되었습니다."
「是より謹みて玉音をお送り申します。」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4. 국가 기미가요 반주 연주.[17]
5. 조서 낭독. (녹음본)
6. 기미가요 반주 연주.
7.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멘트.
「謹みて天皇陛下の玉音放送を終わります。」
"삼가 천황 폐하의 옥음방송을 마칩니다."
8.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畏くも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萬世の爲に太平を開かんと思し召され、昨日、政府をして、米英支蘇四國に對して、ポツダム宣言を受諾する旨、通告せしめられました。」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만대를 위하여 태평시대를 열고자 하시어, 어제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네 국가에 대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시었습니다."
「畏くも天皇陛下に於かせられましては、同時に詔書を渙發あらせられ、帝國が四ケ國の共同宣言を受諾するの已む無きに至つた所以を御敎示あらせられ、今日正午、畏き大御心より詔書を御放送あらせられました。」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는 동시에 조서를 발포하시어, 제국이 네 국가의 공동선언을 부득이 수락하게 된 경위를 교시하시어, 금일 정오 어진 마음으로 조서를 방송하시었습니다."
「此の未曾有の御事は、拜察するだに畏き極みであり、一億等そく感泣いたしました。」
"이 미증유의 일은 삼가 살피건대 지극히 어진 결정이시오며, 일억 국민이 모두 감읍(感泣)하였습니다."
「我我臣民は、唯唯、詔書の御旨を必謹誓つて、國體の護持と民族の名譽保持のため、滅私の奉公を誓い奉る次第で御座います。」
"우리 신민은 다만 조서의 뜻을 반드시 삼가 받들어 국체의 유지와 민족의 명예 보전을 위하여, 멸사봉공을 맹세하고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謹んで詔書を奉讀いたします。」
"삼가 조서를 봉독하겠습니다."
9. 조서 재낭독.
10.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謹んで詔書の奉讀を終わります。」
"삼가 조서의 봉독을 마치겠습니다."
11.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내각고유 봉독
12. 이후 종전 관련 뉴스, 총리 담화, 포츠담·카이로 선언 요지, 해당 선언 수락문 요지 등의 방송.
4.4. 조서
정식 명칭은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이다. 줄여서 '''종전조서(終戰詔書)'''라고도 부른다.
이하의 원문은 일본어를 아는 사람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이 글이 일본어 문어체#s-2로 쓰여 있는 데다가, 히라가나 대신 가타카나가 사용되고 한자도 현대의 신자체가 아닌 구자체로 되어 있는 등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 하에 작성되었고[18] , 탁음을 표현할 때 쓰이는 탁점(゛)도 사용되지 않는 등 표기법이 현대 일본어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문장 자체가 논점을 돌려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문어체를 알아도 곧바로 해석하기 어려운 건 덤이다.
4.4.1. 원문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狀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ムト欲シ玆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
朕ハ帝國政府ヲシテ米英支蘇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抑〻帝國臣民ノ康寧ヲ圖リ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皇祖皇宗ノ遺範ニシテ朕ノ拳々措カサル所曩ニ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庻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然ルニ交戰已ニ四歲ヲ閱シ朕カ陸海將兵ノ勇戰朕カ百僚有司ノ勵精朕カ一億衆庻ノ奉公各〻最善ヲ盡セルニ拘ラス戰局必スシモ好轉セス世界ノ大勢亦我ニ利アラス加之敵ハ新ニ殘虐ナル爆彈ヲ使用シテ頻ニ無辜ヲ殺傷シ慘害ノ及フ所眞ニ測ルヘカラサルニ至ル
而モ尙交戰ヲ繼續セムカ終ニ我カ民族ノ滅亡ヲ招來スルノミナラス延テ人類ノ文明ヲモ破却スヘシ斯ノ如クムハ朕何ヲ以テカ億兆ノ赤子ヲ保シ皇祖皇宗ノ神靈ニ謝セムヤ是レ朕カ帝國政府ヲシテ共同宣言ニ應セシムルニ至レル所以ナリ
朕ハ帝國ト共ニ終始東亞ノ解放ニ協力セル諸盟邦ニ對シ遺憾ノ意ヲ表セサルヲ得ス帝國臣民ニシテ戰陣ニ死シ職域ニ殉シ非命ニ斃レタル者及其ノ遺族ニ想ヲ致セハ五內爲ニ裂ク且戰傷ヲ負ヒ災禍ヲ蒙リ家業ヲ失ヒタル者ノ厚生ニ至リテハ朕ノ深ク軫念スル所ナリ
惟フニ今後帝國ノ受クヘキ苦難ハ固ヨリ尋常ニアラス爾臣民ノ衷情モ朕善ク之ヲ知ル然レトモ朕ハ時運ノ趨ク所堪ヘ難キ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以テ萬世ノ爲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19]
朕ハ玆ニ國體ヲ護持シ得テ忠良ナル爾臣民ノ赤誠ニ信倚シ常ニ爾臣民ト共ニ在リ若シ夫レ情ノ激スル所濫ニ事端ヲ滋クシ或ハ同胞排擠互ニ時局ヲ亂リ爲ニ大道ヲ誤リ信義ヲ世界ニ失フカ如キハ朕最モ之ヲ戒ム
宜シク擧國一家子孫相傳ヘ確ク神州ノ不滅ヲ信シ任重クシテ道遠キヲ念ヒ總力ヲ將來ノ建設ニ傾ケ道義ヲ篤クシ志操ヲ鞏クシ誓テ國體ノ精華ヲ發揚シ世界ノ進運ニ後レサラムコトヲ期スヘシ
爾臣民其レ克ク朕カ意ヲ體セヨ
(御名御璽)[20]
4.4.2. 한국어 번역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22]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대저[23]
,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 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24]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 국민)의 봉공(奉公, 국가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25]
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 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 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 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달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어명어새)
쇼와 20년(1945) 8월 14일
5. 반응
5.1. 일본인들
조서의 내용이 표현이 어렵고 우회적이어서 일본인들이 당시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확실치 않은 사항이다. 당장, NHK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나 종전조서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이후, 일본 정부는 다음날인 7월 27일 프로파간다용으로 써먹기 위해 이 내용을 일본 국민들에게 공표했기 때문에 선언 자체의 내용은 상당수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조서를 봉독한 와다 아나운서는 당시를 회고하며 조서 녹음본이 방송되는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증언하는가 하면, 당시 방송을 들으며 우는 이들의 모습이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는 증언도 있다. 혹자는 알아들었어도 울기는커녕 웃을 일이었다며 전쟁 말 일본의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우는 이들의 연출은 실제 당시에 대동되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도 증명되었다. 애당초 직접 천황이 방송을 한다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을 것이고, 더욱이 정보국 시모무라 총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아마도 빼박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을 것이다.[26]
관련 미디어로 애니메이션 이 세상의 한 구석에에서도 옥음방송 관련 에피소드가 나오는데[27] , 미리 라디오를 마루에 모셔 두고 방송 시작 전부터 일가족이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연출 되고 있으며, 옥음방송 종료 후에는 "아~ 끝났다." "그러니까 결국 졌다는 얘기지?" 등 대사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옥음방송과 관련하여 NG가 나서는 안 되었기에, 미리 방송국에는 언질을 주었고 신문사에서도 관련 보도를 이미 인쇄 완료하였다는 증언들도 있다. 가령 조서 본문이 어렵고, 음질마저 안 좋아 못 알아들었어도 뒤이은 뉴스의 내용 때문에 뭘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덴노가 친히 발표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나, 2차례에 걸쳐 옥음이 방송될 예정이니 임시로라도 장비를 마련하여 방송 취약지대도 모두 잘 들을 수 있도록 대비하라는 말이 내려온 것을 보면 어떨까 싶다.
한편, 이게 무슨 소린고 고민하는 일반인들과 달리 육군은 분노에 가득차 있었다. 이미 내각에서 수락 반대의 의견을 밀고가지 못한 채 종전조서에 서명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육군 내 강경파들의 지탄 속에 할복자살하였고, 이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강경파는 이 음반을 방송 전에 탈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미리 백업판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28]
5.2. 점령국 사람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도 당연히 일본 땅이었고 조선인들도 차별이 있었으나[29] 형식상으로는 일본 국민이었기 때문에 NHK 월드 라디오의 전신인 동아방송[30] 에서 단파방송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반도 외에도 당시 일본령이었던 중국 점령지, 대만 등에도 방송하였다.
그러나 단파방송의 특성상 수신이 잘 안되는 지역에서는 음질이 너무 구렸고, 거기에 녹음본 자체의 음질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잘 들렸어도 일본어를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문장이 일본인도 알아듣기 힘든만큼 난해했던 탓에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나중에 그 내용이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 한반도에서는 사실상 조국이 독립된 것이나 다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보통 매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항복방송이 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당시 사람들이 증언했다. 실제로는 그 다음날(16일)에 가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뛰어나와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1945년 8월 15일 자료라고 나오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기뻐하던 사진은 대부분 16일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에 경우 이미 당시에는 민족 말살정책으로 인해 황국신민화 교육이 빠르게 이루어져서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국이 항복하는데 왜 즐거워하냐고 어리둥절하거나 슬퍼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8.15 광복을 참조.
6. 그 밖에
쇼와 덴노는 이 방송을 3번에 걸쳐 녹음하였다. NHK의 엔지니어는 처음에 OK를 냈으나 히로히토 본인이 '너무 톤이 낮은 것 같다.'며 다시 녹음하고자 했고, 2번째는 발음이 씹혀서 NG를 냈다. 3번째 녹음이 방송에 사용되었다. 총 6분 남짓한 분량을 녹음기 2대로 녹음했다. 1면당 3분에서 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던 당시 SP 음반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6분 남짓한 분량을 2장에 걸쳐 녹음했다.[31]
다만 당시 NHK 엔지니어들은 처음 고쿄에 들어갈 때 1대의 녹음기만을 소지했다. 나머지 1대는 추후 예비용으로 보관중이던 녹음기를 1대 더 급히 들고 온 것. 당시 사용된 녹음기는 일본 전기 음향[32] 의 DP-17-K가 사용되었고, 일본 NHK 방송국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 녹음본은 SP 녹음임을 감안해도 음질이 좋지 않다. 우선 당시 일본의 방송 기술이 딸려서 노이즈가 심한 것도 있고,[33] 오픈릴 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잡음이 심한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해야 했던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천황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려고 임의로 출력을 증폭시킨 것이 되레 심한 잡음을 유발했다는 설도 있다.[34] 근거 중 하나로 당시 입궐했던 NHK의 음향기술자들은 DP-17-K를 갖고 간 이유를 '''일본에서 가장 최신식 기계라서''' 라고 증언했다.
녹음된 SP반은 궁성사건에 휘말려[35] 제작 당시부터 2개 세트로 제작되었다. 이에 처음 녹음한 것을 부(副), 나중에 녹음한 것을 정(正)으로 정하고 각자 따로 보관하였다. 이때 부본은 화려한 오동나무 상자에 덴노가의 문장이 자수놓아진 보랏빛 천에 감싸는 등 아주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정본은 네모진 가방(생긴 것이 딱 방독면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궁내청 시종 숙소에 처박아 놓았다. 중간에 쿠데타군에게 탈취당할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시종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들어맞은 셈.
15일 새벽, 마침내 다나카 동부군 사령관에 의해 쿠데타가 제압된 후에야 정본과 부본 모두 NHK로 이송되었으며, 정오가 막 지난 후 NHK 제8스튜디오에서 정본이 송출되어 일본 전국과 점령지에 방송되었다.
또한 전후로 SP의 소재가 불분명해졌는데, 방송을 치욕스럽게 생각한 황실에서 디스크를 은닉해서라는 설이 있다. 한 동안 공식 녹음반이 분실 혹은 파기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방송 1년 뒤 미군이 당시 옥음방송 녹음을 담당한 엔지니어를 불러와 복제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복제반 제작시 재생 속도와 원판 녹음 속도의 미세한 오차로 인해 현재 일반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음원은 피치가 조금 낮다고 한다.
한편 뒤늦게 발견된 원본 음반 또한 NHK 방송 박물관에서 질소가스를 충전해 보관 중인데, 이 아세테이트제 디스크가 품질이 조악해 열화되어버리는 바람에 복구는 되었지만 실제 재생은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물론 복각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와서는 잡음을 상당 부분 제거해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1년 5월에 일본의 복각 전문 레이블인 알투스에서 발매된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의 CD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리기도 했다. [36]
방송에 대한 비화가 궁금한 위키러에게는 KBS의 <8.15특집 전쟁과 일본 제3부 히로히토와 종전조서>라는 다큐를 추천한다.[37] KBS 파노라마 이외에는 문예춘추에서 발간한 <일본의 가장 긴 하루>가 9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정발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찾기 어려운데, 일본 작품이기에 일본인의 시점에서 쓰여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다만 레퍼런스 자체는 상당히 자세한 편. 영화로는 일본 패망 하루전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개봉되었다.
종전조서는 총 815자이다. 전후 요나이 미쓰마사 전 해군대신은 매일 정좌해서 이 815자 정서하기를 죽을 때까지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을 부하나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가보로 간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