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간타로

 



'''스즈키 간타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일본 제국 제42대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 Suzuki Kantarō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68년 1월 18일
이즈미국 오토리군 후시오신덴
(現 오사카부 사카이시 나카구)
'''사망'''
1948년 4월 17일 (80세)
치바현 히가시가즈시카군
'''재임기간'''
제42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4월 7일 ~ 1945년 8월 17일
'''서명'''
[image]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스즈키 도요 (전처)
스즈키 타카 (후처)
'''자녀'''
스즈키 이치 (장남)
후지에 사카에 (장녀)
아다치 미츠코 (차녀)
'''학력'''
해군대학교 (갑종1기)
'''정당'''

'''약력'''
제17대 해군성 군무국장
제14대 제2함대 사령장관
제6대 제3함대 사령장관
제15대 쿠레 진수부 사령장관
제4대 해군차관
제15대 제1함대 사령장관
제15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제12대 해군군령부총장
제14대 추밀원 부의장
제20·22대 추밀원 의장
제3대 대동아대신
제70대 외무대신
제42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해군병학교 (14기)
'''복무'''
일본제국 해군
1888년 ~ 1929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정치인 시절
2.3. 총리 시절
3. 주요 경력
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본군인, 정치인, 42대 내각총리대신. 태평양 전쟁을 이끈 마지막 일본 내각총리대신이다. 그의 내각에 붙은 별칭이 '종전내각(終戰內閣)'이었다. 그가 총리대신으로 지명된 목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패전처리 투수이자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지내온 사람.

2. 생애



2.1. 초기


기나이 지방 이즈미노쿠니(和泉国, 현재 오사카 부 남서쪽) 출생. 아버지는 막부파 일원으로, 아버지의 출신성분 때문에 해군 진급에 차별을 많이 받았다. 해군병학교와 해군대학을 나와 정식 장교가 되었음에도 차별대우 때문에 한때는 불만을 품고 장교를 그만 두려고 했을 정도였으나, 그때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image]
사령장관 시절
스즈키 칸타로는 어린시절 마에바시 시로 이사한 후 1884년에 해군병학교(14기)에 입학한 후 러일전쟁이 터지자 전쟁에 참가했다. 1898년 해군대학을 1기로 졸업한 그는 러일전쟁 당시 구축대를 이끌고 전함 3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에 독일주재 무관으로 부임한다. 1914년 일본제국 해군이 전함 콘고(金剛)의 빅커스 사 발주시 지멘스 사가 일본해군 장성들과 정부고위층에 뿌린 고액의 뇌물스캔들 일명 지멘스 사건으로 시끄러웠는데, 해군성 차관으로 취임한 칸타로가 이 사건을 잘 처리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23년에 해군대장이 되어 1924년에는 연합함대의 사령장관, 1925년 해군 군령부 총장이 되었다. 이때 이미 57세로 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2.2. 정치인 시절


5년 후인 1929년쇼와 덴노의 부탁을 받고 궁내성의 시종장이 된다. 사실 시종장은 덴노를 섬긴다는 것 외에는 별 일이 없는 한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덴노를 섬기는 명예직을 거절했다'는 세간의 눈총을 받기 싫어서 결국 승낙하고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의 나이 61세였으니, 이것이 사실상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로 15년 가까이 시종장을 맡으면서 쇼와 덴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 때문에 청년 장교단의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되었고, 이후 임금의 측근에서농단을 일삼는 간신으로 지목되어[1] 2.26 사건 때 피습당하는 원인이 된다.
2.26 사건 당시 새벽 5시경에 안도 테루조 육군대위가 지휘하는 반란군 일대가 습격했다. 다수가 동시에 시종장을 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안도 대위는 부하들을 내려보낸 뒤 "각하, 쇼와 유신을 위해 목숨을 거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이때 스즈키 칸타로는 안도 대위와, 뒤이어 나가타 상사가 쏜 총에 왼쪽다리, 왼쪽가슴, 왼쪽 머리부분을 맞고 쓰러졌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시종장을 향해 도고메 상사가 최후의 일격을 종용하자, 피가 흥건한 다다미 위에 쓰러진 스즈키에게 안도 대위는 군도를 빼려 하였다. 이때 스즈키의 아내였던 다카가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만류하였고, 익히 스즈키의 인품을 알고 있던 안도 대위는 망설임 끝에 반란군들을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스즈키 칸타로는 '''총탄을 3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스즈키 간타로를 총애하던 쇼와 덴노는 '''"짐의 수족인 노신"'''을 쓰러뜨렸다며 격노, 2.26 사건의 적극진압을 명령하였다.
당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는데, 3발 다 중요한 신체기관과 아주 약간씩 빗겨서 맞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하늘이 돌봤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스즈키 본인도 대담하게 반란군 장교들을 맞이했고, 가족들도 반란군의 총격에 강하게 저항한 덕분에 부상에서 빨리 회복해 시종장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스즈키 칸타로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충격이 컸던 것인지 이후 시종장직을 사임했다.
1944년에는 추밀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4년의 일본은 사실상 망했어요 상태로 흘러갔고, 도조 히데키 이후 취임한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도조 뒤를 이어 삽질을 계속하자(...) 원로 중신들이 탄핵해 고이소를 물러나게 했고, 후임 총리를 정하기 위해 모였다. 당시 와카쓰키 레이지로고노에 후미마로, 오카다 게이스케 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했고, 도조 히데키고이소 구니아키, 히로타 고키는 육군 대장 하타 슌로쿠(1879-1962)를 추천했다. 도조 히데키는 '''"육군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이기 때문에, 육군 이외의 사람이 총리가 되면 육군이 외면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사실상 중신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보아도 하타 슌로쿠 지명은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쇼와 덴노는 스즈키 간타로를 지명했다.

2.3. 총리 시절


[image]
42대 총리 취임 후
우여곡절 끝에 스즈키가 총리가 되었지만 스즈키 본인도 자신의 총리 취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육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넉 달동안 꾸준하게 종전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었는데, 가장 큰 외교적 삽질고노에 후미마로의 의견을 좇아 소련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었다. 고노에는 '''소련과 협상해서 소련이 미-일 사이를 중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펴고 있었고 집권 후 예상 외로 전황이 너무 악화된 것을 알게 되자[2] 당황한 스즈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련에 희망을 걸어보게 된다(...).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8월 초 일-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남하하면서 스즈키의 막연한 기대를 잘라버렸다.
취임 당시 스즈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3]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고, 종전한다면 원자폭탄을 맞기 전에 얼마든지 끝낼 방법도 있었지만 군부와 내각의 국무대신들 간 언쟁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과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서로 격하게 대립했다. 도고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하자는 입장이었고 아나미는 1억 옥쇄론(...)을 주장하며 다같이 죽자는 입장이었는데, 이 둘을 중재해야 할 총리 스즈키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면서[4] 두 사람 간에 격론이 오고 갔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저네들이 신으로 모신다는 덴노 앞에서조차 욕을 하며 서로 죽여버린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쇼와 덴노가 빡쳤을 정도였다. 결국 화가 치밀어오른 도고 외무대신이 7월 말에[5] 선수를 쳤는데, '소수의 민감한 항목을 제외하고'[6]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멋대로 발표해버렸다.'''
포츠담 선언의 기자회견 시 스즈키 간타로는 1945년 7월 28일에 '''"카이로 선언 직후 생각에 정부는 중대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아 이를 묵살하며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라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사히 신문이 "정부가 묵살"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묵살'''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는 '무시'와 '유보' 2가지의 뜻이 있는 지라, 원래는 단순히 시간을 달라는 의미. 즉 '유보'로 이 말을 썼는 데, 이 '''묵살'''이 일본의 국가대표 통신사였던 동맹통신사에 의해 '''ignore it entirely=전면적인 무시'''라고 오역되었고 로이터 통신와 AP통신도 '''reject=거부'''라고 오역되어 보도되었다'''라는 카더라성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간에는 흔히 오역 때문에 연합국이 발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발표를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속설이다.''' 당장에 저기서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는 부분도 왜곡파가 억지로 중의적으로 의역한 거지, 원문은 아예 '''전쟁을 계속하겠다.'''였다. 이런 전후 문맥을 놓고 볼 때, 저 묵살을 그저 단순히 유보를 뜻하는 걸로 볼 수 있을리가.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러는 사이 소련선전 포고를 날리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듣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보다 못해 쇼와 덴노가 나서서 '항복해라'는 수준까지 가게 만들었고, 덴노의 재가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스즈키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에 일본 육군 소장파들이 길길이 날뛰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쳐댔는데 스즈키는 묵묵하게 항복은 덴노의 결정이라고 밀고 나가서 군부 내부의 항전파 세력을 어느 정도 줄이는데 기여했다.
스즈키 총리 시기의 마지막은 항복 선언 시 일어난 육군 강경파의 반란(궁성사건)이었다. 8월 14일 총리가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자 빡친 육군 강경파가 새벽 사단장을 살해하면서 멋대로 도쿄를 봉쇄하고 스즈키 총리를 매국노랍시고 암살하기 위해 총리 관저 및 스즈키 사저까지도 습격[7]했으나 스즈키 총리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이에 강경파들은 총리 암살은 포기하는 대신 덴노의 항복 선언을 방송하게 될 라디오 방송사를 접수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당시 NHK 아나운서 등의 활약 때문에 옥음방송 탈취에 실패하고 이후 출동한 '''일본군 해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틀 뒤 스즈키는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제35대 총리를 지냈던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1945년 전범으로 연합군에 체포됨에 따라 동년 12월 그의 후임으로 다시 한 번 추밀원 의장을 맡았으나 이후 공직추방령 대상으로 지정되어 이듬해 6월 의장직을 사임한다. 이후 그는 고향인 노다시에 돌아가게 된다.
1948년 고향 노다시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향년 81세.
이 시대 인물 그것도 일본 정부 관련자들 가운데에서 보기 드물게 살해나 사형당하지 않고 자연사했다. 그리고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치군인들에게 여러 차례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스즈키의 유품 중 대부분은 고향 노다시의 스즈키 간타로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3. 주요 경력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image]
41대

42대

43대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1945년 4월 7일 ~ 8월 17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4. 매체에서


2015년 일본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온건파와 강경파를 조율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고령에서 나오는 무력함과 노회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기가 일품. 민감한 사안에서 귀가 안 들려 잘 듣지 못하는 시늉을 자주 한다.

[1]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거두로 여겨진 것이 결정적이었다.[2] 총리가 되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던 이유는 육군이고 해군이고 반대파가 자기들을 공격할 까봐 각자의 불리한 전황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3] '''취임 당시 77세로, 모든 내각총리 중 가장 최고령이다.'''[4] 스즈키는 항복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항복 의사를 발표했다가는 군부 우익한테 공개처형당할까봐 입 다물고 있었다.[5] 구레에 있던 마지막 잔존 함대까지 몽땅 잃어버린 때이다.[6] 덴노만 유지시켜준다면 식민지 포기고 뭐고 다 받아들이겠다는 '''애매모호한''' 의미였다.[7] 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스즈키 사저는 스즈키 총리가 없다는 걸 알고 열 받은 장교들이 방화해 전소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