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록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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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리프트
1. 개요
2. 역사
3. 상세
4. 둘러보기


1. 개요


아시아자동차에서 코란도를 견제하기 위해 1990년 3월 출시한 소형 지프. 별명은 R1.[1]

2. 역사


그 시초는 군용 ¼톤 트럭 차량인 K-111로부터 시작한다. 1983년 10월 18일에 K-111을 기반으로 만든 수출 전략 차종인 랜드마스터 라는 컨셉트카를 개발하여 83 한국기계 지상전(紙上展)에서 대중에게 공개하였으며, 1984년 무역박람회에서 다시 랜드마스터 컨셉트카를 공개했다. 이 랜드마스터 컨셉트카는 사실상 국내 자동차 업계 최초로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개발된 컨셉트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정작 해당 차량을 기획한 회사는 기아산업이었는데, 당시 아시아자동차가 디자인 개발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모기업인 기아산업에 개발을 의뢰하게 되었다. 훗날 나올 기아 트레이드, 기아 라이노도 비슷한 케이스에 속한다.[2]
당시 컨셉트카는 군용차인 K-111에 쓰인 VA 엔진을 그대로 얹고 출시하기로 계획했으나 당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실질적인 출시를 하지 못하여 출시가 지연되었다.# 1988년에는 보다 양산형에 가까워진 시제차[3]를 가지고 시판에 앞서 개발 참고 및 홍보를 목적으로 2대가 다카르 랠리에 참여했다. 결국 2대 모두 중도 탈락했지만, 한 대는 탈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은 코스를 달려서 비공식으로나마 완주했다.[4] 이 랜드마스터의 출시를 1989년 7월로 확정지었으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출시가 또 미뤄진다. 1989년 9월에는 랜드마스터라는 이름 대신 '록스타'라는 새 이름으로 1989년 10월에 출시하기로 했으나, 10월이 되니 또 출시가 지연되고 만다. 결국 1989년을 넘기고 이듬해인 1990년 2월에야 6년 4개월 만에 겨우 출시되었다.

3. 상세


군용은 VA 가솔린 엔진이지만, 록스타는 베스타에서 쓰는 마쯔다 2.2 R2 마그마 디젤 엔진[5]을 같이 쓴다. 이 엔진은 고속주행 때 헤드가 깨지거나 녹아 버리는(!) 치명적인 설계 결함으로, 2018년 현재 도로에서 록스타를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레어 차량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6] 뒷좌석이 없는 밴 모델도 있었다.
정통 오프로드카를 표방하는 소형 짚으로, 오프로드 성능은 코란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기아자동차 측에서는 소형 SUV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래도 원래 군용인 만큼, 이후 등장한 도시형 SUV와 차이는 넘사벽이다. 기어는 전진 5단 후진 1이지만 저속-고속 모드가 있고, 수동전환이지만 4x4와 4x2를 선택할 수 있어서 전체 기어 조합은 24단이 된다. 게다가 프레임 바디 차량이라 뒤틀리지도 않는다. 별 개조 없이 지옥의 코스인 다카르 랠리를 완주한 것만 봐도... 하드탑과 소프트탑(혹은 오픈탑) 모델이 있다. 출시 당시 가격은 800~1,000만원대로 당시 쌍용 코란도(구)와 비교해서 가격 경쟁력이 있었 다.[7] 기본 휠은 철제인데, 의외로 알루미늄 휠도 나왔다.
발매 직전부터 발매 초기 까지는 저렴한 가격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이내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태생이 군용차량이다 보니 인체 공학과 사용자 편의성을 무시한 설계에, 엔진과 전기 장치부분에는 잔고장이 많았고, 디자인 또한 매끄럽지 못했다.[8] 특히 앞뒤 모두 판스프링으로 된 서스펜션은 극악의 승차감을 보였기 때문에 군에서 1/4톤을 운전했던 사람이 아니면 적응할 수가 없었다.[9] 히터는 세게 틀어도 겨우 춥지 않을 정도, 에어컨도 땀 나지 않을 정도만 나오는 등 공조 성능도 미약했다. 지름이 큰 광폭 타이어가 들어가는데, 파워 스티어링이 없는 무파워 차들은 스티어링 조작이 너무나 힘들었다.[10] 여성은 물론, 웬만한 남자도 스티어링 휠을 힘껏 돌려려도 바퀴가 잘 안 돌아가 주차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거의 똑같은 차량이라도 군용은 진흙이 잘 빠지는 접지면이 매끄럽고 러그 패턴에 폭이 좁은 타이어가 장착되어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11], 별 고려도 없이 민간용에는 마찰 저항이 큰 일반 SUV용 광폭 타이어를 그대로 단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미국 지프가 바탕인 각코란도보다 못한 상품 구성, 내구성 탓에 더 밀렸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인데, 법적으로 4인승이다. 벤치 시트인 뒷자리 가운데 안전 벨트가 없다. 그나마 뒤 두 사람 자리도 3점식이 아닌 2점식 안전 벨트였고, 거의 직각 시트라 오래 앉아 가기도 정말 힘들었다. 원래 군용일 땐 뒤에 사람이 타는 자리가 없고 소구경 기관총을 달거나 연료통이나 탄약을 놓는 곳인데, 민간용으로 개조할 때 그냥 사각인 공간에 딱 맞게 직각 시트를 우겨넣어서 그렇다. 한 마디로 인체공학과 편의성은 개무시한 설계.
보닛 잠금 장치가 외부에 있는 것 말고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누가 열고 엔진 부품을 빼 가도 그만이다. 다만 인기가 워낙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차인데다가, 부품 호환 차량이 없는 차이다 보니 엔진룸 부품을 도둑맞았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다.
원래 군용이다 보니 일반 승용차의 상식에서 벗어난 특징들도 있었다. 도어에 문을 열린 상태로 유지해 주는 스프링 장치가 없고 질긴 벨트로 이어 놓은 것 뿐이어서 비탈진 데서 열어 놓으면 저절로 닫히거나 열린다. 벨트를 제거하면 문이 180도 열려서 차체에 반대로 딱 붙을수 있으며, 차창도 손으로 돌려서 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차체와 전선 연결이 없어서 나사 몇 개만 풀면 문짝을 떼어내기도 쉬웠다. 오픈탑 사용자 중에는 군용처럼 패기있게 양 문짝을 떼고, 뒤는 보아야 하니 리어 뷰 미러를 펜더에 옮겨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운전석과 보조석 매트를 들추면 좌석 바로 아래 철판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활용한 사물함 뚜껑이 있다. 록스타는 승용차처럼 실내 바닥이 평면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 빈 공간이 있는 것인데, 한 쪽에 운동화 서너 켤레 들어갈 만큼 큰 공간인데도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어서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장점도 있었다. 디젤 엔진이 중저속 영역에서 그렇듯이 연비가 2,270cc라는 배기량에 비해 좋았다. 군용 차량이었던 덕에 연료 탱크 용량이 무려 60리터로, 실제 연비가 리터당 13-15km였으므로 4x2 모드로 시속 90km 이하로 타면 항속거리가 적어도 700여 km에 이른다. 당시 경유 가격은 리터당 2~3백원 했던때라 유류비 걱정이 전혀 없었다.[12] 그리고 차고가 높고 차폭이 좁아서 못 가는 길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경운기 지나가는 길이면 간다고 할 정도. 원래 목적이 길 좁고 험한 데서 타는 거니 당연하다. 차가 워낙 작다 보니 주차가 편했고, 당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는 센서가 경차로 인식해서 본의 아니게 요금을 덜 내는 일도 있었다.[13] 사각형 프레임 바디 특성 상 매우 튼튼했다. 또한 앞뒤 범퍼도 철판을 디귿자로 구부린 단순한 거라 가격이 교체 비용 포함해 십만 원도 안 했다. 거기다 철판 범퍼가 두텁다 보니 정차한 록스타를 추돌한 다른 차는 그릴부터 라디에이터, 보닛까지 개발살났는데 받힌 록스타 쪽은 겨우 범퍼에 페인트만 묻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튼튼했다.[14]
FRP와 철판인 하드톱 지붕은 성인 남자 여럿이 올라가서 고스톱을 쳐도 될 만큼 튼튼하였다. 시트는 풀 플랫이 된다.[15] 뒷자리는 더블 폴딩으로 완전히 앞으로 접을 수 있었다. 그러면 적재 공간이 확 늘어나므로, 트렁크가 따로 없는 록스타에서 짐이 많은 경우 뒷자리 벤치 시트를 접거나 아예 떼서 다니고는 하였다. 크기에 비해 차체가 무겁고, 토크 좋은 디젤 엔진에 로우 기어를 쓰면 견인력 또한 좋아서 앞 범퍼에 달린 견인고리[16]를 이용하면 웬만한 중대형 승용차까지 쉬이 끌어낼 수 있었다. 배터리 용량이 크고, 범퍼 주변이 철판이라 윈치 설치가 간편했기 때문에 전동 윈치를 달고 다니는 운전자도 꽤 있었다.
전면, 운전석과 조수석 유리창이 모두 평면이고, 전면 유리는 두 쪽인데 옆창은 직각이고 앞 창도 거의 수직이라 눈이 와도 창에 쌓이지 않는다.
전면 사진을 보면 아래 모서리에 경첩이 있는데, 이는 군용에서 뒷자리에 기관총이나 토우같은 대전차 미사일 발사대를 달 때에 윈도우를 앞으로 넘겨 접어 보닛에 붙일수 있게 하는 구조다. 하드탑 모델은 윈도우 위와 좌우 모서리의 고무 몰딩으로 FRP제 탑과 붙어 있어서 한 번 윈도우를 넘기면 고무 몰딩을 새로 하지 않는 이상 원상 복구가 되지 않는다. 새로 몰딩을 안 하면 그 사이로 빗물이 들어온다. 모양을 위해 누수 따위 포기하고 군용처럼 하드탑도 떼고 윈도우는 접을 수 있게 해서 쓰는 사람도 있긴 했다.
등화관제 스위치가 달려 있는데. 이를 켜면 차량의 실내 외 모든 등화가 꺼지고 앞뒤 관제등만 들어온다. 이는 전시에 트럭과 SUV차를 징발하던 전시 차량 동원에 관한 법이 1990년대까지 있었으므로 설치한 것이다. R2에는 전면 등화관제등은 앞 범퍼에 매립되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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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군용의 생김새에서 탈피한 페이스리프트 버전은 록스타 R2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는데[17][18], 후드가 플랫 데크 형태로 바뀌어서 아이러니하게도 1983년 10월에 공개된 랜드마스터 컨셉트 카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1998년에 단종됐으며, 후속으로 레토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도중에 1997년 12월에 타우너, 토픽과 함께 기아자동차판매로 판매권이 넘어가면서 결국 레토나기아자동차의 브랜드로 판매되었다. R2와 R의 차이는 헤드램프, 앞뒤 범퍼, 후드(보닛)이 일반 SUV형으로 바뀌고 아래 반쪽만 열리던 직사각형 뒷문을 유리창까지 붙여 크게 열리게 한 정도로, 엔진이나 내장은 바뀐 게 없어 동력 성능 등은 그대로였다. 문짝은 신구형이 똑같아 호환이 된다.
여담으로 봉고 J2의 스티어링 휠이 록스타[19]의 스티어링 휠과 같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당시 기아그룹은 이 차를 북미 수출의 주력 첨병으로 쓸 계획이었지만, 하필이면 때가 때인지라[20] 출시 자체가 밀리는 등의 영향으로 인해 결국 이 계획은 무산, 기아자동차의 북미 진출은 프라이드를 통한 우회 진출이 되었다.

4. 둘러보기




[1] 페이스리프트 버전 R2의 영향 때문으로 추측된다.[2] 광주 소재 아시아자동차에도 별도의 디자인실이 있었으나, 광주 공장 생산 전담 모델인 버스와 트럭 등 상용차의 디자인, 그래픽 작업과 일부 내외장 변경 등에만 참여하고 신차 개발이나 풀 체인지를 진행할 여력은 없었다. 1995년에야 '네오마티나'를 시초로 처음 신차개발을 시도했지만, 1997년 기아그룹 부도 후 광주 소재 디자인실은 없어지고 소하리 기아자동차 디자인실과 인원이 통합되었다. 그것도 나중에는 없어지고 화성시에 있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로 기아디자인실 별도 건물을 지어 들어갔다.[3] 이때까지만 해도 랜드마스터 라는 가칭을 썼다.[4] 거의 개조 없는 차량으로 완주한 것만도 대단한 것이다. 이후에도 외국의 개인 소유자가 참가해 완주했다고.[5] R2 엔진은 로나 엔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콩코드 디젤에 들어간 2.0 RF 디젤 엔진과 같은 설계에서 배기량을 높인 엔진.[6] 베스타도 그와 같은 이유로 그레이스 등 타 차종에 비해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 병크는 이후에 등장한 1세대 스포티지와 레토나에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1세대 스포티지 (특히 초기형)도 동시대에 시판된 갤로퍼나 무쏘에 비하면 거리에서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7] 기본적으로 군용 지프의 파생형이라서 크기를 빼고는 코란도와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8] 군용 차량은 수송병이 정비 스케줄에 맞춰서 소모품 및 오일류 교환 등의 주요 정비를 한다는 점을 전제로 만들어진 차량이다.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 소모품 교환을 태만히 하는 등 정비주기와 무관하게 막 타고 다닐 경우 잔고장이 잦을 수 있다.[9] 이 역시도 군용차량이나 상용차에서 주로 보이는 설계적 특징이다. 민간용 차량 분야에선 더 나은 승차감을 위해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다.[10] 같은 시대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상위 등급에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긴 했으나(카탈로그에 기재됨) 당연히 차값 때문에 선택 비중은 낮았다.[11] 원형이 되는 K-111의 조상은 2차대전 때 쓰인 윌리스 MB다. 근데 2차대전 때 까지만 해도 타이어를 광폭으로 만드는게 어려워서 대부분 타이어 폭이 얇았다. 그리고 그런 특징이 후계 군용차량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12] 다만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면 각진 차체 탓에 공기 저항이 급증하여 연비가 리터당 10km로 뚝 떨어졌다. 그렇게 다니면 승차감은 엉망에 소음도 심각했으며, 무엇보다 고질적인 단점인 엔진의 헤드가 나간다.[13] 전장이 3,515mm, 전폭이 1,688mm, 전고가 1,820mm인데, 당시 센서의 오차 범위를 고려하면 경차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었다.[14] 차량도 저렇게 되는데 보행자는... 요즘은 차를 튼튼히 만들되 부딪히는 대상(특히 보행자)의 피해 역시 줄이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트렌드라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면 비판만 잔뜩 받는다. 애초에 현대 갤로퍼 시대까지만 해도 가능하던 철제 범퍼나 철제 보조범퍼(또는 범퍼가드) 등을 불법화 한 것도 사고 발생시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내린 조치다. 돌아다니는 민간용 차량과의 사고사진으로 유명해진 군용 차량들 특유의 튼튼함은 딱히 뭔가 대단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연비도 법규도 따지지 않고 차체를 무식하게 철로 두른 덕에 가능한 것이다.[15] 다만 실내 길이가 짧아 발 뻗고 누울 수는 없다.[16] 군용 기준에 맞춘 거라 20톤까지 견디는 물건이다. 뒷범퍼 아래 감춰져 있는 견인 고리로도 승용차는 문제 없이 끌어낼 수 있었다.[17] 당시 신문 지면 광고에 R2의 뜻이 "R2란 비지니스와 레저를 즐기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혁신적(Revolution) 변화로 탄생한 신뢰(Reliability) 할 수 있는 차를 의미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18] 이 차에 들어간 엔진은 R2라는 엔진으로, 현재의 R2엔진과는 '''이름만 같다.'''[19] R2가 아니다.[20] 그도 그럴것이 랜드마스터 컨셉트카가 공개된 시기는 바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존속 중이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