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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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기아그룹 계열 상용차/대형차량/특수차량 생산업체이다. 1980년대까지 언론이나 대중들 사이에서는 '아세아자동차'라고 부르기도 했다.
2. 역사
1962년 5월 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재건 방안의 일환으로 국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한다는 취지로 제정, 공포한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에 기인해 1964년 12월 21일에 이탈리아 피아트, 프랑스 생카(SIMCA) 그리고 SIAVE 은행과 차관 협정을 체결하고 1965년 7월 2일에 호남 연고 기업인인 이문환(李文煥)[3] 에 의해 설립 자본금 8억 2천 8백만원으로 설립되었다. 1969년에 광주공장을 준공한 뒤 동국제강에 매각됐다가, 1975년에 정부로부터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후 이듬해 기아산업에 인수되었으며, 동년 9월 특수차량 단독 생산업체로 지정돼 군용 지프나 KM900 경장갑차 등을 만들었다.
첫 모델인 세단 피아트 124를 선보인 것은 현대자동차가 포드 20M 모델을 선보인 것보다 1년 뒤인 1970년 3월이지만 설립 연도로 보면 아시아자동차가 설립된 것은 1965년 7월이므로 국내 자동차 공업을 이끈 선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첫 모델인 피아트 124는 그 내구성이나 경제성, 그리고 당시 중상류층이 선호하던 보수적인 외형으로 단번에 신진의 코로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와 더불어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의 강력한 3각 경쟁 구도를 이루었지만 피아트와의 계약 문제로 인하여 불과 3년 만에 단종되었다. 그 대신 기아산업에 인수된 이후 피아트의 상위 모델인 피아트 132를 들여와서 1981년까지 생산했다. 1971년에 일본 미쓰비시 후소와 기술제휴로 B905N 버스를 생산했고, 이후 피아트 제휴로 P9 AMC 일반버스를 만든 후 이듬해에는 P9 AMC 8톤 트럭까지 만들어 대형자동차 메이커로 만들 기반을 마련했다.
2.1. 이란-이라크 전쟁 특수
이란-이라크 전쟁 국면을 타고 아세아자동차는 사세를 키우게 된다. 1981년경부터 효성물산이 이란으로부터 수주를 받았는데, 효성 측에서 가격은 걱정 말라며, 1,000만원 하는 1/4톤 군용 지프를 수출용으로 개조한 물건을 1,200만원씩 받고 넘기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란으로 수출된 아세아 군용 지프는 현지에서 '''꼬레아 NO.1'''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사는 1982년 수출 1천만불탑, 1983년 2천만불탑을 각각 받았다.
현지에 차량을 수출한 브랜드 중에는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 메이커도 있었는데, 유독 아세아 차량이 인기를 끈 요인은 다음의 2가지였다고 한다.
- 구조의 단순함 - 당시 대부분의 국산 차량은 본네트를 열어보면 엔진부와 에어컨 부분 외엔, 눈에 띄는 부품없이 텅 비어있을만큼 구조가 단순해[4] 정비와 운용이 용이했다. 엔진오일 등 주입하는 부분도 한국인 관계자가 빨간 눈금 부분까지만 넣으라고 당부한 내용만 따르면 무리없이 쓸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5]
- 우직함 - 전쟁 중 본네트에 환자를 싣고 달려도 영국, 프랑스 브랜드와 다르게 중량 초과로 차가 움직이지 않게 되는 일 없이 어떻게든 차가 굴러가는 튼튼함과 우직함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엔 일본 히노자동차와 대형트럭 기술제휴를 맺어 AM트럭을 생산한 후, 1986년에 기술연구소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광주와 부산에 정비사무소를 열었다. 1988년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후 1989년 스웨덴 스카니아와 판매대리점 계약을 맺었으며, 1992년 스위스에서 해외전환사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엔 하남 특장공장을 세워 특장차 생산라인을 그리로 이전했다. 1994년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서울정비사업소 안에 기술연구소를 새로 만들었다.
2.2. 위기
하지만 1990년에 여태까지 SUV 시장을 독점하던 쌍용자동차 이외의 회사에서 처음 내놓은 SUV인 록스타를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아시아자동차는 다시 승용차 시장에 재진입을 시도하며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와 되도록 중복되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리고자 했는데, 1995년에는 '네오마티나'라는 스포티지의 플랫폼을 활용한 퓨전 RV 컨셉카를 공개한 이래로 여러 가지 세그먼트 버스터나 RV 타입의 승용차의 개발을 시작하면서 1990년대 후반에 시판하려고 했고[6][7] 실제로 이중에 몇몇 모델은 양산 직전 단계까지 개발이 진척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푸조 806을 들여와 미니밴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적은 한국 상용차 시장의 약점을 타개하기 위해 1992년부터 브라질 교포 사업가 전종진(스토니 전)과 함께 브라질 판매법인(AMB)을 세워 타우너와 토픽을 수입했다. 그러나 1995년에 브라질 정부 측이 수입차 관세를 70%로 올리면서 대신 1997년 6월에 같은 이름으로 생산법인을 세우고 8월 9일부터 브라질 바이아 주 카마사리에 현지공장을 세우려 했지만, 기아그룹의 부도로 인해 모두 흑역사가 되면서 단 하나도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고 브라질 시장 개척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8]
1997년 초에 아시아자동차도 기아차와 동일한 로고를 달고 아시아자동차판매(주)를 세워 독자 판매망을 구축하려 했으나, 기아그룹의 자금난으로 부도유예 협약 대상업체로 선정되어 법정관리로 들어가면서 그 해 12월부터 타우너, 토픽, 레토나의 판매권을 기아자동차의 자회사인 기아자동차판매로 넘긴 뒤[9] 대형차량 판매/생산과 군용차량 납품에 주력했고, 1998년 국제 입찰에서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분리 매각하거나 통합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결국 두 회사 모두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다. 이후 1999년 6월 30일부로 아시아자동차판매, 기아자동차판매, 기아대전판매와 함께 기아자동차와 통합되어 사라졌고, 공장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으로 개편되었다.
2.3. 합병 이후
합병 이후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모델들은 기아자동차 브랜드로 변경되어 명맥을 이어 오다가 현대자동차 주도의 라인업 재정비로 인해 단종되었다.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했던 차량 중 현재까지 생산되어 출시되고 있는 모델은 1994년에 출시된 대형버스인 그랜버드가 유일하다.
한편 브라질 합작법인 AMB 전 대표 전종진도 1998년에 사기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어 2000년에 석방되어 국외로 잠적하다가 2006년에 브라질 연방경찰에 체포되어 현지에 수감되었고, 2008년에 국내로 송환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10]
1988년부터 1998년[11] 까지 스카니아 대형트럭을 위탁 생산/판매했던 적이 있었다.
3. 역대 로고
아시아자동차의 역대 로고는 초창기 시절을 제외하고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의 로고와 거의 유사하게 제작되었다. 기아자동차 기준, 1986년 11월 1일 개정된 3기, 이른바 '굴뚝'로고는 새로이 도입한 워드 심벌 시스템에 입각해 제정한 코퍼리트 심벌로, 이 로고는 영문표기 Asia 윗부분에 '아시아의 깃발'을 상징하는 테두리 선(보더 라인)이 세 굽이 물결로 형성돼 있다. 이 로고의 의미는 믿음과 우의를 함께 나누며 협동과 기술을 바탕으로 사회의 발전에 일역을 담당하는 신뢰와 믿음의 기아상, 곧 신용과 협동의 의미를 표상하며,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을 통해 자동차공업을 선도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미래지향적인 기업이념의 표현, 곧 노력과 창조의 의미를 상징하고, 또 자동차공업의 기수로서 세계속의 종합 자동차메이커로 웅비하여 밝고 풍요로운 미래를 향한 꿈과 전진의 기상을 나타내는 '웅비하는 기수'를 의미한다. 로고 컬러는 기아 블루(Cyan 100% + Magenta 50%) 및 기아 라이트블루(Cyan 100%)를 사용하였다.
기아그룹에서 3기 로고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아시아자동차의 로고가 한 때 심플하게 '''A S I A''' 철자 로고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3기 로고는 차량에 1988년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두꺼운 로고였다가 1991년 하이토픽에 얇은 로고를 첫 적용했으며, 1992년 전 차량이 얇은 로고로 변경되었다.
1994년, 기아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타원형 바탕에 영문으로 KIA가 새겨진 4기 로고를 사용하였으나, 1997년 2월 14일까지는 타원형 로고를 같이 쓰되 KIA가 ASIA로 바뀌었으며, 2월 15일부터 최후까지 기아그룹의 통일성 측면을 고려하여 로고가 KIA로 바뀌었다.
4. 역대 임원
- 대표이사 회장
- 천도원 (1987~1988)
- 김한선[13] (1990~1992)
- 부회장
- 조래승 (1995~1997)
- 정두채 (1998)
- 대표이사 사장
- 관리인
- 박제혁, 진념 (1997~1998)
- 유종렬 (1998~1999)
5. 노동조합
- 아시아자동차 노동조합: 1970년 결성 이후 한동안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소속이었지만 1994년 탈퇴 이후 1995년부터 1999년 합병 전까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금속노동조합 소속이었다.
6. 생산차량
위의 틀에는 아시아자동차 시절의 차량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아시아자동차 차량 중 개발/생산 중인 차량은 고속/시외버스용 차량인 그랜버드가 유일하다.[15] 엄밀히 따지면 아시아자동차가 기아자동차에 흡수된 후 모델 체인지를 했기 때문에 현재의 그랜버드는 아시아자동차 시절의 그랜버드와는 다른 차종이다. 물론 풀모델 체인지긴 하지만 아시아 시절 그랜버드 플랫폼을 개량한 것이라 아시아자동차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16]
7. 기타
- 경찰청에도 경찰버스(1993년부터)와 가스차(페퍼포그)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반대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해당 공장에서 KM900 장륜장갑차를 징발해 진압군에 맞서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 현재 대만에서 양명산을 오르는 버스로 아직도 AM버스가 사용되고 있다.
- 현대커머셜의 여의도사옥은 원래 아시아자동차의 사옥이었다. 이 사옥은 1985년에 거산빌딩으로 완공되었으며, 1986년에 기아자동차가 인수하여 기아자동차 본사 사옥으로 사용하였으나 1992년 12월에 기아자동차가 옆 건물을 지어 이전하면서 아시아자동차와 기아자동차판매가 공유했고, 1999년 기아자동차+아시아자동차+기아자동차판매+기아대전판매 4사가 기아자동차로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기아자동차의 일부 부서가 사용하게 되었다.[19] 그러다가 2000년 말에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고 계열사의 사옥 재배치가 이루어지면서 2001년부터 현대모비스가 이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고, 다시 모비스가 빠지고 금융계열사를 여의도로 모으게 되면서 현대커머셜의 본사가 된 것이다.
8. 같이보기
[1] 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2] 콤비가 나온 아시아자동차 기업광고.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상용차 CF이다. 콤비뿐만 아니라 후반에 AM919, AM트럭 등 당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차량이 나온다.[3] 나주에 산소 공장을 설립하고 비료 회사에도 손을 댈만큼, 기업인으로써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소유한 광주 유스퀘어 및 인근 부지 역시, 원래는 이문환 씨가 설립한 산소공장이었으며, 근처의 기아자동차 공장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이었다고.[4] 당시 고급차종이었던 쏘나타 초기 모델마저도 내부는 포니와 다를 바 없이 단순했다고 한다. 반면, 벤츠는 보닛(본네트)을 열면 복잡하게 부품이 꽉 차있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5] 단, 적십자 표시는 이슬람권인 현지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부산 세관에서 이슬람 적십자 마크로 도색을 다시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6] 당시 아시아자동차에서 한참 개발 중이던 카렌스의 형제차 미니밴도 개발이 상당부분 진척되었고, 1997년 서울모터쇼에 공개된 ARV라는 박스카형 소형차는 컨셉카가 공개되었을 당시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기아그룹 부도 사태로 모조리 백지화 되었다. ARV는 컨셉카가 처음 공개된 시점이 1997년이었는데, 만약 성공적으로 양산되었으면 1990년대 말 닛산 큐브나 토요타 bB와 맥을 같이하는 박스카형 소형차, 혹은 2000년대 초 르노 모뒤스나 피아트 이데아같은 소형차급 MPV의 선구자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7] 하지만 양산이 나가리된 ARV는 완전히 사장되지 않고 아시아자동차가 기아자동차에 흡수합병된 지 10여년이 지난 후에 그 독특했던 기본 컨셉이 다시 부활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쏘울이다. 공교롭게도 쏘울이 생산되는 공장은 광주공장으로, 구 아시아자동차 공장이다.[8] 스토니 전은 아시아자동차를 상대로 4천억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이고 국내에서 재판을 받던 중 브라질로 도피했다가 2006년에 체포되었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2017~18년 사이에 만기 출소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카마사리 공장 부지는 1999년에 미국 포드로 넘어가 현지 공장이 들어섰다. #[9] 레토나가 기아자동차 브랜드로 판매된 것도 그 이유이다.[10] 2003년에 대법원에서 이미 징역 10년이 확정되었다.[11] 그 해에 스카니아코리아(1994년에 스카니아 한국 지사였다가 1995년 한국법인으로 전환)가 직접 판권을 가졌다.[12] 컬러판 중 바탕있는 것은 바탕 색상이 파란색이고, 로고 색상이 노란색이다.[13] 전 제일은행 상무.[14] 기아자동차 사장도 겸임.[15] 이 차량은 현재도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하고 있는 유일한 버스이기도 하다.[16] 물론 아주 기초적인 것만 그런 잔재가 남아있지 나머지는 전부 아시아자동차 흔적 자체가 없어졌다.[17] 당시 내무부 소방국, 행정자치부 소방국[18] 금양특장차와 삼일특장차, 우리특장에서 개조했다.[19] 참고로 1998년 말에 기아자동차의 상법상 본사는 현대그룹 계동사옥으로 옮겨졌다. 당시에는 현대자동차도 계동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