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좌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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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왕족. 위덕왕의 아들로 태자였다. 성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유물도 일부 있다. 백제의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현존하는 역사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의 역사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2]
일본에서 사찰 아스카데라를 완공하자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사절로 파견되었으며, 특히 그 곳에서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려준 일화로 유명하다.
2. 생애
위덕왕의 아들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597년에 일본에 사신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는 그 곳에서 머물며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보물로 호류사에 전해 내려왔으며 오늘날에는 일본 제실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스이코 덴노가 당시 일본 최고의 사찰이었던 아스카데라를 완성하자 백제가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일관되게 국가적 위기 때마다 태자를 보내 일본과의 외교를 강화한 전례로 볼수 있다.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외교 강화가 절실했던 것이다.[3]
한편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가 아좌태자의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걸 근거로 7세기의 모작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초상화의 그림체를 정밀하게 재검토한 결과 중국 육조시대의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이었고 당시 일본에서 선진적인 중국 육조시대의 화풍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백제가 유일했기 때문에 아좌태자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3. 위덕왕 사후 행적에 대한 의문점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1년 후 위덕왕이 승하했고, 왕위는 아좌태자가 아닌 위덕왕의 동생 혜왕에게로 승계된다. 아좌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 공교롭게도 위덕왕이 병환으로 몸져 눕게 되고, 이러한 권력의 공백을 틈타 왕의 동생인 부여계(혜왕)가 실권을 장악해 버린다. 그러고선 1년 만에 위덕왕이 승하하고 부여계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 아좌태자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 건너간 이후 위덕왕 승하 시점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 때문에 혜왕이 위덕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 또한 높게 제기되고 있다. 위덕왕의 경우에는 고령이기 때문에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암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덕왕이 고령이긴 하지만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적극적으로 정사를 돌보았다는 점에서 혜왕의 왕위 계승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편. 백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왕들이 정변에 의해 살해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의구심은 커져만간다. 유사한 사례로 전지왕이 있었는데, 전지왕의 경우 왕위 계승 시점에 일본에 갔다가 아신왕이 죽은 후 섭정을 맡던 삼촌 부여훈해가 암살당하고 작은 삼촌 부여설례가 찬탈함으로써 귀국에 어려움을 겪다가 일본과 해씨 세력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바가 있다.
아좌태자가 위덕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성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아좌태자가 위덕왕의 동생이라는 설은 보통 신빙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고령의 나이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아좌태자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도중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는데 이후 611년 일본에 귀부하는 임성태자와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드라마 서동요에서 정재곤이 연기했다. 그림을 잘 그렸다는 기록대로 예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성격이 온화하지만 유약해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사촌동생인 부여선(법왕)의 위협으로 일본에서 귀국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복동생인 서동(백제 무왕)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백제에 돌아온다. 백제에 돌아온 후 군사들의 종기를 직접 빨아주는 아좌태자의 애민정신에 감동한 서동의 도움을 받아 부여선에게 맞설 만큼 힘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 위덕왕은 이런 아좌태자에게 양위하려고 했고 아좌태자는 서동과 힘을 합쳐 백제를 다시 부흥시킬 결심을 하나, 양위식 직전에 부여선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안습. 위의 역사적 추측을 반영한 이야기 전개로 보인다.
5. 관련 문서
[1] 다만 일본서기에는 그가 태자였다는 기록이 없다.[2] 이런 인물은 사실 의외로 많으며, 남아있는 기록이 상당히 부실한 편인 백제의 인물들이 특히 그렇다. 대표적으로 목라근자가 있다.[3] 위덕왕이 재위한 당시의 백제는 선왕인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 중에 전사하는 바람에 상당한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