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태자

 

일본 콘피라산(金比羅山) 신사[1]에 소장되어 있는 임성태자의 상.
1. 개요
2. 행적
3. 실존 인물인가?
4. 여담

○抑先祖ハ百濟國ノ始祖都慕大王ニ始マリ其第拾參代威德王第三王子琳聖太子推古天皇之十九年日本ニ移リ山陽八箇國ヲ賜ハリ子孫相嗣ギ(…)

높으신 선조는 백제국의 시조 도모대왕에 시작하여 그 13대 위덕왕 제3왕자 임성태자(이다.) 스이코 덴노 19년(611년) 일본에 옮겨 산양 8개 나라를 주어 자손이 서로 대물림하고(…)

오우치-타타라씨 족보


1. 개요


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의조(義照). 참고로 義는 토요타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大內)씨와 토요타(豊田)씨의 시조. 성왕 혹은 위덕왕의 셋째 아들인 걸로 추정된다. 오우치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2. 행적


위덕왕 사망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2](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3. 실존 인물인가?



백제가 멸망하고 수백년이 지난 14세기 말 일본의 기록에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인물이기에 창작 인물이거나 원형을 잃은 기록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타타라'라는 성씨 자체는 이미 9세기경 나라 시대목간에서 확인된다. 신찬성씨록에서도 등장하긴 하는데 가야계 가문으로 나오고 시조의 이름이 거등이다.
서일본의 다이묘였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사신을 보낸 예가 많다. 오우치가 당주가 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는 자신이 백제 왕가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받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성공하진 못했다. 여담으로 오우치 가는 1557년 32대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가 또다른 다이묘이자 한땐 산하에 있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멸망했으나[3] 방계 혈통이 간간히 내려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종 1년(1399년)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고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그가 '충청도에 있는 조상님들의 영지를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여서 조선 대신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단종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는 "계보만 적어주시면 영지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라고 나왔었다. 막부 시대로 일종의 봉건 체제인 당대의 일본인과 중앙 관료 체제가 확립된 당시 조선인의 인식차가 극명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이름이 비슷한 임정태자(臨政太子)라 나온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대부가 되어 오우치도노라 불리며 그 후손은 47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만 실제 오우치 가는 31대인 오우치 요시타카 때 멸망.[4] 종손 가문은 31대에서 전멸했지만, 종손 가문의 다른 아들들이 토요타 씨로 성을 바꿔서 살아남았다.[5] 그밖에 임성태자 사후부터 1400년대까지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방계들이 존재했다. 스에 하루카타로 유명한 스에씨도 오우치씨의 방계이다.
사실 당시 다이묘 가문들은 멋대로 일본의 주요 명문가 우지를 참칭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오우치 가문이 다른 다이묘 가문들과 같이 겐지, 헤이케, 후지와라 기타 등의 흔한 우지(氏)를 택하지 않고 대체로 드문 백제계 조상인 다타라(多々良)를 택한 것은 경제, 정치적인 이유가 다분히 있다고 보인다. 아시카가 막부가 기능하고 있던 전국시대 이전 한반도 및 대륙과의 감합무역에서 오우치는 아시카가 쇼군가와 호소카와 가문과 함께 주요한 3축으로 활동했지만 쇼군가인 아시카가와 막부관료 가계인 호소카와에 비해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름이 부족했던 오우치는 한반도와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백제계 도래인들의 자손임을 자칭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단순한 정황 증거로서 오우치가 진짜 도래인 계열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애초에 우지(氏) 참칭은 대외적으로 지배권을 정당화시키고 가문의 격을 올리는 것이 주요 목적인만큼 일본내에서 마이너한 성인 다타라(多々良)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우치 가문은 조선같은 외국엔 외교적 이익을 위해 백제의 후손을 자칭한다손 치더라도 내부적으로는 다른 가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6] 오우치 가문은 일본 내에서도 뻔질나게 '우리는 백제 임성태자의 후예'를 내세우며 활동했다.
실제 일본의 유력 영주들은 오우치 가문에 대해 '본국 사람이 아닌 고려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이 오히려 일본내에서 '이단 세력'이라는 배외심을 자극함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자세로 일관되게 임성태자의 후손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임성태자의 직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조상이 진짜 백제계 도래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4. 여담


  • 2010년 3월 30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임성태자의 45대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 公夫)씨 부부를 익산명예흥보대사로 임명하였다. 2009년에도 익산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
  • 사료가 부족한 것과 별개로 일단 사극의 소재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는 인물이지만,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임성태자가 주인공은커녕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조차 단 한 편도 없는 상황이다.

[1] 또한 이곳에는 임성태자의 투구와 말타는 상도 같이 소장되어 있다.[2] 만주족의 성씨들 중 하나인 타타라와는 동음이의어다.[3]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 시대 문헌에선 '모리 씨의 선대가 임성태자를 따라 왜로 건너 왔던 종자(하인)'라고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모리 씨의 경우는 오에노 히로모토의 후예이다. 하지만 모리가 한 때 오우치의 산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 흔하다면 흔했던 하극상은 오우치 씨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정도로는 볼 수 있다.[4] 32대 당주인 오우치 요시나가는 오토모가에서 들여온 양자로 파양되었다가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당주 요시타카를 살해한 후 당주로 앉힌 인물이다.[5] 토요타 가문의 족보에도 백제 왕가 족보가 표시되어 있다. [6] 실제 오우치의 분계는 후지와라를 참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