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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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8대 국왕이자 건길지.
임성태자(아좌태자)의 가문인 토요타씨 족보에는 직지왕은 백제 제2대 국왕, 전지왕은 백제 제4대 국왕으로 나와 있어 둘을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일본서기에서 직지왕을 계승한 것은 구이신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둘은 동일 인물이며 족보의 기록이 틀렸거나 전지왕이 두 번 즉위한 것으로 본다. 참고로 제1대는 동명성왕이고 제3대는 아신왕이다. 중국 측 사서에 백제열전이 따로 생기기 시작하는 시점이 전지왕 대이기 때문에 이 때부터 정확히 백제로서의 정체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태자 시절 이름은 영이었다. 부왕인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하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아신왕은 397년에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태자 영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6] 그리하여 태자 영은 397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일본에 머물게 된다.
405년 아신왕이 갑작스레 승하했는데 갑자기 그가 승하한 것은 광개토대왕에게 털리고 내외적으로도 막장 가도를 달리는 와중에 발생한 국내 정쟁으로 인해 시해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자 영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아신왕의 동생인 부여훈해가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섭정을 맡고 있었으나 아신왕의 막내동생인 부여설례가 진씨 세력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켜 부여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왜에서 귀국하던 태자 영은 충신 해충(解忠)으로부터 숙부 부여설례가 찬탈했다는 국내 정세 변화를 전해들었고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어느 섬에 머물렀다. 진씨 세력의 지원을 받은 부여설례와 태자 영을 지지하는 해씨 세력 간의 정쟁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해씨 귀족들이 부여설례를 제거하며 대치 상황을 끝냈고 이후 태자 영이 도성으로 돌아와 전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해씨 세력의 지원 덕분에 전지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전지왕 즉위 후 해씨 세력 인사들이 대거 등용된다. 전지왕은 귀국할 때 도와주었던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천 석을 하사하였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하였으며 외척인 해씨 집안을 국정에 맞아들이게 되었다. 전지왕을 왕으로 옹립한 해씨 세력들은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해씨 세력에 의해 옹립된 전지왕의 실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아신왕 때까지 권세를 누렸던 외척 진씨 집안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7] 전지왕은 즉위 과정에서 해씨 세력뿐 아니라 서제 여신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즉위 후 여신을 중용하여 상좌평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백제 최초의 상좌평 임명이었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416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의 작호를 받았으며 왜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유지하였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왜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국인 고구려에 별다른 군사적 행동은 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매번 패배하는 소식을 일본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중국 대륙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 연안의 해상 무역권을 유지하고 팽창하는 고구려 세력에 대처하려 하였다. 그것은 이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南朝)의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전지왕은 423년에 사신을 파견했고 425년 승하하여 비유왕이 진동대장군 칭호를 물려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전지왕이 승하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구이신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에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한 목만치라는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고 횡포를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8]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전지왕의 재위 기간은 405년부터 420년까지이다. 그런데 『송서』에는 전지왕이 425년(구이신왕 6)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414년(이듬해 구이신왕이 즉위함)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망 연대에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같은 『일본서기』 기록임에도 308년(이주갑인상을 반영하여 보정하면 428년) 2월에 직지왕이 자신의 누이 신제도원을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자체 모순을 일으킨다. 아마 이주갑인상의 영향으로 짜집기하다가 실수를 범한게 아닌가 싶다. 428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유왕 2년이다. 이로 인해 비유왕의 치세기는 완전히 『일본서기』에서 사라진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전지왕 본기'''
一年秋九月 전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진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秋九月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다
三年春二月 여신을 내신 좌평에 임명하다
四年春一月 여신을 상 좌평에 임명하다
五年 왜국에서 야명주를 보내오다
十一年夏五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진에서 왕을 책봉하다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가뭄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다
十三年秋七月 사구성을 쌓다
十四年 왜국에 사신을 보내 흰 포목을 선사하다
十五年春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五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六年春三月 전지왕이 죽다
[1] 《일본서기》에서도 직지라 써있다.[2] 《송서》, 《양서》, 《진서》에서도 영이라 써있다. 다른 이명들과 비교해볼 때 오기로 인해 전(腆)이 영(映)으로 적힌 걸로 보인다.[3] 《삼국유사》. 직지(直支)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4] 해수, 해구 등 해씨 인물들이 전지왕의 친척이었다고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으므로 팔수부인은 해씨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아내의 친척은 외척이 아닌 인척으로 부르는데 이 인척이 친척으로 분류되는지는 문화권마다 다르므로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에선 이 설에 대해 확증할 수 없다는 선으로 상당 부분 판단을 보류하였다. 한편, 일본에서 장기간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바 있고 지금도 해당 분야를 연구 중인 김현구 교수는 팔수부인이 일본 황가 혹은 귀족의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당대 백제가 일본과 상당히 혼인 관계가 잦았던 개연성을 고려해보면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5]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라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6] 삼국사기에서만 인질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정작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당대의 서적 백제기를 인용하며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결호)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도 인질이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결호를 위해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7] 하지만 진씨 집안은 이때 한 번 졌다고 정계에서 아예 밀려나지는 않았다. 초기에 비해서는 힘이 약해졌지만 백제 말기까지도 상당히 활약했다.[8] 국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진위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백제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나마 가장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