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라근자
'''木 羅 斤 資 '''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근초고왕 대의 장수.참고 자료
국내나 중국의 사서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오직 일본서기에서만 존재가 언급되는 인물이다.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목(木)씨로, 목씨 인물들 중에서는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라근자 이후에 가야지역을 기반으로 목씨 세력이 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목씨의 가야경영 자체가 일본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므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 시기인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주갑인상에 대해 고려했을때 근초고왕 시기의 인물이었음이 추정 가능해진다.
즉, 근초고왕이 벌였던 백제의 가야 정벌 당시에 핵심 인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왜국의 진구황후가 주도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구황후 삼한정벌 이야기 자체가 그렇듯이 영 확증할 수 없는 기록이다. 일본서기 스스로 출병도 백제에서 했고, 가야 정벌군 주력도 다 백제라고 적고 있다(...).
"신공 49년(서기 369년) 목라근자는 사사노궤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탁순국(창원)에서 모여 신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비자벌(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등의 7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가야를 모두 군사적으로 평정하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문점이 있기도 해서,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군사력으로 격파했다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시기 마한의 한 국가로 추정되는 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한 국가로도 추정되는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도륙'이라는 강경한 표현을 쓴 것과 달리 가야 7국에 대해서는 '평정(平定)'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도 의미일 뿐 그들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거나 지배세력의 교체를 단행하는 등 극단적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고 이후 전개되는 기록이나 고고학을 봐도 가야 세력의 기반은 거의 그대로 온존했고 이후 오랫동안 연합군사작전을 펼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실제로 가야는 백제군에게 왕창 깨진 것치고는 이후로 멸망하지 않고 잘 지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성왕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가 되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기선제압을 한 후 외교적으로 회유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아들 목만치가 이 목라근자의 군공을 바탕으로 가야에서 한 벼슬 했다는 기록까지 고려하면 목라근자가 어느 정도 가야권에 기반을 만들어둔 것은 맞는 듯 하다.
382년, 백제와 협력관계에 있던 일본의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가 여자에게 홀딱 넘어가(...) 가야국[1] 을 쳐서 이시품왕이 백제로 도망오자 목라근자가 다시 나서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관국왕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한편 목라근자는 훗날에 신라 여자와 혼인하여 아들인 목만치를 얻었다고 하는데, 목만치는 아버지의 공이 큰 덕분에 임나[2] 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권신이 되어 높은 권세를 부렸다고 한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물격인 진구황후와 얽혀있기 때문에 목라근자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근거가 없는 왜곡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백제가 가야를 공격한 것은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다.
그 시기에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던 것이 사실이고, 일본서기에 존재하는 후대의 기록을 보면 성왕을 왜국의 긴메이 덴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서술했지만[3] ,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보였던 것과 관련 기록들은 삼국사기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백제는 신라와 가야 7국을 묶어 강력한 패권을 형성하고 한반도 남부의 진정한 패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현장에서 이를 직접 주도한 인물인 목라근자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백제의 근초고왕 대의 장수.참고 자료
국내나 중국의 사서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오직 일본서기에서만 존재가 언급되는 인물이다.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였던 목(木)씨로, 목씨 인물들 중에서는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라근자 이후에 가야지역을 기반으로 목씨 세력이 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목씨의 가야경영 자체가 일본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므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 시기인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주갑인상에 대해 고려했을때 근초고왕 시기의 인물이었음이 추정 가능해진다.
즉, 근초고왕이 벌였던 백제의 가야 정벌 당시에 핵심 인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왜국의 진구황후가 주도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구황후 삼한정벌 이야기 자체가 그렇듯이 영 확증할 수 없는 기록이다. 일본서기 스스로 출병도 백제에서 했고, 가야 정벌군 주력도 다 백제라고 적고 있다(...).
2. 활약상
"신공 49년(서기 369년) 목라근자는 사사노궤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탁순국(창원)에서 모여 신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비자벌(창녕), 남가라(김해), 탁국(영산), 안라(함안), 다라(합천), 탁순(창원), 가라(고령) 등의 7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가야를 모두 군사적으로 평정하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문점이 있기도 해서,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군사력으로 격파했다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시기 마한의 한 국가로 추정되는 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한 국가로도 추정되는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도륙'이라는 강경한 표현을 쓴 것과 달리 가야 7국에 대해서는 '평정(平定)'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도 의미일 뿐 그들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거나 지배세력의 교체를 단행하는 등 극단적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고 이후 전개되는 기록이나 고고학을 봐도 가야 세력의 기반은 거의 그대로 온존했고 이후 오랫동안 연합군사작전을 펼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실제로 가야는 백제군에게 왕창 깨진 것치고는 이후로 멸망하지 않고 잘 지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성왕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가 되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기선제압을 한 후 외교적으로 회유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아들 목만치가 이 목라근자의 군공을 바탕으로 가야에서 한 벼슬 했다는 기록까지 고려하면 목라근자가 어느 정도 가야권에 기반을 만들어둔 것은 맞는 듯 하다.
382년, 백제와 협력관계에 있던 일본의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 가 여자에게 홀딱 넘어가(...) 가야국[1] 을 쳐서 이시품왕이 백제로 도망오자 목라근자가 다시 나서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관국왕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한편 목라근자는 훗날에 신라 여자와 혼인하여 아들인 목만치를 얻었다고 하는데, 목만치는 아버지의 공이 큰 덕분에 임나[2] 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구이신왕이 즉위하자 권신이 되어 높은 권세를 부렸다고 한다.
3. 의문점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물격인 진구황후와 얽혀있기 때문에 목라근자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근거가 없는 왜곡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백제가 가야를 공격한 것은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다.
그 시기에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던 것이 사실이고, 일본서기에 존재하는 후대의 기록을 보면 성왕을 왜국의 긴메이 덴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서술했지만[3] ,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보였던 것과 관련 기록들은 삼국사기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백제는 신라와 가야 7국을 묶어 강력한 패권을 형성하고 한반도 남부의 진정한 패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현장에서 이를 직접 주도한 인물인 목라근자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4. 현대 매체에서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백제의 영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거대한 창을 쓰는 근접 공격계 보병 영웅. 목라근자의 모델링은 신라 미션의 황산벌 전투 미션에서 계백으로 재활용되었는데 얼굴 포트레이트는 근구수왕 것을 사용했다. 성우는 엄상현인데 제법 거친 이미지로 연기했다.
-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한정수가 연기했다. 초반부터 근초고왕을 따르는 심복 무사로 이때는 '복구검'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목라근자로 개명한다.(…)[4]
[1] 어느 국가인지는 불명이나, 뒤에 이시품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금관국으로 생각된다.[2] 일본서기에서의 가야지방의 통칭[3] 백제와 일본이 동맹을 맺은 사실을 일본을 우위에 놓고 황실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왜곡했다는 것이 옳다.[4] 본 드라마는 초반부터 등장해야 할 인물들은 나오지 않고 정체불명의 인물들만 잔뜩 등장하다가, 비판을 듣자 개명드립을 비정상적으로 때려가며 해당 인물들을 실존인물들로 바꾸는 짓거리를 저질렀다. 때문에 본 인물은 원래 별개의 인물로 예정되었다가 비판으로 인해 적절해 때려맞춘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