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사
1. 개요
백제에는 677년 동안[1] 31명[2] 의 왕들이 있었다. 평균 재위기간은 21년.
백제에서 왕을 생전의 이름이 아니라 시호로 부르는 용례는 24대 동성왕 때부터 공식적으로 도입되었으며, 그 전의 왕들은 모두 '이름+왕'의 형태로 불렸다. 동성왕 때 시법이 온전히 정착한 것도 아니어서, 27대 위덕왕을 "창왕"이라고 부른 금석문도 발견되었다.
성씨는 부여씨인데, 줄여서 여씨라고도 한다. 이는 동명성왕과 온조왕이 부여의 왕족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백제 왕족의 후손은 부여 서씨[3] 와 의령 여씨[4] 라고 한다.
한국의 왕사 중 '''가장 불행하고 피비린내 나는 왕사'''를 가지고 있다. 백제 역사가 제대로 파악이 되는 근초고왕 이후부터의 왕들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양대 전성기를 제외하고 이후로는 '''대부분이 전쟁이나 반란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게다가 대부분 생년이 불확실하다. 무령왕은 웅진 백제에서 즉위한 다섯 왕 가운데 유일하게 살해당하지 않은 왕으로, 중흥에 성공한 무령왕 이후에야 왕이 천수를 못 누리고 죽는 현상이 줄어들었다.
'''31/32명의 왕 가운데 16명이 비명횡사'''했고 1/2명은 포로로 잡혀갔다. 기록이 불분명한 것을 감안하면 사실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해당하거나 시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왕은 초기 6명을 제외한 중반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중반기에서도 고이왕 - 비류왕 - 근초고왕, 근구수왕 - 전지왕 - 무령왕, 무왕 - 의자왕의 8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이 이에 해당된다. 더구나 고이왕 앞 왕들은 사실상 기록이 분명치 않기에 고이왕이 사실상의 건국자로 거론되는 판이며, 의자왕 때 나라가 망한 걸 생각하면 정말 제대로 천수를 누린 왕은 8명이다. 의자왕과 참칭왕 부여태[5] , 그리고 부흥군왕 부여풍까지 모두 포로로 잡혀가 당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2. 가계도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일본서기》의 계보를 기입했다. 비록 일본서기는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백제 관련 기록이 적었기 때문에 백제 관련 기록이 부실하고, 구삼국사를 인용한 삼국유사에서도 백제 관련 기록이 가장 적으며, 전해져 오는 금석문의 경우에도 생각보다 많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백제 금석문은 사택지적비가 유일하다[6] . 반면 일본서기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일본세기 등 도래인들이 쓴 사서(史書)를 직접 인용했기에 백제 왕력에 한해서는 일반적으로는 일본서기 쪽이 더 신뢰도 높다고 평가받는다. 무령왕릉 발굴로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는 더더욱.
2.1. 근초고왕 이전
흔히 동명왕은 곧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사서에서는 북방의 고리국에서 나와 부여의 시조가 된 동명이라는 인물이 있다. 즉 부여의 계승을 강조했던 백제는 고구려 주몽 신화가 아닌 부여 동명 신화를 강조해 백제 시조 도모왕(都慕王)은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동명왕일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백제 여러 왕이 배알한 '''태조 동명왕'''이라는 존재가 초대 국왕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만 백제 관련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동명(東明)을 언급된 것은 삼국사기이고 일본서기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인물이 언급된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귀수왕은 백제의 제16대 왕으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의 10세손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서 14대 왕이라고 한 것과 차이가 있는데 2명의 왕이 누락된 셈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또한 2명의 왕이 누락되었음을 암시하는데,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문주왕을 도모대왕의 24세손, 혜왕을 30세손으로 적고 있다. 글자 그대로는 현실성이 없고, 각각 '도모대왕을 기점으로 24대 왕, 30대 왕'으로 취급한다면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이는 당시에 구 백제인들이 온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도모왕을 백제의 태조이며, 온조가 주몽의 친자라고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비류가 주몽의 친자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백제가 주몽을 태조로 모실 이유가 없다.
또한 제왕운기는 백제의 왕이 678년간 총 34명이 있었다고 말해, 삼국사기의 31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속일본기 및 동사강목과 달리 동명왕과 부여풍을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데, 제왕운기는 온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형인 은조가 5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죽고 온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말한다.[7] 온조왕~의자왕 사이 677년에 1년이 추가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제왕운기는 비류를 국왕으로 본 것이 맞는 듯하다. 여기에 토요타씨 족보에 나오는 진이왕 또는 섭정인 부여훈해 등 2명을 추가적으로 헤아려 총 34명이 되지 않는 것인지 추측된다.
역사학계에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건국부터 3세기까지)을 두고 긍정론, 부정론, 수정론이 존재한다. 긍정론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와 인물이 모두 실제와 일치한다는 시각이고, 부정론은 이를 아예 허구로 취급한다. 수정론은 기록의 사건 자체는 사실이되 후대의 일을 과거로 소급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초기 기록 3종류 중에서도 고구려 쪽의 초기 기록은 태조대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수명을 제외하면 대체로 학계에서 사실로 신뢰받는 분위기이지만, 백제(온조, 다루, 기루, 개루)와 신라(혁거세, 남해, 유리, 기림, 흘해)의 기록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특히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편찬했는데, 그 이전엔 문자로 기록하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대로 된 역사서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때까지의 과거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으리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신채호의 학설에 따르면 백제의 창업 군주는 온조가 아닌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인 소서노이다.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초고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왕가였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 우수(優壽), 비류왕 대 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우복(優福), 개로왕 대 건무장군 우서(于西),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있을 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2.2. 초고왕계
2.3. 개루왕계
구이신왕까지는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임이 확실하지만, 다음 왕인 비유왕은 구이신왕과의 관계가 애매하다. 우선 삼국사기에서는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고 써놓았지만 일운으로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였고, 송서에서는 비유왕이 전지왕을,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이 구이신왕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명성왕의 18세손이라고 하는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비유왕-부여곤지-무령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비유왕은 동명성왕의 16세손이 되는데 이 경우 삼국사기에서 아버지 또는 형인 구이신왕(14세손)과 2세대의 차이가 나게 된다[9] . 따라서 신찬성씨록을 신뢰한다면 구이신왕과 비유왕은 항렬상 형제, 부자뻘이 아니라 조손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같은 시대에 활동한 위덕왕과 진이왕의 세대차가 무려 5세대 이상으로 벌어지기에, 저 18세손이라는 기록이 정말 직계로 18세손을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일본서기에서 즉위 당시 연소하여 대놓고 섭정인 어머니가 간통까지 할 정도였던 사람이 8년 사이에 손자까지 봤을 가능성도 낮고... 일단 신찬성씨록 기록상 비류왕과 비유왕이 직계로 이어진 것은 확실한데 정작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꽤 있다.
오우치(大內) 가문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망명해 창설한 가문이다. 족보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여 아좌태자와의 공통점이 보인다. 참고로 이 족보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즉위한 진이왕의 존재가 언급된다.
한편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扶餘禪廣)이 일본의 지토 덴노로부터 쿠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씨라는 성을 하사받는다.
3. 연표
잘 보면 한성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총 햇수로 BC 18년 ~ AD 660년 (663년)까지 677년 (680년).
4. 번외
4.1. 백제의 제후왕 및 후작
백제의 제후왕은 5세기 중반 ~ 후반인 개로왕, 동성왕 시기에 책봉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부여씨이다. 다만 5세기 후반 동성왕의 제후왕 책봉을 끝으로 백제의 제후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제후왕 제도가 폐기된 것인지, 기록이 소실된 것인지는 불명.
제후왕의 아들이 백제왕이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부여곤지의 아들인 동성왕, 무령왕[24] 은 각각 삼근왕, 동성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계와 문주왕계가 각각 한성 함락, 삼근왕의 요절로 단절되면서 당시 살아있었던 곤지왕의 아들들(동성왕, 무령왕)이 왕위에 옹립된 것이다.
4.2. 웅진도독 대방군왕
나당전쟁에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에게 축출당해 요동 건안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677년 당나라는 건안성으로 백제유민들을 모으는 한편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하고 백제로 보내려했으나, 부여융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682년 사망하게 된다. 부여융이 사망한 뒤 측천무후는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으로 책봉해 왕위를 잇게 했지만 이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기록에 의하면 725년 12월 봉선제를 지낸 기록에 참여한 인물 중 '백제대방왕(百濟帶方王)'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적어도 8세기 초반까지는 대방군왕 직위를 가진 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인명이 적혀있지 않아서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여경이 장수해서 725년 무렵까지 살아있었거나, 부여경 이후에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인물이 있었을 수도 있다.
5. 신찬성씨록의 백제계 성씨
분가가 있는 경우 본가에 '''볼드체'''.
6. 이모저모
- 백제는 다른 국가에 비해 유독 재위기간이 짧은 왕들이 어럿있다. 가장 짧은 재위를 한 왕은 사반왕으로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했다. 그 덕에 《삼국사기》에도 항목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뒤로 1년간 왕위에 있었던 혜왕(598년 음력 2월 ~ 599년), 2년간 재위한 계왕(344년 음력 10월 ~ 346년 음력 9월), 법왕(599년 ~ 600년 음력 5월)[41] , 침류왕(384년 음력 4월 ~ 385년 음력 11월)이 뒤를 따른다.
- 백제 국왕의 재위기간이 짧았고 왕권이 불안정했던 것과 별개로 백제 국왕들의 평균 수명은 상당히 긴 편이었다. 물론 출생연도가 전해진 왕은 3명뿐이라[42] 정확한 수명을 알긴 힘들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추정했을때 무령왕 이후 의자왕 시기까지 만 60세를 못 넘긴 왕은 법왕 정도밖에 없다.[43] 이는 40대 초반 수명의 통일신라, 42세의 고려, 47세의 조선과 대비된다. 이건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평균적으로 5~60 이상 산 사람이 많으며 장수왕의 98세는 과장이 아니라 진짜다. 부여의 대소왕도 그렇고 부여-고구려-백제 왕가는 장수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던 걸로 추정된다.
- 삼국 중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없다.[44]
7. 관련 문서
[1] BC 18~660, 서기 0년이 없으므로 678-1=677년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704년(705-1), 신라도 991년(992-1)이다.[2] 다만, 부여풍을 왕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어서 32명이라고도 한다.[3] 당고종이 백제의 왕자 부여융에게 서씨라는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4] 부여풍의 후손으로 중국에 살던 중 송나라 때 고려로 환국한 간관 여선재(余善才)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5] 왕으로 인정한다면[6] 삼국사기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수서를 그대로 붙복한 을지문덕 열전에서 어떻게든 좋은 수식어를 넣어 띄워주려는 서술이나, "당태종을 막아낸 영웅의 이름을 모른다는게 너무 아쉽다." , "연남생은 당나라 입장에선 영웅일지 모르나, 우리가 보기엔 매국노일 뿐이다."같은 사론이 포함 된 것만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국가에 대해 깍아 내리려고 일부러 악의적인 서술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사기 항목을 참조.[7] 제왕운기 백제기 주석: 與母兄殷祚南奔立國殷祚立'''五月而卒'''.[8]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등이 있었다.[9] 신찬성씨록에서 근구수왕이 동명성왕의 10세손으로 나오고, 일본서기에서 근구수왕-침류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의 계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10] 서기 0년이 없으므로 493-1=492년[11] 청체는 출전이 삼국유사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기라 하였다.[12] 정쟁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13] 《삼국사기》에서는 사인 없이 그냥 사냥 중 머물던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진서에서 386년 백제 왕세자 여휘를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386년은 진사왕 2년이지만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고 임명 전 관등이 왕이 아닌 세자였다는 점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부여휘는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이라는 가설이 있다.[15] 분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역시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왕실 갈등이 벌어져 전지왕 즉위까지 섭정을 맡았던 부여훈혜가 부여설례에게 죽었다. 부여설례는 왕을 칭한 뒤 아신왕의 태자 부여전지까지 죽이려고 했으나 여론이 동조하지 않아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16] 이병도는 모도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17] 모도의 축약 표기.[18] 이병도는 모도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 하였다.[19] 모도의 축약 표기.[20] 성왕 16년(538년) 사비 천도.[21] 재위 45년. 향년 일흔넷. 연도 추정과 생몰년이 확실한 백제왕 가운데는 가장 장수했다.[22] 무왕 40년(639년) 금마저 천도. 단, 완전한 천도는 아니고 대신라전쟁을 위한 별도 조성,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왕, 왕궁리 유적 문서 참고[23] 부여고가 490년 불사후가 된 점을 보면 490년에 후작에서 밀려났거나 사망한 것으로 보여진다.[24] 다만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개로왕이란 설도 존재한다. 항목 참조.[25] 당회요 백제전에서 부여숭으로 등장. 이는 당 현종의 이름과 겹쳐서 피휘되었기 때문이다.[26] 일단은 국주(国主)로 나와있다.[27] 林連의 일부 기록에서 등장하는 서술.[28] 근초고왕과 이름이 유사하지만 여기서는 어째서인지 국인(国人)으로 되어있다.[29] 일단은 정식 왕이 아니라 그냥 국인(国人)이다.[30] 장남. 葛井宿祢[31] 차남. 船連, 宮原宿祢[32] 3남. 津宿祢[33] 中科宿祢. 津連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마려군(麻侶君)의 아들로 추정된다.[34] 황별씨족 편에서도 등장하는데 시조가 사가 덴노의 아들 미나모토노 마코토이다. 사가 덴노는 어머니가 무령왕의 후손인 간무 덴노의 아들이므로, 避流王은 무령왕의 직계 조상인 비류왕을 뜻함을 알 수 있다.[35] 己汶氏. 일본측 기록에서 奚는 존칭 표기로 자주 쓰였으므로 이름은 그냥 문휴(汶休)일수도 있다.[36] 일단 국주(国主)라고 하여 왕으로 나와있다.[37] 弥那子富意弥라고도 쓴다. 국군의 아들(国君男)이라고 한다.[38] 본가인 真神宿祢는 중국계로 분류되어 있고, 분가인 原首는 백제계로 분류되어 있다.[39] 村主[40] 백제의 신(神)이라고 적혀있다.[41] 5~6개월 정도 즉위하여 기록이 애매한 사반왕을 빼면 실질적으로 가장 짧게 재위한 백제 왕.[42] 삼근왕: 464년, 무령왕: 461년, 위덕왕: 524년. 일본서기나 무령왕릉지석의 무령왕의 연령기록을 참고해보면,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세는 나이가 아닌 연 나이로 나이계산을 했음을 알 수 있다.[43] 무령왕 63세, 성왕 60대 중반, 위덕왕 75세, 혜왕 60~70대 추정, 법왕 30~50대 추정, 무왕 60대 중반, 의자왕 60대 초반. 그나마도 성왕은 전사했고 의자왕은 화병으로 일찍 죽은 걸 감안하면 정상적으로 생존했을 시 더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44] 일본서기에서 부여곤지를 '곤지왕(昆支王)'으로 기록하긴 했지만 곤지가 왕으로 추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