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양
案內孃
서비스업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여성 직원을 말한다.
Bus conductor
[image]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승객과 버스 여차장의 근무 장면. 명동에서 출발해 서울역과 신촌을 거쳐 김포공항을 오가던 김포 42번 버스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안내양 하면 떠오르는 직업이다. 물론 남자 차장도 있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흔치 않았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6월 17일 교통부 장관이 여차장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버스 안내양의 역할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었다.
정류장에 가까워 오면 항상 "다음 정류장은 OOO입니다. 내리실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하고, 출발하기 전엔 버스 옆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オーライ; all right)라고 외쳤다.
50대 분들이 흔히 추억 하는 '학창 시절 타고 다니던 만원버스'에 학생들을 밀어 넣고 출입문에 매달려 다니다 사고가 나곤 했다.
1980년대 말까지도 존재했던 직업이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의 실시와 더불어 정류장 자동 안내방송과 하차벨(콜부저), 자동문[3]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1983년부터 안내양은 사양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89년 12월 30일 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 6항의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 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었다. 마지막 안내양은 서울 김포교통에 있던 38명이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2006년 초에 충청남도 태안군의 농어촌버스에 안내양을 부활시켜서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4] , 2010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안내양을 부활시킨 ‘행복버스’를 도입했다. 지금은 이전과는 업무가 바뀌어서 특히 농어촌 지역에 많은 고령 승객의 승, 하차를 보조하고, 짐을 많이 든, 대부분 동네 시장에 농작물을 팔러 나가는 노인들의 승, 하차를 보조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노인 못지 않게 농어촌에 많이 위치한 초등학교의 경우 학생들 거주지가 매우 넓게 분산 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통학버스의 경우 어린이들의 동승 보호자의 개념으로 어른 1명이 타게 된다. 동승 보호자의 경우 2017년 도로교통법 제53조 제3항 개정에 따라 2017.1.29(일)부터 “15인승 이하 통학버스에도 동승 보호자를 의무적으로 탑승”해야 하는 제도가 시행했다.
사실 1960년대~70년대 안내양은 여러모로 애환이 서린 직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인권은 처참할 정도로 낮았고,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나 이에 대한 사회 인식은 매우 미흡했기에 이 시절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극소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안내양, 식모, 여공 정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초졸 정도의 저 학력으로도 가능하며, 돈 말고도 숙식을 별도로 제공 받았다는 점. 이 때문에 가족의 생활비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꽃다운 아가씨들이 적은 연봉과 빡빡한 노동 시간에 시달리면서도 불만 없이 묵묵히 일에 매달렸다. 요금함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버스 요금을 받으며 현금을 직접 징수하다 보니 계산이 안 맞으면 돈을 훔쳤거나 횡령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기 쉬웠고 이 때문에 (주로 남자였던) 버스 회사 사장이나 직원에게 알몸 수색조차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다. 승객에게 성추행이나 성희롱, 심하면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이나 험담 같은 폭언을 당해도[5]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하는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승차 거부 등의 파업/농성이 잦았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안내양 농성' 등을 치면 그 사례가 많이 나온다. 이 기사를 참조하면 당시 버스 안내양의 근무 환경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버스 기사나 승객에게 있어서 많은 편의성을 제공해 주던 직업이었는데, 버스 기사에게 근무 중 피로를 많이 덜어줬는데 현대의 버스 기사는 운전부터 승객 승, 하차 확인까지 맡아야 하지만 안내양이 있으면 이런 관리적인 부분을 안내양이 보조해주기 때문에 운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내양 폐지 직후에는 버스 운전기사들이 적응을 힘들어 하며 피로를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다. 승객에게는 안전한 하차를 보장해 줬는데 아무리 출입문에 거울과 중문 안전 센서가 있어도 인간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출입문 막대 개폐 레버부터 내려 문부터 닫고 출발하려는 막장 기사들도 있지만 이 때는 안내양이 상술된 " 탁탁 오라이~ " 를 하기 전에는 문 닫고 출발하지 않았다.
관광,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었다. 보통 주의사항이나 여러가지 안내를 해주기도 했고, 음료수 등을 직접 나눠주기도 했다. 이들은 시내버스 안내양과 이미지가 완전히 정반대였다. 복장부터가 미니스커트 등 시내버스 안내양보다 훨씬 세련된 제복을 입었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땅 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리웠고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종이었다. 그만큼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으며 고졸 이상 학력에 160cm등이 요구되었다.
대략 1986년경까지 존재했다가 1987~1989년 사이에 인건비 문제로 폐지 절차를 밟았고 1992년 10월 우등고속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관광버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가이드 등 안내양이 할 역할이 더 있었기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도 볼 수 있었다.
유럽과 일본에서 1960년대까지 차장이 있었고, 이후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사라졌다.[6]
대만에도 있었다. 미국의 한 중국어 교재를 보면 타이베이 시먼딩에서 시내버스를 잘못 타서 다시 안내를 받는 회화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 버스 차장이 나온다. 중국 대륙에는 현재도 있으나 점차 없애 가는 추세이다. 기사 혼자 승무하는 시내버스가 늘어나고 있다.
외국에도 안내양이나 버스차장 같은 직업이 존재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가령 터키의 경우 웬만한 시내버스나 시외버스에 차장이 딸려있는데, 물론 여성이 험한 일 하기를 꺼리는 사회분위기상 차장은 거의 다 남자긴 하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다. 요금 받아주고, 길안내해주고, 시외버스의 경우 물이나 주스나 차같은 것도 서비스한다. 그 외 브라질,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인도 등 다른 몇몇 외국에도 종종 남아있는데, 차장이 존재하는 버스의 기사는 손님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한다.
중국에는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존재한다. 중상급 정도 규모의 아파트가 시설이나 편의성은 한국의 임대 아파트보다 못한 경우가 많지만 엘리베이터 층수를 묻고 눌러주는 안내양만큼은 한 명씩 꼭 있었다.[7] 그러나 현재는 웬만한 금수저 동네나 호텔이 아닌 곳에서는 관리비 절감을 이유로 없어진 듯. 하지만 버스 안내양은 아직 일부 노선 한정[8] 으로 남아있다. 단 남성 보안요원은 심야버스를 제외한 전 노선에 있다. 베이징 버스 문서 참고. 북한에도 조선중앙방송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전기가 없어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운영될 때가 없어도 엘리베이터 안내양은 있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좀 심한 막장성을 보여주는 곳이라 무슨 희한한 것들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한국의 엘리베이터 안내원과는 달리 북한과 중국의 경우는 '전 인민에게 직업을 배분해 주는 사회주의' 개념이 좀 강해서, 한국 입장에서 보면 정말 쓸데없는(...) 곳들까지 사람을 붙여 관리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멕시코에서는 시내버스 한정으로 안내원이 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전부 남성들이며, 봉고차로 운행되는 콤비에는 없고 중/대형 차량에만 안내원이 존재한다. 버스기사가 직접 고용하는 형식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같은 노선이라도 안내원이 없는 차량들도 많다. 이들이 버스기사 및 강도와 공모하여 강도들이 버스에 올라타서 총들고 강도짓을 할 수 있게 협조하기도 하고, 반대로 버스 강도와 대치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의로운 안내원들도 있다.
개그우먼 이영자가 1994년 SBS 코미디 프로그램 기쁜 우리 토요일의 한 코너인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안내양 역할을 맡아 "안계시면 오라이~"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정래의 한강(소설)에도 이 일을 하는 그 시대 여성들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상사들의 갑질과 몸수색을 빙자한 성폭력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1. 개요
서비스업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여성 직원을 말한다.
2. 버스 여차장[2]
Bus conductor
[image]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승객과 버스 여차장의 근무 장면. 명동에서 출발해 서울역과 신촌을 거쳐 김포공항을 오가던 김포 42번 버스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안내양 하면 떠오르는 직업이다. 물론 남자 차장도 있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흔치 않았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6월 17일 교통부 장관이 여차장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버스 안내양의 역할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었다.
정류장에 가까워 오면 항상 "다음 정류장은 OOO입니다. 내리실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하고, 출발하기 전엔 버스 옆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オーライ; all right)라고 외쳤다.
50대 분들이 흔히 추억 하는 '학창 시절 타고 다니던 만원버스'에 학생들을 밀어 넣고 출입문에 매달려 다니다 사고가 나곤 했다.
1980년대 말까지도 존재했던 직업이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의 실시와 더불어 정류장 자동 안내방송과 하차벨(콜부저), 자동문[3]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1983년부터 안내양은 사양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89년 12월 30일 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 6항의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 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었다. 마지막 안내양은 서울 김포교통에 있던 38명이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2006년 초에 충청남도 태안군의 농어촌버스에 안내양을 부활시켜서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4] , 2010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안내양을 부활시킨 ‘행복버스’를 도입했다. 지금은 이전과는 업무가 바뀌어서 특히 농어촌 지역에 많은 고령 승객의 승, 하차를 보조하고, 짐을 많이 든, 대부분 동네 시장에 농작물을 팔러 나가는 노인들의 승, 하차를 보조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노인 못지 않게 농어촌에 많이 위치한 초등학교의 경우 학생들 거주지가 매우 넓게 분산 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통학버스의 경우 어린이들의 동승 보호자의 개념으로 어른 1명이 타게 된다. 동승 보호자의 경우 2017년 도로교통법 제53조 제3항 개정에 따라 2017.1.29(일)부터 “15인승 이하 통학버스에도 동승 보호자를 의무적으로 탑승”해야 하는 제도가 시행했다.
사실 1960년대~70년대 안내양은 여러모로 애환이 서린 직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인권은 처참할 정도로 낮았고,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나 이에 대한 사회 인식은 매우 미흡했기에 이 시절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극소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안내양, 식모, 여공 정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초졸 정도의 저 학력으로도 가능하며, 돈 말고도 숙식을 별도로 제공 받았다는 점. 이 때문에 가족의 생활비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꽃다운 아가씨들이 적은 연봉과 빡빡한 노동 시간에 시달리면서도 불만 없이 묵묵히 일에 매달렸다. 요금함이 없었던 시절이라서 버스 요금을 받으며 현금을 직접 징수하다 보니 계산이 안 맞으면 돈을 훔쳤거나 횡령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기 쉬웠고 이 때문에 (주로 남자였던) 버스 회사 사장이나 직원에게 알몸 수색조차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다. 승객에게 성추행이나 성희롱, 심하면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이나 험담 같은 폭언을 당해도[5]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하는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승차 거부 등의 파업/농성이 잦았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안내양 농성' 등을 치면 그 사례가 많이 나온다. 이 기사를 참조하면 당시 버스 안내양의 근무 환경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버스 기사나 승객에게 있어서 많은 편의성을 제공해 주던 직업이었는데, 버스 기사에게 근무 중 피로를 많이 덜어줬는데 현대의 버스 기사는 운전부터 승객 승, 하차 확인까지 맡아야 하지만 안내양이 있으면 이런 관리적인 부분을 안내양이 보조해주기 때문에 운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내양 폐지 직후에는 버스 운전기사들이 적응을 힘들어 하며 피로를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다. 승객에게는 안전한 하차를 보장해 줬는데 아무리 출입문에 거울과 중문 안전 센서가 있어도 인간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출입문 막대 개폐 레버부터 내려 문부터 닫고 출발하려는 막장 기사들도 있지만 이 때는 안내양이 상술된 " 탁탁 오라이~ " 를 하기 전에는 문 닫고 출발하지 않았다.
3. 고속 및 관광버스 안내양
관광,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었다. 보통 주의사항이나 여러가지 안내를 해주기도 했고, 음료수 등을 직접 나눠주기도 했다. 이들은 시내버스 안내양과 이미지가 완전히 정반대였다. 복장부터가 미니스커트 등 시내버스 안내양보다 훨씬 세련된 제복을 입었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땅 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리웠고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종이었다. 그만큼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으며 고졸 이상 학력에 160cm등이 요구되었다.
대략 1986년경까지 존재했다가 1987~1989년 사이에 인건비 문제로 폐지 절차를 밟았고 1992년 10월 우등고속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관광버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가이드 등 안내양이 할 역할이 더 있었기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도 볼 수 있었다.
4. 해외 사례
유럽과 일본에서 1960년대까지 차장이 있었고, 이후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사라졌다.[6]
대만에도 있었다. 미국의 한 중국어 교재를 보면 타이베이 시먼딩에서 시내버스를 잘못 타서 다시 안내를 받는 회화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 버스 차장이 나온다. 중국 대륙에는 현재도 있으나 점차 없애 가는 추세이다. 기사 혼자 승무하는 시내버스가 늘어나고 있다.
외국에도 안내양이나 버스차장 같은 직업이 존재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가령 터키의 경우 웬만한 시내버스나 시외버스에 차장이 딸려있는데, 물론 여성이 험한 일 하기를 꺼리는 사회분위기상 차장은 거의 다 남자긴 하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다. 요금 받아주고, 길안내해주고, 시외버스의 경우 물이나 주스나 차같은 것도 서비스한다. 그 외 브라질,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인도 등 다른 몇몇 외국에도 종종 남아있는데, 차장이 존재하는 버스의 기사는 손님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한다.
중국에는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존재한다. 중상급 정도 규모의 아파트가 시설이나 편의성은 한국의 임대 아파트보다 못한 경우가 많지만 엘리베이터 층수를 묻고 눌러주는 안내양만큼은 한 명씩 꼭 있었다.[7] 그러나 현재는 웬만한 금수저 동네나 호텔이 아닌 곳에서는 관리비 절감을 이유로 없어진 듯. 하지만 버스 안내양은 아직 일부 노선 한정[8] 으로 남아있다. 단 남성 보안요원은 심야버스를 제외한 전 노선에 있다. 베이징 버스 문서 참고. 북한에도 조선중앙방송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전기가 없어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운영될 때가 없어도 엘리베이터 안내양은 있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좀 심한 막장성을 보여주는 곳이라 무슨 희한한 것들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한국의 엘리베이터 안내원과는 달리 북한과 중국의 경우는 '전 인민에게 직업을 배분해 주는 사회주의' 개념이 좀 강해서, 한국 입장에서 보면 정말 쓸데없는(...) 곳들까지 사람을 붙여 관리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멕시코에서는 시내버스 한정으로 안내원이 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전부 남성들이며, 봉고차로 운행되는 콤비에는 없고 중/대형 차량에만 안내원이 존재한다. 버스기사가 직접 고용하는 형식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같은 노선이라도 안내원이 없는 차량들도 많다. 이들이 버스기사 및 강도와 공모하여 강도들이 버스에 올라타서 총들고 강도짓을 할 수 있게 협조하기도 하고, 반대로 버스 강도와 대치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의로운 안내원들도 있다.
5. 미디어에서
개그우먼 이영자가 1994년 SBS 코미디 프로그램 기쁜 우리 토요일의 한 코너인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안내양 역할을 맡아 "안계시면 오라이~"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정래의 한강(소설)에도 이 일을 하는 그 시대 여성들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상사들의 갑질과 몸수색을 빙자한 성폭력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6. 유희왕의 카드
[1] 한자로 女車掌이다. 掌은 관장·관리·주관하다의 뜻.[2] 한자로 女車掌이다. 掌은 관장·관리·주관하다의 뜻.[3] 1970년대 후반부터 전, 중문 사양 시내버스가 등장했는데 앞문은 운전기사가 막대식 개폐 레버(혹은 BF101 같은 차량에 쓰이는 회전식 개폐 레버)로 여는 자동문 방식이었지만 중문은 안내양이 열고 닫는 수동문 방식이었다.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문은 수동문에서 자동문 방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리어 엔진 버스인 대우 BV101(1983년 출시)이나 현대 RB520L(1984년 출시) 같은 시민자율버스 운행 제도에 맞게 생산한 모델임에도 초창기 도입분의 경우 중문 사이의 안내양 전용 좌석과 중문 막대 스위치가 있었다.[4] TV에도 나왔다![5] 여담으로 이 사례는 1985년 초반 MBC 뉴스데스크의 카메라 출동 코너에서 "말투 거친 버스 승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된 적이 있었다(MBC Archive에 있는 영상인데 아쉽게도 1984~1986년 당시 뉴스데스크 방송분 전체가 아닌 카메라 출동 코너만을 모은 클립 영상으로 되어 있다).[6] 하지만 영국 런던에서는 구형 2층 버스에 안내양이 존재했었는데 '''무려 2004년까지''' 버스에 탑승하여 승차권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7] 우리나라에도 (주거용 주택에는 없었지만) 백화점 같은 상업용 건물에는 90년대까지 엘레베이터 안내양이 있는 곳이 있었다.[8] 대부분 고수요 굴절버스 노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