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전투

 

'''안시성 전투'''
安市城戰鬪
[image]

'''시기'''
645년(보장왕 4년) 음력 8월 10일 ~ 9월 18일(9월 6일 ~ 10월 14일)
'''장소'''
고구려, 안시성
(현 중국 랴오닝 성 하이청 시 잉청쯔(英城子) 촌)
'''원인'''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중, 당(唐)의 안시성 포위
'''교전국'''
<^|1>[image] '''고구려'''
<^|1>[image] ''''''

'''지휘관'''
<^|1>안시성주[1][2]
<^|1>당 태종
장손무기
이세적
아사나사이
이도종
부복애
'''병력 및 피해 규모'''
불명[3]
'''결과'''
고구려군의 승리, 당군 철수
'''영향'''
1차 고구려-당 전쟁 종료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결과
4.1. 안시성 전투의 필요성
5. 역사적 의의
6. 등장 작품
6.1. 안시성의 꽃송이(1964년 영화)
6.2. KBS 삼국기 (1992년 ~ 1993년)
6.3. SBS 연개소문 (2006년 ~ 2007년)
6.4. KBS 대조영 (2006년 ~ 2007년)
6.5. 영화 안시성


1. 개요


'''당 태종 이세민을 상대로 우주방어 중인 고구려군의 기록화'''
645년 고구려를 침공한 당 태종 이하 당의 군대가 7월부터 9월까지 고구려안시성에서 2개월(60여 일)을 충돌한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개전 이후 당나라고구려의 여러 성을 함락하는 등 고구려에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이 안시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여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된다.[4] 수성전(守城戰)의 교과서적인 전투로, 후대 한국의 역사가들이 안시성 전투 자체나 안시성 전투 전후로 벌어졌던 사건들을 예로 들어 고구려군의 구원 시도 실패나 당시 당군의 공성 무기에 맞선 고구려군의 전략 전술들을 연구해 국방 전략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살수대첩과 함께 중국에 대한 승리로서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2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고구려 침공에 실패하면서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왕조를 세운 지 40년도 안 돼서 패망하고, 이어서 등장한 통일왕조 당나라의 태종은 '정관의 치'(貞觀之治)[5]를 이룩한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황제로서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며 고구려에서 물러가는 서사시적인 전개가 특징이다.

2. 배경


당 태종은 집권한 이래로 줄곧 고구려 정복을 꿈꾸며 동북방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이에 제동이 걸렸다. 연개소문당나라의 오만하고 무리한 요구들을 거부했고, 특히 신라 공격에 대한 당의 내정간섭이 무시당하자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킨다.
이세적, 이도종 등이 개모성,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 당 태종이 요동성, 백암성 등 4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지만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인다.
요동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채 요하에서 이틀 거리 이상 나아가지 못했으며, 평양을 향해야하는 수군의 활약도 사라진 채 32일 동안 단지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에 접근하는데 그쳤고,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6월 22일부터 안시성 남쪽에 접근하는 8월 10일까지 별다른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당 태종은 건안성과 안시성 어느 쪽을 먼저 칠지를 논했는데 밑작업으로 안시성을 먼저 정리하고, 집중하여 건안성을 쳐야한다는 이세적의 주장에 따라 안시성 공략에 먼저 들어간다.[6]

3. 진행


당나라의 군사들이 안시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 태종의 깃발, 수레의 덮개 등을 발견하는 즉즉 성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황제를 도발했다. 당 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모두 묻어버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 소식이 성 내부에까지 들려오자 안시성 군사들은 이미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공습이 시도되었으나 당군은 번번이 성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내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당 태종을 포함한 당나라 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고연수, 고혜진 등이 군사를 옮기면서 장량의 군사와 합해 오골성을 돌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함락시키자는 의견을 냈지만, 장손무기가 건안성, 신성에 주둔하던 고구려의 10만 대군에게 우회 공격을 받을 것을 우려하자 중지되었다. 여기서 당 태종이 살수대첩의 전훈을 고려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과 수성 중인 고구려군 사이에는 산발적 교전이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들려오는 닭, 돼지 소리를 듣고,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이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기 때문이다."라 여기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게 했다. 그 뒤 정말로 밤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성벽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듣고 당 태종이 성 아래로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게 했다.
전투 말기,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증축했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도 여섯 번에서 일곱 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나라군이 충차와 포석으로 성벽을 부수자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리했으며, 이도종이 싸우다 부상당했고 당 태종 자신도 다치는 등 사상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토산을 완성하는 데에는 2달이나 걸렸다.''' 당시 당군은 토산을 쌓는 데에만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토산이 완성되고,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정예군 수백 명이 부서진 틈을 통해 기습에 성공,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결국 당 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하고 조리돌렸으며, 이도종 또한 죄를 청했으나 개모성,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
요동성이 일찍 추워지며, 풀은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때 당군의 퇴각 루트가 안시성에서 철수해서 요하 하류의 요택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기록에는 요택이 진흙창이라 겨울철에 병사들이 건너는데 몹시 고생해 태종 자신까지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어야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7]

4. 결과


안시성의 대패로 인해 고구려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원정을 한 틈을 타서 설연타의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 하주를 노략질했다.[8] 이로 인해 당 태종은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를 직접 정벌하려다가 병에 걸리게 된다.
1차 고구려-당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서 대미를 장식했으며, 당 태종과 당나라의 주력군이 패배함에 따라, 안시성 전투는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다. 또한 당 태종 역시 이 패배로, 수 문제 이후, 수양제가 그렇게 하였듯 당장 무리하게 대규모의 원정보다는, 장기적으로 대규모의 원정을 준비하면서도, 고구려와는 계속하여, 소모전, 유격전을 치르고, 신라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등,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역사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기도 하다.
다만 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당태종은 고구려에게 국지전,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는 기동전, 수군이나 유목민족을 이용하여, 기습과 급습 등으로 고구려와 계속하여 소모전을 치루었으며, 이후 다시 한번 대규모의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려 했으나, 준비중에 태종이 죽으면서 멈추어진 것이지,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다.

4.1. 안시성 전투의 필요성


  • '안시성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안시성은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작은 성이었다. 더구나 요하 하류인 요택에 인접한 위치로 굳이 당군이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요택은 지금의 요하와는 달리 온통 진흙 투성이의 뻘로 평상시에도 사람의 통행이 힘든 지역이었으며, 당시 교통로나 수군, 당군의 침공로도 요하 중, 상류를 통한 길이어서 이곳을 지키는 최대의 성이 '요동성'이었다. 따라서 당태종도 처음에는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안시성을 공격하지 않고, 평양성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세적 등 신하들의 반대로 안시성을 공략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시성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당군이 함락한 성들을 탈환하면서 퇴로도 차단당하고 어쩔 수없이 요택으로 후퇴하게된다. 만약 당태종의 생각대로 안시성을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직행했으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당시로선 안시성 전투는 불가피했다.'
안시성 전투가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다. 당시 당태종과 휘하 인사들이 생각하기엔 안시성은 꼭 처리해야 할 곳이었다. 안시성이 작은 성이라지만 이를 거점으로 삼아서 평양을 직공하는 당군의 후미와 보급로를 공격하면 당군에겐 상당히 피곤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당군은 수십년 전 살수 대첩의 전훈을 당연히 상기하고 있었고, 평양을 공격하기 전 요동 방어선을 먼저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안시성을 두고 가면 필시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할 것이라는 이세적과 장손무기의 주장을 당 태종이 받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5. 역사적 의의


書生驅馬儘悠悠

서생이 먼 길 내내 말을 몰아 왔으니

好向郵亭一日留

우정에서 하루쯤 머물러도 좋으렷다

嵐翠平分山勢遠

산세를 멀리 공평히 나누는 푸른 이내요

春光初上柳梢浮

버들가지에 막 올라와 떠도는 봄빛이라

長川芳草晴還雨

긴 하천 방초에는 날 개었다 비 내리고

沃野嘉禾歲有秋

기름진 들판의 곡식은 풍년을 예고하네

正是居民懷盛德

그야말로 주민들이 성덕을 그리워하는데

文皇何事到荒陬

문황은 무슨 일로 이 구석까지 행차했나[9]

이숭인. '''도은집 제2권 시 개주'''(蓋州)

이 전투 자체의 결과로 인한 파장은 상당했다. 당의 6부 상서 중 무려 4개 상서(병부, 예부, 이부, 형부)가 참전하였고, 이들 외에도 종3품~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과 정관 연간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었던 이세적,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장손무기까지 참전한 총력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안시성에서 완패했다.
이후에 남긴 상징성은 더욱 빛났다. 당 태종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고 그의 업적이 크게 부각되면서, 역으로 그 당 태종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안시성과 고구려의 위상이 역사에 크게 남게 된 것. 이 때문에 후대 고려조선의 사대부들 역시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크게 자랑스러워 했으며, 그들 국가들을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했다. 여몽전쟁 말기에 고려가 결국 항복하려 하자 쿠빌라이 칸이 매우 기뻐하면서 '당 태종조차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10]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구려 이후 한반도 국가들의 소위 '국위선양'을 크게 시킨 전투.
한편,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전투에서 당 태종이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전승이 전해져 안시성 전투를 다루는 매체에서 으레 묘사되곤 한다.

6. 등장 작품


안시성 전투는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1992년 - 1993년), 대조영(2006년 ~ 2007년)과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2006년 ~ 2007년)에서 자세하게 묘사된 적이 있다. 뒤의 두 작품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온 작품인데, 둘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고, 두 작품 모두가 나온 시기가 시기다 보니, 둘다 당나라군은 쓸어버리게 묘사했고, 서로 비교가 되는 편이다.

6.1. 안시성의 꽃송이(1964년 영화)


링크
이규웅 감독 제작 영화.
시놉시스: 안시성의 젊은 장수 고헌에게는 사랑하는 버들아기가 있었다. 버들아기는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의 딸이기도 하다. 그 젊은 장수를 또한 고구려의 충신인 연개소문의 딸이 연모하고 있었다. 그 즈음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안시성을 쳐들어온다. 하지만 고헌의 용맹과 버들아기의 지혜 앞에는 30만 대군의 위력도 무력했다. 마침내는 당나라의 30만 대군이 회군하게 되고 고헌과 버들아기는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본래 KBS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가 인기를 얻어서 1964년 영화로 나왔다고 한다.#
창작인물인 안시성의 젊은 장수 고헌과 버들아기가 주인공이다.

6.2. KBS 삼국기 (1992년 ~ 1993년)


삼국기의 경우는 작품 중반부의 절정으로 꽤 많이 신경써서 제작했고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준다. 특히 당군은 안시성 전투 전까지 승승장구했고, 다양한 작전을 쓰며 다양한 공성 병기[11]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절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 아님을 묘사했다. 안시성은 이것을 죽을 힘을 다해가며 처절히 막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6.3. SBS 연개소문 (2006년 ~ 2007년)



1화와 2화에서 등장한다.
연개소문의 경우애는 산성의 세트장이 대조영보다 더 고구려식 산성에 가까우며, 무장들이 무쌍을 찍다보니 액션 부분이 많지만, 연개소문 특유의 병맛스러움[12] 때문에 대조영보다 낮게 평가되는 감이 있다. 또한 연개소문 본인이 안시성주를 대신하여 총지휘권을 잡은 것으로 묘사한 것이나, 토산이 무너지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은 것도 고증 오류.[13]

6.4. KBS 대조영 (2006년 ~ 2007년)



'''토산이 무너진다!''' '''토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나라 대군이 무너진다!'''

-대조영 5화 중-

대조영에서는 수십만의 당나라 대군이 안시성으로 돌격하는 모습, 공성전, 토산의 붕괴와 타격감 등을 실사 촬영, CG로 리얼하게 처리함으로써 거의 반지의 제왕 급의 전투신을 구현해냈다. 특히 토산이 무너질 때의 장면과 OST가 맞물리는 폭풍 간지의 장면은 대조영 최고의 명장면으로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거기에다가 병졸들의 갑옷도 대조영이 좀 더 투박해서 더 병졸스럽다는 평이 있다. 사서와는 달리 고구려군이 토산 지하에 굴을 파서 지하수를 흘려보내 지반을 약화시킴으로써 토산의 붕괴를 유도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그에 따라 토산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한다든지 하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토산이 완전히 무너지는 시각적 연출은 훌륭했다. 또한 고구려군들이 도끼를 많이 들고있다.

다만, 대조영의 경우 당나라 장수들에 대한 묘사가 1차원적인 수준인데 반해, 연개소문의 당나라 장수들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입체적이라 인물 캐릭터 중심에서는 연개소문이 낫다는 의견이 있다.

6.5. 영화 안시성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안시성이란 제목의 영화도 개봉했다. 2018년 9월 19일 개봉. 감독은 찌라시: 위험한 소문을 제작한 김광식이다. 연개소문 역에 유오성, 양만춘 역에 조인성, 당 태종 역에 박성웅이 출연했다. 스케일이 크고 시종일관 전투신만 나온다. 개연성 측면에서는 평가가 별로지만, 개봉 시기가 추석 연휴였던 것을 잘 살려서 500만 관객이 넘는 흥행 성공은 거두었다.
[1] 기록으로 이름은 남아 있지 않으나, 민간전승이나 야담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까지의 대부분의 한국사 교과서는 이 이름을 정설처럼 채택했었다.[2] 양만춘이란 이름의 유래를 다룬 글[3] 신당서에서 장손무기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10만인데 삼국사기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장손무기가 주장한 10만의 병력은 안시성이 아니라 신성과 건안성의 병력을 합친 것이다.[4] 이에 대해서는 안시성 하나에서 막혀서 철수했다기보다는 안시성에서 당군이 발목이 잡혀있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열을 정비해 반격했고 이에 당군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된다.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면 안시성뿐만 아니라 요동 방어선 북방의 신성, 남방의 건안성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5] 당 태종의 연호를 딴 것이다.[6] 이는 안시성이 건안성보다 전진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건안성을 치다가 안시성의 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쌍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면 난감해진다는 것이 요지이다.[7] 이미 요동성이나 백암성, 비사성, 개모성 등의 고구려 변방 지역 성들을 함락시켰으면서 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해서 간 이유는 당군이 안시성에서 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반격을 실시해 배후로부터 당군이 함락시킨 성들을 탈환하면서 당군을 압박했고, 이것이 당군의 퇴각이 굳이 요택이라는 험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8] 설연타의 당 배후 공격은 연개소문의 책략이 개입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9] 문황은 당태종 이세민의 시호 문무대성황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 태종이 요동까지 원정하러 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풍자하는 것이다.[10] 나중에 쿠빌라이는 카다안의 침입때 고려군이 초전에 고전하자, 당 태종을 물리친 고려가 왜 쩔쩔매는가? 라고 의아해 하기도 했다.(...)[11] 대표적으로 공성 사다리인 운제. 이거 나온 작품, 몇 없다. 절대 다수는 사다리 세워 올라가기만 할 뿐.[12] 예시를 나열하자면 연개소문 특유의 발 CG와 환단고기 드립들과 척준경을 아득히 능가하는 인간 흉기로 묘사되는 장수들과 슝슝 추풍낙엽처럼 갈려나가는 일반 병졸들 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13] 토산에 대응하기 위해 목책을 쌓았는데 이 목책을 토산 쪽으로 넘어뜨려 다리로 썼다.